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3일 발표한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은 겉으로는 업계의 자율적 사업구조 재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석유화학 업계가 공급 과잉 설비를 축소하고 고부가가치·친환경 사업으로 전환하면 정부가 뒤에서 인센티브와 대출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석유화학 업계는 공멸 위기에 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현재 경쟁력을 잃어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는 이미 2022년부터 손익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밑돌고 있다. 중국에 이어 중동도 대대적인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증설에 나서면서 공급 과잉이 초래됐고 범용품 중심의 성장 전략은 한계에 이르렀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여천NCC 등 NCC 9개사의 올해 영업 적자는 3분기 기준 8494억 달러로 3년 연속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먼저 글로벌 공급 과잉 상태인 NCC 설비를 개별 기업들이 합작법인 설립, 매각, 폐쇄 등 어떤 방식으로든 축소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융자 2조 원과 보증 1조 원 등 3조 원 규모의 석유화학 업종 전용 정책금융을 내년 1년간 공급하고 사업 재편 기업에 대해 기업활력법상 지주회사 규제 유예 기간을 기존 3년에서 5년으로 확대해주는 식이다. 설비를 폐쇄·축소하거나 사업을 양도하면서 석유화학 업체가 경영 위기에 봉착하면 고용 유지 지원금 대상에 해당 기업을 포함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3조 원 규모 정책금융의 경우 대출은 기존의 상품보다 1%포인트 이상 낮은 저금리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보증의 경우 보증비율은 90~100%이며 0.2~0.5%포인트인 보증료를 차감해주기로 했다.
국내 NCC들이 여수·울산·대산 등 국내 3개 석유화학산업단지에 몰려 있는 만큼 사업 재편 시 발생할 수 있는 지역경제 침체 및 고용 위기도 뒷받침할 계획이다.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은 대규모 재해·질병이 발생하거나 지역의 주된 산업이 현저하게 악화될 우려가 있는 경우 2022년 2월 시행된 지역 산업위기 대응 및 지역경제 회복을 위한 특별법(지역산업위기대응법)에 따라 산업부가 지정할 수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법상 ‘주된 산업’ 요건을 현실화한 뒤 내년 상반기 중 지정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며 “주된 산업과 연관된 협력 업체의 고용 유지 지원금 매출액 요건을 15%에서 10%로 완화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선제 대응 지역 내 석유화학 기업이 사업 재편 계획에 따라 자산을 매각할 경우 과세 이연 기간을 5년 거치 5년 분할 익금산입 방식으로 연장해줄 계획이다. 현재는 양도차익에 대해 4년 거치 3년 분할 익금산입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 시 지역투자보조금 지원 비율도 최대 15%에서 25%로 상향한다.
정부는 또 나프탈렌 및 나프탈렌 제조용 원유 무관세 기간을 내년 말까지 1년간 연장하고 내년 하반기 중 석유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해 공업원료용 액화천연가스(LNG) 석유수입부과금을 환급해주겠다고 밝혔다. 분산형 전력 거래를 활성화해 기업의 전기요금 선택권을 확대하고 에탄 도입을 위한 터미널 및 저장 탱크 건설 인허가 패스트트랙도 지원한다.
다만 업계에서는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기업들은 정유와 석유화학 수직 통합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중동의 경우 정유와 석화 통합비율이 100%로 중국은 81%, 일본도 50%에 달한다. 하지만 한국은 30%에 그친다. 주요국들은 정유와 석유화학을 완전히 통합한 정유석유화학통합공장(COTC)도 적극 도입 중이다. 국내 NCC 설비들이 40~50년씩 노후된 설비들이라는 점도 문제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매각을 하고 싶어도 오래된 설비를 사려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위한 칼을 직접 휘둘러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정부가 시설 축소와 매각을 유도하기로 했지만 강제성은 없기 때문이다. 지원책이 업계 생각보다 크게 부족해 자율적인 사업 재편이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은영 삼일PwC 경영연구원 상무는 “현재의 시장 및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과감히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이 그나마 남은 골든타임을 지키는 길”이라며 “미국도 일본도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 개선을 이뤘고 기업 자율에만 구조조정을 맡길 경우 골든타임을 놓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