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덫’에 갇힌 환율…정부 '개입땐 달러만 날릴까' 주저 [이슈&워치]

24일 야간 장중 1460원 터치
나흘 연속 1450원대 '15년만'
수출 제조기업·가계 등 직격탄
외환 스와프 연장 카드 등 무력
일각 "정국 안정 우선" 목소리

최상목(오른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달 19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사진 제공=기획재정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한덕수 국무총리가 26일까지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24일 원·달러 환율이 야간 거래에서 한때 달러당 1460원을 돌파했다. 25일 오전 2시 최종 거래 때는 1457.5원에 마감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박상현 iM투자증권 전문위원은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주간 거래 시장에서도 환율이 장 후반으로 갈수록 올랐다”며 “한 총리에 대한 야당의 탄핵 가능성이 야간 거래에서도 환율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1450원대로 올라선 원·달러 환율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 고환율이 장기화하면서 기업과 가계에 미칠 악영향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지만 정부도 지켜만 볼 뿐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전후까지 지금의 답답한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외환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72시간 내 여러 정책을 쏟아낸다고 예고했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환율 상방 요인이 많아 쉽사리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려도 바닷물이 한 번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지금 개입하면 달러만 날리고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환 헤지와 연말 외환 수요가 있어서 당분간은 지금의 박스권을 유지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당분간은 대규모 직접 개입이나 조치 없이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도 고환율에 따른 부담이 많다는 점이다. 원·달러 환율은 2일부터 전날까지 16거래일째 140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일부터는 4거래일 연속 1450원을 웃돌았다. 원화 환율이 1450원을 넘은 것은 외환위기(1997년 11월~1998년 3월)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11월~2009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이는 국내 기업들에 치명타다.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한 뒤 수출로 먹고사는 제조 중소기업들은 환율 영향이 절대적이다. 대기업들도 최근 해외에 투자를 늘리고 있어 환율이 요동치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환율이 10% 오르면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은 0.29% 하락한다. 중소기업은 환율 1% 상승 시 손실이 0.36%씩 증가한다. 가계 역시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에 국내 소비를 연쇄적으로 줄이게 된다.


정부도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카드도 꺼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담당자들이 분주하게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약발이 전혀 듣지 않고 있다. 당국은 19일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 거래 계약을 내년 말까지 1년 더 연장하고 한도를 기존 500억 달러에서 65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뒤인 20일에는 △외평채의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 상장 추진 △은행 선물환 한도 확대 △외화 대출 규제 완화 등을 뼈대로 한 외환 수급 개선 방안을 내놓았지만 튀어 오르는 환율을 막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의 해외 자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공공기관과 금융공기업의 외화 차입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자산은 4855억 달러로 외환보유액(4154억 달러)보다 많다. 실제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임광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국민연금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있다. 전직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사실 환율이 현재의 높은 수준까지 올라온 데는 국민연금이 해외투자를 늘리는 과정에서 달러 수요가 폭발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며 “수익률 제고도 국내 시장과 함께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1조 달러 규모의 순대외금융자산은 긴급할 때 쓸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1조 달러의 해외 순자산이 있는 것은 맞지만 단기 유동성 위기 때 정부 마음대로 곧바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외환보유액에 기대 지속적으로 환율 관리를 할 수도 없는 만큼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외환 쪽에서 더 할 수 있는 특별한 방안이 잘 안 보인다”며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정도인데 외환보유액이 감소하기 때문에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원화가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약세를 보이고 있는 위안화에 동조해 움직이는 경향이 강한 만큼 당분간은 정치 안정을 취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조언도 있다.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국이 먼저 안정되는 것이 급선무”라며 “추가경정예산과 같은 재정 정책으로 고환율에 따른 피해를 보완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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