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매출 규모 중심인 현재의 기업 분류 체계에 칼을 대기로 한 배경에는 정부 재정이 성장 기업 대신 한계기업으로 흘러가 ‘좀비기업’만 양산한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 현행 중소기업기본법은 매출액이나 자산 총액이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중소기업 세제·재정은 물론이고 마케팅 지원 등 수백 가지의 지원 혜택을 끊어버린다. 또한 중견기업으로 진입하는 순간 대기업에 준하는 강력한 규제 그물망에 걸리게 돼 중소기업이 성장할 유인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7일 “현재 우리나라 기업 분류 및 지원 체계는 기업이 커질수록 도리어 벌을 주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며 “기업 규모를 떠나 성장성이 큰 기업을 추려내 이 기업들에 지원을 몰아주면 성장은 물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까지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김영주 부산대 교수팀이 대한상공회의소 의뢰로 분석한 결과 국내 12개 법률에만 343개의 계단식 차등 규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 총액 5000억 원 이하의 중소기업에는 없던 차등 규제가 중견기업으로 넘어가면 94개 생겨나고 자산 5조 원 이상의 대기업이 되면 329개로 급증하게 된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혁신을 통해 몸집을 불리기보다 법인을 쪼개거나 성장을 멈춘 채 중소기업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기형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소벤처기업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국내 중소기업 수는 약 830만 개로 전체 기업의 99.9%에 달하며 종사자 비중 역시 80.4%를 차지할 정도로 중소기업은 한국 경제성장과 고용의 중요한 축이다. 중소기업에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우리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해야 할 중견기업으로의 이동은 정체된 상태다.
기획재정부와 중기부 등 관계부처도 한국 특유의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가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져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영국·독일·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자산이나 매출 규모에 따라 규제를 누적해 강화하는 제도를 두지 않는다. 영미권은 규제 목적으로 기업을 대·중견·중소로 나누거나 덩치별로 누적 규제를 부과하지 않고 상장 여부나 법적 지위, 시장 행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중소기업 지원의 기준점을 ‘규모’에서 ‘성장성’으로 대이동시키기로 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원 대상 선별 기준의 개편이다. 기존에는 매출액, 자산 총액 등 과거 재무제표가 절대적 기준이었다면 앞으로는 독보적 특허 보유, 글로벌 시장 진출 가능성, 투자 유치 활발도 등 미래 성장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새롭게 도입된다.
이와 함께 당장 매출이 적더라도 기술력이 입증된 고성장 기업군에는 연구개발(R&D) 자금, 세제 혜택, 정책자금 한도 상향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몰아줄 계획이다. 이는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이 이미 시행 중인 스케일업 정책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한정된 국가 재정으로 글로벌 유니콘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다. 반면 경쟁력을 상실한 한계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지원을 축소하거나 구조조정을 유도하기로 했다. 다만 오랫동안 정부 지원에 의존해온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반발은 넘어야 할 산이다. 지원 축소 대상이 될 수 있는 전통 제조업이나 한계기업들이 강하게 반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