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첨단기술 각축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이 과거와 같은 추격형 성장을 고수하면 퇴보할 수밖에 없는 만큼 정책·관습·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창조적 파괴’를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피터 하윗 미 브라운대 명예교수의 고언이다. 그는 혁신 기업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금융이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한국에 대한 대미 투자 실행 압박이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가능한 한 이행 시기를 늦출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내놓았다.
하윗 교수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화상 인터뷰를 갖고 “한국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수출을 강화, 극빈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변모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였다”면서도 “안타깝게도 글로벌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지금은 이 같은 전략은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시스템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추격형에 최적화돼 있지만 이제는 선도형 경제로 바꿔 기술 선점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다. 하윗 교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한계를 넘어 계속 성장하려면 금융기관들이 필요하다”며 금융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미국의 벤처캐피털은 미국 경제에 놀라운 유연성의 원천이 돼왔다”며 “수많은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해 빠른 시간에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벤처캐피털이 활성화돼 유망한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견고하게 구축돼 혁신 생태계의 밑거름이 됐다면서 한국도 선진 금융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상대적으로 비활성화된 한국의 벤처캐피털 환경, 여기에 주택담보대출 등 안정적인 상품에 치중하고 있는 대형 시중은행들에 경종을 울린 발언으로 해석된다.
하윗 교수는 “(금융의 힘 덕분에) 30년 전 다우존스지수 상위권에 있던 기업 중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며 “당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에 속하는 거대 기업이었지만 지금 그 자리를 대체한 기업 중 상당수는 그때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30년 전 다우지수 상위권에 제너럴일렉트릭(GE), 엑손, 맥도널더글러스, 코카콜라, IBM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아마존, JP모건체이스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30년 전과 현재의 시가총액 순위를 비교하면 대기업에 속하지 않은 순수 스타트업 출신이 시총 ‘톱10’에 진입한 사례는 네이버 정도다.
하윗 교수는 신생 혁신 기업이 탄생하려면 바뀌어야 할 요소들이 많다며 경쟁법(공정거래법)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이 엄격한 경쟁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경쟁을 촉진해 신생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창조적 파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신생 기업이 기존 강자를 대체하고 강력한 리더가 되지만 결국 그렇게 성장한 기업 자신도 다음 세대 신생 기업에 밀려나기를 원치 않아 신생 기업을 억제하는 모순을 갖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기존 기업들이 정치적 영향력으로 하류 기업의 혁신을 억제하고는 한다”며 혁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쟁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하윗 교수는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어떻게 현대 경제성장을 이끌었는지를 입증해 조엘 모키어 미 노스웨스턴대 교수, 필리프 아기옹 프랑스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와 함께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특히 교역을 활발하게 유지하는 게 혁신 측면에서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하윗 교수는 “무역이 개방돼 있어야 외국의 새로운 기술도 접할 수 있고 경쟁도 촉진이 되며 소비자가 어떤 것들을 원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은 최대 교역국인 미국이 관세를 높여 미국과의 교역이 줄어들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하윗 교수는 “다른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새로운 무역 동맹을 모색해야 한다”며 “나의 모국인 캐나다도 매우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어떤 국가보다도 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으며 관세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매우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한국이 내수 시장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았다. 하윗 교수는 “미국과 캐나다는 국내총생산(GDP)에서 국내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60~70%지만 한국은 그 비중이 매우 낮다”며 “(관세로 인해) 미국에서 한국 제품을 구매하려는 의향이 낮아질 수 있지만 한국 내에도 구매력이 높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짚었다. 한국 인구가 5000만 명으로 상대적으로 작아 내수 시장을 노리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관측이 많지만 이제는 구매력이 높은 인구도 많아졌으므로 내수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미는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 합의했다.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미국이 투자처를 정하면 한국은 45일 이내에 투자금을 송금해야 하며 올해부터 실제 프로젝트에 대한 주문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묻는 말에 하윗 교수는 “솔직히 말해서 길을 걷다가 누군가 총을 들고 와서 ‘네 돈을 내놔’라고 하는 격”이라며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조건에 합의한 사례가 있지만 계속 약속만 하고 실제로 집행은 미루고 있는 것 같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약속은 많이 하되 이행은 가능한 조금만 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