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동맥고혈압’ 韓·日 생존율 격차 20%…전문센터가 해결 열쇠[메디컬인사이드]

■김대희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
폐고혈압 중 3% 남짓…‘폐동맥고혈압’ 드물지만 치명적
진단·치료 기술 발전 거듭…조기 진단 시 10년 넘게 생존
전문센터에서 다학제 진료 받으면 사망 위험 32% 줄어
일본은 전국에 전담센터…한국은 다학제팀도 몇곳 안돼

이미지투데이

“저 노래 연습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서울아산병원 폐고혈압·정맥혈전센터에 외래진료를 받으러 온 서제경(가명·20대 초반)씨는 “원래 목소리가 돌아오고 숨찬 증상도 한결 좋아졌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던 서씨는 쉰 목소리가 나오고 숨이 찬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폐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무리한 연습 탓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나아지기는 커녕 발성이 점점 어려워지고 계단 몇 개만 올라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증상이 심해져서야 동네 병원을 찾은 서씨는 엑스레이 검사에서 심장이 커져 있다는 소견을 듣고 부랴부랴 큰 병원을 찾았다. 심전도·심장초음파·폐기능검사 등을 거쳐 정맥으로 가느다란 관을 넣어 폐혈관의 압력을 직접 측정하는 우심도자술을 받은 끝에 폐동맥고혈압(PAH·Pulmonary Arterial Hypertension)이 확진됐다.



◇ 치명적인 폐동맥고혈압…조기 진단 중요한데 놓치기 쉬워

이름조차 생소한 PAH는 전 세계 인구의 1%에게 생기는 폐고혈압의 5가지 유형 중 1군에 속하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팔에 커프를 감아 측정하는 혈압은 왼쪽 심장에서 시작해 폐를 제외한 신체의 나머지 부위로 혈액을 운반하는 ‘체순환’의 압력을 말한다. 대개 ‘고혈압’이라고 하면 체순환의 혈압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폐 내부 혈압인 '폐순환'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폐 내부를 순환하는 혈관의 압력이 높아지면 폐고혈압이라고 부른다. 의학적으로는 심장에서 폐로 혈액을 내보내는 폐동맥압이 평균 20㎜Hg을 초과할 때 폐고혈압으로 진단하고 있다. 문제는 폐 내부 혈압은 팔에 커프를 감는 것처럼 비침습적 방법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질환에 대한 인식이 낮은데 대표 증상이 호흡곤란, 만성피로, 부종, 어지럼증 등으로 다른 질병들과 유사해 진단을 놓치기 쉽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폐고혈압을 원인에 따라 1~5군으로 나눈다. PAH는 폐소동맥의 증식과 폐쇄로 압력이 증가해 ‘폐소동맥쐐기압 15㎜Hg 이하, 폐혈관 저항 2wood units 초과’로 진단되는 유형이다. 전체 폐고혈압의 약 3% 정도로 드문 편이지만 예후는 좋지 않다. 폐동맥의 병적인 변화로 혈관이 좁아지면서 폐동맥 압력이 상승하다 보면 우심실 부하가 증가하게 된다. 심해지면 우심실 기능부전을 초래해 조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온라인에서 질환 정보를 찾아보고 망연자실해 있던 서씨는 주치의인 김대희(사진)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의 도움으로 약물 치료를 시작한 지 1년 여만에 증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김 교수는 “과거 2~3년에 불과했던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생존기간은 평균 7년 정도로 크게 향상됐다. 치료를 잘 하면 10년 이상 장기 생존도 가능하다”며 “일찍 치료를 시작한 환자들 중에는 뮤지컬 배우, 가수, 상담원 등 목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단 조기 진단을 받고 전문가의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는 것이 전제다.



◇ 약물치료, 초기 부작용 심하지만…전문치료 통해 장기 생존 길 열려

서씨 역시 그간의 치료 여정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고가의 약물치료를 시작하자마자 전신 통증과 함께 두통, 메스꺼움, 설사 등 각종 부작용이 시작됐다. 폐동맥과 전신 혈관의 평활근에 작용해 혈관을 확장하는 ‘레모둘린(성분명 트레프로스티닐)’ 주사의 작용기전상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증상들이다. 김 교수는 “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이 찢어지는 아픔’이라고 묘사될 정도”라며 “특히 초기 부작용이 심한데 신체가 적응되면 놀라우리만치 증상이 호된다. 괴로워하는 환자들에게 ‘저를 믿고 두 세달만 참아달라’고 당부한다”고 말했다. 프로스타사이클린 제제의 특징을 잘 아는 의료진 입장에서도 여간 괴로운 과정이 아닌데, 몇달 지나면 호흡곤란이 해소되어 환자들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이다.



◇ 숨은 환자 수천명…“일본 따라잡으려면 전문센터 등 정부 관심 절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한해동안 3300명이 PAH 진료를 받았다. 대한폐고혈압학회는 국내 폐고혈압 환자를 약 50만 명, PAH 환자는 약 6000명으로 추산한다. 질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숨겨진 환자가 많다는 의미다.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환자는 연간 3000~45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등 선진국의 PAH 생존율이 85% 이상에 달하는 데 비하면 갈 길이 멀다. 김 교수는 한국과 일본 PAH 환자의 생존율 차이가 20%가량 벌어진 배경을 전문센터와 정부 지원의 부족에서 찾았다. 2020년 미국흉부의사협회가 발간하는 공식학술지 ‘체스트(Chest)’ 발표 논문에 따르면 폐고혈압 전문센터에서 다학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사망 및 입원 위험도는 32% 감소했다. 폐고혈압의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심장내과·호흡기내과·흉부외과를 중심으로 흉부외과·류마티스내과·영상의학과·핵의학과 전문의가 참여하는 다학제 진료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김대희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가 폐동맥고혈압에 관한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

김 교수는 “일본은 폐고혈압 전문센터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한다. 반면 한국은 전문센터는 고사하고 다학제팀을 갖춘 병원을 찾기도 어렵다”며 “약을 2가지 이상 쓰는 병합요법의 보험 적용이 막혀있거나 해외에서 활발하게 처방되는 신약이 도입조차 되지 않은 등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초기부터 전문적 치료가 이뤄지면 폐동맥고혈압 환자도 장기 생존이 가능하다. 질환 인지도를 높여 조기 진단 및 치료가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의 관심이 간절하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