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성장 동력을 상실했고 정치는 신뢰를 잃었다. 저출산·고령화 덫에 갇힌 우리 경제는 올해 1% 성장도 버거울 정도로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지만 기업 발목을 잡는 규제 정책과 법안은 무분별하게 양산되고 있다. 민생을 보듬어야 할 정치권은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려 강성 지지층을 향한 거친 언행만 남발한다. 우리나라 경제와 정치가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어가는’ 일모도원(日暮途遠) 형국에 놓여 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산업에 대해서는 기존 관행과 방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반도체를 포함해 AI 등 첨단산업의 연구개발(R&D)에 대해서는 주 52시간 제한을 풀어 경쟁력을 키우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고 문재인 정부 때 총리를 지낸 그는 “극한 대결 국면을 보이고 있는 우리 국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며 “여야는 팬덤 정치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이제라도 국민과 민생을 챙기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원인과 해법은 무엇인가.
△저출생과 고령화, 국내 투자의 해외 유출,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복합 요인이 겹치면서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무역을 해서 먹고사는 우리에게는 매우 불리한 국내외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이 해법이다.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확대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규제 개혁을 통해 투자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악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기업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경제는 지난 70년간 우상향 성장을 해왔다. 정부와 정치권이 협력해 기업 활동을 뒷받침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 흐름을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표방한 ‘반도체 2강’ ‘AI 3강’ 구상을 평가한다면.
△반도체와 AI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설정한 방향은 옳다. 반도체 분야는 이미 강국이지만 최강을 목표로 해야 하고 AI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AI 3강 진입이 쉽지 않다. 경쟁국들은 보조금과 세제 혜택, 규제 완화 등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우리도 기존의 틀을 넘어 국가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 경쟁국들이 사용하고 있는 정책 지원 툴을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 정부 차원의 과감한 인풋(투입) 없이 어떻게 아웃풋(성과)을 낼 수 있겠나. 반도체와 AI 등 첨단 미래 산업은 개별 기업을 떠나 ‘국가 대항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R&D 분야에서는 주52시간제의 유연한 예외 적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반도체특별법에 이 같은 내용이 빠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결합한 에너지 믹스가 중요한데.
△반도체와 AI·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에 전력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기존 원전은 안정적으로 활용하되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 활용을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SMR을 비교적 일찍 시작했지만 실증과 상용화에서는 뒤처져 있다. 중국은 상용화에 들어갔고 미국도 목전에 두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세계적 추세이기 때문에 병행이 불가피하다.
-노동과 연금 개혁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노동과 연금 개혁은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결단을 내리지 못해 문제를 키우고 있다. 이해관계자가 많다 보니 정치권이 부담을 피하며 폭탄 돌리기를 한 측면이 크다. 더 미루면 부담은 다음 세대로 전가될 뿐이다. 여야가 함께 책임을 지고 결단하면 국민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다. 연금 개혁은 답이 분명한 사안이다. 구조 개혁 없이 현 상태를 유지하면 결국 기금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더 내고 덜 받는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결단력이다. 폭탄 돌리기를 멈추고 지금 세대가 책임지는 정치가 필요하다. 노동문제 역시 청년과 중장년이 상생할 수 있도록 노사정 대타협이 필요하다. 민주노총도 대타협에 참여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논란도 크다.
△정년 연장은 단순히 고령 노동자를 보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임금 삭감 없는 일괄적인 정년 연장은 청년 고용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노사정이 함께 참여해 서로 불만이 있지만 수용 가능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이 ‘사법 개혁’ 이름으로 ‘사법의 정치화’를 꾀한다는 우려가 큰데.
△삼권분립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는 국민 신뢰가 가장 높아야 할 기관이다. 과거에는 정치권에서도 다른 영역과 달리 사법부 결정은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20대 국회 때인 2019년 발생한 패스트트랙 사건 재판 결과가 이제 나온 것은 ‘지연된 판결’ 아닌가. 사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이 반복되면서 과거 같았으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사법 개혁 논의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국가 대계(大計)인 사법 개혁은 절차와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법부 스스로의 자성이 전제돼야 하지만 특정 정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국민적 공감을 얻어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국민의힘이 아직까지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계엄과 탄핵은 단순한 여야 간 정치 갈등의 시각으로 보면 안 된다. 헌정 질서 파괴에 대한 중차대한 문제다.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자기 정당 출신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비상계엄과 내란을 획책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인연을 끊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극단적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에 끌려다니며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국민과 중도층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헌정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제1야당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대 정당이 상식과 정도를 벗어난 정치를 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팬덤 정치가 ‘뉴노멀’이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원회에서의 과도한 언행과 손팻말 정치, 숏폼 영상 등은 다분히 강성 지지층 반응과 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합리적인 입법 논의는 사라졌고 정책은 깊이가 없다. 팬덤은 원래 지지와 성원의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은 반대 세력을 공격하고 정치인을 압박하거나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이런 왜곡된 구조가 고착되면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지도자가 아니라 팬덤에 휘둘리는 정치꾼이 되고 만다. 우리 정치의 공공성과 책임 윤리를 훼손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영국 의회의 전통인 ‘소드 라인(sword line)’을 강조하시는데.
△영국 하원 바닥에는 빨간색 두 줄이 그어져 있다. 양쪽에 서서 칼(sword)을 휘둘러도 닿지 않는 거리인 2.5m 너비라고 한다. 이른바 ‘소드 라인’이다. 영국은 여야가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우지만 지켜야 할 마지노선은 넘지 않는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은 지키는 것이다. 정치 언어에도 절제와 품위가 있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국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 정치에도 이런 기준이 필요하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행태를 보거나 저질 언어를 들으면 미래 세대가 과연 무엇을 배울까 걱정이 앞선다. 좋은 전통과 관행을 깨는 언행에 대해서는 사후 조치가 필요하다.
-국회와 정치권이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정치 복원이 절실하다. 지금 국회는 형식적으로는 열려 있지만 실제로는 전쟁 상태에 가깝다. ‘개점휴업’ 상태라고 봐야 한다. 대화와 협상이 실종되다 보니 국회가 만들어내는 성과물도 거의 없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역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여야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정당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체질 개선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하지 않게 된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평가한다면.
△이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 야당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본다. 야당이 호응하지 않더라도 계속 손을 내미는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정 운영에서 소통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일부 사안에서는 절차와 과정에 대한 존중이 더 필요해 보인다. 국정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국민적 공감과 제도적 정당성이 함께 가야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소통의 기조를 유지하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신중함이 보완된다면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과 피로감도 줄어들 것이다.
He is
1950년생으로 전주 신흥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미국 뉴욕대 행정대학원과 페퍼다인대 경영대학원을 거쳐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쌍용그룹에 입사해 상무이사까지 지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제 전문가로 발탁하면서 정계에 입문해 15대부터 20대까지 내리 여섯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노무현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의장, 민주당 대표 등을 지냈다. 20대 국회 전반기인 2016~2018년 국회의장을 거쳐 문재인 정부 때 국무총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