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더미에서 발견되어 반쯤 부패된 작은 체구의 시체가 샴페인 색깔의 시트에 둘둘 말린 채 검시실로 실려 왔다. 두 장의 시트는 엇비슷한 폭으로 시체를 감고 있었다. 가장 안쪽의 세 번째 시트는 여자의 머리에 감겨져 있었는데, 아마도 야구 방망이같은 둔탁한 물체로 여러 차례 얻어 맞은 듯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이 끔찍한 시체는 잠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7.5cm 가량의 붉은 카페트 조각과 주황색과 분홍색이 섞인 천 조각에 쌓여 있었다. 천 조각들은 시트 안쪽에 있었는데, 수사관들은 이것들이 알래스카 숲속의 한 시냇가에 사체가 유기 되기 전 범죄 현장에서 시체를 싸는 과정에서 딸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했다.
죽은 여자의 신원은 34세의 주디 버진으로 밝혀졌다. 성인이 된 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시인이었던 버진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돈이 궁해지면 갑판 일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코디악이나 네덜란드 항구에서 출항하는 상선의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다.그런데 버진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대주는 남자 친구 칼 브라운이 있었는데, 버진은 친구들에게 브라운이 무섭다고 했다. 실종 직전 얼마동안 돈이 그녀 수중에 들어 왔다. 버진은 친구들에게 하와이로 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버진은 사라져 버렸고 넉 달이 지난 후 알레스카 숲 속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버진이 실종된 지 1주일 후 칼 브라운이 카페트와 자기방 침실의 카페트 패드 일부를 교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사관들이 새 카페트를 들추자 그 전에 깔려 있던 카페트 조각들이 발견됐는데, 시트 안에 있던 조각처럼 붉은색과 주황색, 분홍색이 묘하게 섞인 것이었다. 분명 확실한 단서가 될 만한 발견이었지만 똑같은 카페트가 이 지역의 다른 집에도 흔히 있을 수 있었다. 주(州)경찰관들은 발견된 카페트와 관련해 정확한 증거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것이 결국 버진 살인 사건을 포함, 두 살인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알래스카 주립 범죄 연구소는 시카고에 사는 현미경 조사 전문가인 56세의 스킵 팔레닉에게 이 사건을 의뢰했다. 팔레닉은 지난 20년간 수십 건의 굵직한 수사를 맡았었는데, 그가 맡았던 사건들 중에는 1995년 오클라호마시 폭파 사건, 콜로라도 볼더에서 발생한 여섯 살난 존베넷 램시 살인 사건, 유나바머 소포 폭탄 테러 사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암살 사건 등이 있다. 팔레닉은 미술품 모사본을 밝혀 내기도 하고 말이 많았던 2000년도 대선의 플로리다 투표용지 구멍 위조 사건을 부분적으로 조사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한 캐나다 석유 회사로부터 예멘에 있는 송유관 폭발이 테러범들의 소행인지를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팔레닉은 런던 경찰국과 왕립 캐나다 기마 경찰, 미 연방수사국등에 자문을 해 왔다. 팔레닉은 이 외에도 비행기 폭파 현장에서 나온 코코아 껍질 가루라든가 사진 뒷면에서 벗겨진 종이 섬유질, 경주견 도베르만의 털, 콜로라도에 있는 파이크 피크 산에서 발견된 특이한 모래처럼 실낱같은 증거물에 의존하던 사건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일조를 해왔다.
미국 내 200여 명의 정밀 수사 전문가들 중 한 명인 팔레닉은 지금까지 해 온 작업들을 통해 작은 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알아내는 ‘과학적 방법’을 선도해 왔다. 남들은 흔히 놓치고 못 본 것에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다. 다시 말해 그는 범인이 가장 두려워할 만한 인물인 것이다.
현미경 수사의 대부(大父)중 한 사람은 프랑스 리옹의 에드몽 로카르드였는데, 그는 1910년부터 옷이나 사체로부터 채취한 먼지의 흔적에 관해 최초로 체계적인 분석적 연구를 했다. 로카르드는 현재 교환 원리로 알려져 있는 현상을 공식화했다. 즉, 두 물질이 서로 접촉할 때 반드시 물질의 이동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팔레닉은 “로카르드는 산업 근로자 100명 중 96명의 직업을 귀지에 묻어 있는 먼지를 분석해 알아맞혔다”고 감탄했다. 과학적 의구심을 풀기 위해 로카르드와 연구원들은 본인들 몸에 직접 고통스런 실험을 해보기도 했는데, 한 번은 뜨거운 다리미로 지문을 지워 없앤 후 다시 원래대로 재생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고 한다(결국 지문은 재생되었다). 팔레닉은 로카르드에 대해 직접 연구하기로 했다. 그는 로카르드의 제자인 스위스 현미경 검사 전문가 막스 프레이 슐처와 연구를 한 후, 미 일리노이의 엘진에서 마이크로트레이스사를 운영하며 범죄 및 기타 분야에서의 교환 원리 발생 사례들을 분류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팔레닉의 연구 대상물들은 3만 배까지 확대되는 현미경으로 측정된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분석을 의뢰받은 물질을 모두 합치면 찻숫가락 2개면 모두 담을 정도로 적다 ”고 말한다.
범인들은 큼직한 증거물들의 경우, 옮기거나 태워서 또는 위에 카페트를 깔아 없앨 수 있지만 미세한 흔적들은 지우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단순한 사건이라도 팔레닉의 업무는 대부분 비교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희생자의 사체나 자동차 혹은 집에서 나온 물질을 용의자 주변에서 발견된 물질과 비교하거나, 용의자의 옷에서 채취한 입자들을 범죄 현장의 토양과 비교해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일들을 의뢰 받는다.
