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규모를 축소하고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유휴 부지에 메모리 팹을 지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업계 전문가들은 용인 산단 전면 폐기는 어렵더라도 일부 라인을 미국으로 이전할 확률은 상당하다고 본다. 미국 정부가 ‘관세 100%’ 청구서를 들이밀며 자국 내 생산을 강요하고 있어서다. 기업은 생존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정작 국내는 전력망 지연과 민원에 갇혔다. 정치권과 지자체가 기업의 등을 미국으로 떠민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메모리 반도체 기업은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 공장을 짓는 선택지뿐”이라며 통상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를 들여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팹을 짓고 올해 가동을 앞뒀다. SK하이닉스(000660) 역시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 7000만 달러를 투입해 패키징 공장을 건설 중이다.
문제는 두 회사 모두 미국 현지에 메모리 반도체 팹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관세 면제 조건을 현지 메모리 팹 보유로 못 박을 경우 타격은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시장 접근권을 무기로 메모리 팹 투자를 강요하는 셈”이라며 “현재 메모리 영업이익률이 50~60%대인 점을 고려할 때 관세 100%가 현실화하면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용인 계획 수정해 미국행 택하나
삼성전자가 쥔 카드도 있다. 텍사스주 테일러 유휴 부지의 활용이다. 삼성전자 테일러 팹 부지는 약 500만㎡(150만 평) 규모에 달한다. 이는 기존 오스틴 공장보다 4배 이상 넓은 면적으로 향후 반도체 팹을 최대 9개까지 추가로 건설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초 삼성전자는 이곳을 파운드리 중심 기지로 육성하려 했으나 미국의 메모리 제조 요구가 거세지며 필요에 따라 전략 수정도 가능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에 계획된 6기 팹 중 일부를 떼어내 테일러 유휴 부지로 돌리는 방안은 충분히 검토 가능한 시나리오”라며 “이미 부지가 확보된 데다 용수와 전력 인프라 지원이 확실한 테일러가 용인보다 리스크가 적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현재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은 전력 지산지소 문제, 지역 균형 발전 요구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지만 테일러시는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직결을 약속하며 삼성의 추가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미국 내 팹 건설은 단순한 생산 거점 이동을 넘어선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칩 워(Chip War) 시대에 반도체 공장은 안보 자산으로 분류된다. 삼성전자가 미국 본토에 최첨단 메모리 팹을 짓는다는 것은 미국의 안보 우산 속으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삼성이 테일러에 메모리 라인을 깔 경우 미국 빅테크 기업들과 협업이 한층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며 “용인 투자를 일부 희생하더라도 미국 내 공급망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실익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물량·기술 앞서도 삼성 관세 장벽 ‘비상’
경쟁사 마이크론의 광폭 행보도 삼성의 결단을 재촉할 수 있단 분석이다. 마이크론은 아이다호주와 뉴욕주에 대규모 메모리 팹을 건설하며 미국산 메모리 반도체 생산 체제를 굳히려 한다. 마이크론이 미국 내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생산해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에 관세 없이 공급하고 한국산 제품에는 100% 고율 관세가 붙는다면 경쟁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기도 하다.
기술 격차가 좁혀진 상황에서 고객사들은 관세 리스크가 없는 마이크론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나 구글 입장에서는 공급 안정성이 최우선”이라며 “관세 폭탄 우려가 있는 한국산보다 비싸더라도 안정적인 미국산 마이크론 제품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가 미국 내 생산 기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최대 시장인 미국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요를 경쟁사에 고스란히 뺏길 수밖에 없다.
결국 삼성전자는 이원화 전략을 택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용인 클러스터는 차세대 메모리 연구개발(R&D)과 레거시(구형) 제품 생산 기지로 유지하되 수익성이 높은 최선단 HBM과 AI 반도체 라인은 미국 테일러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공동화를 피할 수 없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송전망·민원에 발목 잡힌 韓 반도체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딴판으로 국내에서는 지역 균형 발전을 촉구하는 정치권과 각종 민원에 용인 반도체 산단 건설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이 이달 15일 용인 국가산업단지 계획 승인 취소 소송을 기각했음에도 일부 환경·시민단체는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며 집단행동을 예고했다. 핵심 인프라인 전력망 구축도 지역 이기주의와 지자체 인허가 지연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은 ‘전기를 먹는 하마’로 불릴 만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인데 국내는 이 기본 조건조차 충족시키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정치권과 정부가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반도체 생산 기지를 국내에 묶어둘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 안보 자산인 반도체 팹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까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송전탑 하나 짓기도 힘들어 몇 년을 허비하는데 미국은 보조금과 전력망, 세제 혜택을 패키지로 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며 “기업이 애국심만으로 국내에 남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이라도 규제를 대폭 걷어내고 용인 클러스터 가동 시기를 앞당길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남은 메모리 팹을 해외에 지어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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