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구리 박사’ 은퇴설


1882년 토머스 에디슨이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발전소를 가동하면서부터 구리는 현대 산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소재가 됐다. 구리의 전기 전도성에 일찌감치 주목한 에디슨은 약 2만 4400m의 구리 전선을 매설해 맨해튼에 전기 공급을 시작했고 전화기·모터·발전기 등 거의 모든 전기 발명품에도 구리를 사용했다. 전력 시스템 보급과 함께 1911년 세계 구리 생산량이 100만 톤을 돌파하자 구리 산업계 대표들이 구리 수요 급증에 기여한 에디슨에게 485파운드(약 220㎏)짜리 구리 덩어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 뒤로 전기 인프라부터 건설·제조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안 쓰이는 곳이 없게 된 구리는 경기를 가늠하는 선행지표로 명성을 쌓았다. 경기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는 구리는 언젠가부터 시장에서 ‘구리 박사(Dr.copper)’로 불리게 됐다. 1929년 대공황에도,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구리 가격은 위기의 전조가 됐다.


이달 5일 런던금속거래소(LME) 현물 구리 가격이 사상 최초로 톤당 1만 3000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연간 상승률이 44%에 달하면서 시장에서는 ‘붉은 금’이라는 새 별명까지 생겼다. 글로벌 경기가 주춤한 와중에도 가격이 치솟는 것은 인공지능(AI)시대의 전력망 인프라 수요 폭증, 전기차 등 재생에너지 시스템 확산, 각국의 국방 예산 증가로 구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은 AI시대를 맞아 세계 구리 수요가 지난해 2800만 톤에서 2040년에는 4200만 톤으로 급증하고 1000만 톤의 구리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기와 무관한 구리값 고공 행진이 이어지면서 ‘구리 박사’의 예측력은 빛이 바랬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미 2023년에 “구리 박사가 은퇴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박사’ 타이틀 없이도 구리의 위상은 더없이 커졌다. 이제 구리는 경기 지표 대신 에너지와 산업 대전환을 이끄는 전략 자산이라는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구리 정광(원석)을 100%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는 부담스러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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