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여는 수요일] 흐린 날

도종환


날이 흐리다


날이 흐려도 녹색 잎들은


흐린 허공을 향해 몸을 세운다


모멸을 모멸로 갚지 말자


치욕을 치욕으로 갚지 말자


지난해 늦가을 마디마디를 절단당한


가로수 잘린 팔뚝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연둣빛 잎들이


솟아나고 있다


고통을 고통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극단을 극단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여전히 푸르게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수다




흐린 날뿐이랴. 봄 가뭄, 여름 장마, 가을 태풍, 겨울 폭설이 해마다 찾아와도 나무는 평생 한 발자국도 비켜서지 않는다. 수만 년 계절의 압력보다 더 무서운 호모사피엔스가 전기톱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와도 몸을 떨지 않는다. 태양을 숭배한 죄밖에 없는 팔뚝이 잘려나가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가까스로 움튼 맹아가 피운 한 송이 꽃이라도 그 안에 품은 꿀을 독으로 바꾸지 않는다. 상처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 저마다 아픈 오월 숲이 거짓말처럼 푸르다. 모멸도 치욕도 고통도 눈부신 엽록으로 물결친다. <시인 반칠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