금융 당국이 당초 이달 시행하기로 했던 은행권에 대한 추가 자본 적립 규제를 내년으로 미루는 방안을 검토한다. 탄핵 정국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은행이 자본 적립 부담 때문에 대출 문턱을 높이면 가뜩이나 환율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말 도입할 예정이었던 ‘스트레스 완충 자본 규제’를 미루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규제 도입을 놓고 정부 규제개혁위원회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면서 “당초 연내 제도를 시행할 계획이었지만 은행권에서 여러 의견이 나와 시점을 늦추는 방안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스트레스 완충 자본 규제는 금리나 환율이 급격하게 오르는 비상 상황을 가정해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그 결과에 따라 현행 규제 비율(총자본 비율 기준 11.5%)보다 최대 2.5%포인트 자본 비율을 더 높이도록 하는 제도다. 지난해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자 당국은 금융사들이 위기 상황에 대비해 일종의 ‘비상금’을 적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 도입하기로 했다. 당국은 올해 말로 시행 시점을 못 박고 규제 시행에 앞서 거쳐야 하는 사전 예고 기간까지 단축하며 도입을 서둘러왔다. 하지만 최근 내부 분위기가 돌변하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스트레스 완충 자본 규제 도입 유예를 검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소기업들의 자금줄 고갈이 우려되는 점이다. 탄핵 정국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와중에 새 규제마저 도입되면 은행들은 자본 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출 같은 위험 가중 자산을 줄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비상계엄 이후 고환율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심각한 자금난에 처할 수도 있다. 금융 당국은 새 규제 유예와 더불어 기존 건전성 규제도 완화하는 방안 또한 검토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금융상황점검회의를 열고 “환율 급등 등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로 금융사의 재무적 탄력성이 축소돼 긴요한 자금 공급, 정상적인 배당 등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시장과 소통해 규제 합리화를 위한 다양한 과제를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에 비해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지방은행들이 강화된 규제 비율을 맞추기 버거워하는 점도 당국으로서는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실제 전북은행(14.1%)과 경남은행(14.99%)의 9월 말 기준 자본 비율은 14%대로 상향될 규제 비율(최대 14%)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다. 지방은행이 대출 문턱을 높이면 이에 기대온 지방 소재 중소기업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환율마저 급등세를 보이면서 은행권의 자본 비율 관리 부담은 더 커졌다. 환율이 상승하면 은행이 해외 기업 등에 달러로 빌려준 외화 대출의 원화 환산액이 불어나 위험 가중 자산을 불리기 때문이다. 한 지방은행의 재무 담당 임원은 “스트레스 완충 자본 규제는 ‘은행이 돈을 잘 벌고 있을 때 비상금을 확보해두자’는 취지로 마련된 것”이라면서 “지금처럼 경제 상황이 불확실한 때 자본금을 더 쌓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