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롱리스트(1차 후보군)’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거나 아니면 대놓고 나가라고 하는 게 속 편하죠.”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10월 국정감사에서 금융지주 회장 연임에 대해 “이사회에 자기 사람을 심어 참호를 구축하는 분들이 보인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금융 당국 고위 인사 A 씨는 이같이 꼬집었다. 회장 선임 절차를 밟고 있는 주요 금융지주가 최종 후보군(쇼트리스트)까지 발표한 마당에 뒤늦게 제동 거는 것이 “실리 없는 아마추어 같은 행동”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제 와 언성을 높인들 이 원장이 말하는 ‘높게 쌓아올린 참호’를 허물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금융권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은 이달 금융 당국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가만 놔두니까 부패한 ‘이너 서클’이 생겨 멋대로 소수가 돌아가며 계속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이 원장의 답변에는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것도 중요한데 가진 권한을 최소한으로 행사해 아주 비정상적인 경우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사실상 회장 선임 절차에 즉시 개입할 것을 주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나 임원추천위원회를 보면 일견 공감 가는 부분도 있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금융지주를 겨눈 대통령과 당국의 날 선 발언들은 ‘이너 서클’을 몰아내는 데만 영점이 맞춰져 있다. 정작 어떤 덕목을 갖춘 사람이 금융지주를 이끌어야 하는지나 어떻게 이를 제도화할지에 대한 고민은 한발 뒤로 밀려 있는 모양새다.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과거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관치가 없으면 정치, 정치가 없으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내치가 된다”고 했다. 한데 내치를 바로잡겠다며 투박하고 촌스러운 관치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대목은 이너 서클을 몰아낸 자리를 정권 코드에 꼭 맞는 인사가 꿰찰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나 정권과의 크고 작은 인연으로 최근 국책은행과 금융공기관 수장에 임명된 인사들을 보면 지나친 걱정도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