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집게 같은 한마디…神力 가장한 '가스라이팅'에 갇히다

■ 불확실성 고조에 무속사기 활개
◇업체 급증 '관리 사각지대'
점술 종사자·관련 범죄 동반 증가
사기죄로 기망행위 인정도 쉽잖아
◇범죄수법은 대부분 동일
생명·재산 언급하며 굿·부적 요구
공포를 먹잇감 삼아 맹신 빠뜨려
정치인·교수·기업인 등이 더 의존

서울경제 DB (해당 이미지는 AI 이미지생성도구로 제작됐습니다)

경기 침체속에 한국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이를 양분 삼아 무속·역술 산업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력’을 미끼로 일반인은 물론 고학력자나 부유층 등을 노린 각종 사기 범죄도 증가세다. 특히 최근에는 ‘건진법사’ 전성배 씨의 공천 개입 의혹, ‘내란 비선 기획자’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신당 운영 이력 등이 드러나며 무속이 정치와 권력층까지 깊숙이 파고든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3일 서울경제신문이 법원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이 무속인인 형사사건은(단순 범죄 제외, 사기·공갈·성범죄 등에 한정) 10년 전 46건에서 2019년 59건, 지난해 64건으로 증가했다. 이는 무속 종사자 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늘어난 데 따른 여파로 해석된다. 올해 4월 통계청 전국사업체조사에 따르면 최근 ‘점술 및 유사 서비스업’ 사업체 수(2022년 기준)는 9391개, 종사자 수는 1만 194명이었다. 2020년 8942개(9692명), 2021년 9028개(9711명)에서 매년 증가하는 모양새다. 다만 대부분이 영세한 1인 사업체이고 사업체 등록 없이 현금 거래를 해 통계에 잡히지 않다 보니 실제 종사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죄 수법은 대부분 동일했다. 피해자와 가족의 생명·합격·재산 등을 언급하며 굿이나 부적을 요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재앙이 닥친다고 공포심을 심는 방식이다.


눈에 띄는 점은 피해자 중에 대학교수·의사·사업가·정치인 등 이른바 ‘사회 상류층’도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한 무속인 A 씨는 정치인의 아내 B 씨에게 “남편이 재물복을 덜어내야 나쁜 액운을 물리치고 공천에서 당선될 수 있다”고 꼬드겨 총 72억 원을 받아냈다. 또다른 무속인 C 씨는 주식투자로 거액을 번 한의사 D 씨에게 “나는 신을 소환할 수 있는데, 신이 당신에게 크게 분노해 수익을 넘기지 않으면 불행이 올 것”이라고 협박해 1억 5000만 원 이상을 뜯어내기도 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무속·역술인에 의해 이뤄지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범죄는 엘리트 집단에까지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라고 평가한다. 약자가 아니라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일수록 맞춤형 대안을 제시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당사자의 절박함을 이용한 ‘지배적 종속’ 전략”이라며 “정식 종교가 ‘불신 지옥’ 수준의 추상적 맥락인 반면, 사이비는 이미 개개인의 약점을 파악한 채 구체적인 협박을 하므로 더욱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많이 배우고 가진 사람일수록 고민이 많다. 이들의 고민을 해결해 줘 기존의 믿음 체계를 깨버리고 맞춤형 믿음 체계를 창조해주면 오히려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범죄심리학회장을 지낸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과 교수 역시 “정치인·사업가처럼 예측 가능성이 낮은 분야에서 일한다면 특히 운의 영역에 대한 불안함이 크다”고 설명했다.




무속인에 의한 범죄는 일반적인 사기와 달리 무속 행위가 실제 효과를 보지 못했더라도 기망 행위임을 인정받기 어려워 피해 회복이 까다롭다는 문제도 있다. 과거 대법원 판결을 보면 무속 행위에 대한 대가가 ‘전통 관습·종교 행위로서 허용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면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한계’에 대한 구체적 액수·횟수가 모호해 하급심 판결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시선이다. 재판연구원 E 씨는 “기도비 명목으로 돈을 받았을 때 이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상황마다 달라 결국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 있다"며 “일반 사기 범죄보다 고려할 변수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공식 등록 절차가 있는 종교인과 달리 무속·역술업 종사자는 정부 차원 실태 조사조차 부재해 ‘관리 사각지대’ 속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펼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 프로파일러는 “무속인들이 ‘정교분리’ 원칙에 기반해 강제성 있는 관리를 받지 않다 보니 오히려 쉽게 권력에 접근하고 있다”며 “최소한 종교계 내에서라도 느슨한 형태의 협약이나 감시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도 “무속이 ‘오락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주술적 요인이 한 국가의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방해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내부에서조차 일정 수준의 ‘걸러내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역학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과거 가입 회원 수가 30만 명에 달했지만 올해부터 협회 주관 자격증을 보유하고 성범죄 이력이 없는 이들에 한해서 7500명 선으로 정리했다”면서 “사이비 역술인과 전문 역학사 사이의 구분이 전무한 상태라 전반적인 인식이 나빠졌다. 공인중개사나 미용사처럼 국가에서 ‘철학관’ 등의 이름을 쓰는 업체에 대해서는 자격증 등록을 의무화하고 실태 조사도 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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