때론 용의자에게서 채취한 흙이나 먼지를 용의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장소에서 채취한 ‘알리바이 샘플’과 비교해 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한다. 팔레닉의 또다른 업무는 유추하는 작업. 한움큼의 먼지를 받은 다음, 어디서 온 것이지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그는 자주 받는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지만 팔레닉에겐 익숙한 일이다. 1974년 독일에서 3년간 미 육군 정보부에 근무한 후 그는 전설적인 시카고 현미경 연구소인 맥크론 어소시에이츠에 입사했다(맥크론은 성의에 있는 그림자가 예수의 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솜씨로 칠한 것임을 밝혀내 유명해진 인물. 지난 7월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팔레닉은 아침에 출근해 보면 현미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슬라이드가 올려진 채 샤프로 쓴 ‘U.F.O.’라고 씌여 있는 쪽지를 발견하곤 했다. 과제는 이 정체불명의 물질이 뭔지 알아내는 일이었는데, 땅거미의 배설물일지 플레이보이 토끼 인형 꼬리에서 떨어진 흰 아크릴 섬유일지 쉽사리 추정하기 어려웠다.
팔레닉은 범죄 현장에 거의 간 적이 없다. 대신 범죄현장의 증거물이 등기우편이나 등기, 인편 등으로 그에게 보내져 온다. 증거물이 직접 건네질 경우도 있다. 한 번은 어떤 남자에게서 직접 증거물을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이스라엘의 시카고 총영사였다. 팔레닉은 사건 수사 초기에 투입되고 싶어 하지만 그와 같은 전문가들은 대개 수사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거나 증거들이 온통 뒤섞여 버린 후에야 조사를 의뢰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는 “사람들은 다급해질 때까지는 제가 필요한지 조차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용의자의 유죄 여부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으려 하면서 오로지 현미경 밑에 놓인 물적 증거에 대해서만 견해를 밝히고, 자기 역할이 끝나면 굳이 사건의 결과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검사측의 의뢰를 받아 피고측에서 사용한 증거를 조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법현미경학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는데 최근에는 범인들을 감옥에 보내고 무고한 사람들을 석방시켜 주기도 했던 DNA 대조 기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도외시되고 있다. 그런데다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같은 TV 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법과학 수사 요원들이 경찰과 강도간 액션이 벌어지는 현장에 투입되자 팔레닉 같은 전문가의 역할은 더 위축되어 보였다. 팔레닉은 “만약 누가 그런 식으로 범죄 연구실을 운영하다가는 고소를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법의학의 반대자는 아니다. 팔레닉은 DNA 분석법을 중시해 15만 달러 짜리 적외선 분광기를 비롯한 첨단 장비를 사용하지만 작업에 효과만 있다면 5센트짜리 미량화학 시약 실험을 더 즐겨 사용한다. 그는 법과학이 증거포착에 사용되는 기술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사실, 경험이 풍부한 의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많은 동료들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실험을 하면서 그것이 결과가 다른 실험이어도 개의치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이곳은 사람들이 생각하며 일하는 실험실입니다. 이곳에서는 장비에 뭘 넣고 그냥 돌린다고 해서 결과가 나오진 않기 때문이죠”. 팔레닉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한 대가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숯 조각만 보고도 그 나무가 어떤 품종인지 알아낸다. 뉴욕 소재 존 재이 형법대학 교수인 피터 드 포레스트는 팔레닉이 다방면에 정통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 분야에 팔레닉처럼 폭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드물어요. 모든 게 그냥 형식적으로만 처리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팔레닉의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겁니다”.
주디 버진의 사체와 함께 발견된 섬유는 단면의 모양과 섬유의 굵기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이 섬유엔 모두 7가지 유형이 있었다. 크고 둥근 것과 작고 둥근 것, 여러 가지 모양의 세 잎 클로버처럼 생긴 것도 다섯 가지나 있었다. 합성 카페트 섬유들은 독특한 모양으로 조합해서 제작되기 때문에 상표처럼 또렷하게 특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팔레닉은 자기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질이 좋지 않은 카페트로, 전문 카페트 제조업체들이 폐기 처분한 쓰레기 섬유들을 저급 합성품으로 재가공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합성품은 특정 시기에 폐기처분된 섬유들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각 제품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다.
버진의 사체와 함께 발견된 카페트 섬유를 브라운의 집에서 가져온 것과 비교해 본 팔레닉은 섬유 내의 7가지 유형과 섬유 염색에 사용된 염료 배합뿐 아니라 두 섬유들의 특이한 측면들도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7가지 섬유 중에는 염색이 제대로 안 돼서 염료가 완전히 스며들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두 샘플 모두 염색이 불완전한 것은 물론 그 정도까지도 완전히 일치했다. 이 섬유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미세한 부위가 탈색으로 인해 염료가 스며들지 않은 것도 발견됐는데, 두 샘플 모두 이런 섬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州) 경찰청에서 이를 대조해 보았고, 칼 브라운을 직접 신문까지 해 보았다. 전 알래스카 주립 경찰관으로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댈러스 매시는 “이 카페트는 복제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고 팔레닉이 지적했다”며 “그의 분석 덕에 이 사건이 해결됐다”고 평가했다. 범인인 브라운은 1998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뒤 일부 문제가 있어 판결이 번복되었다가 지난 4월 재심선고를 받았다. 팔레닉은 다시 중요한 증인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으며 브라운에게는 1급 살인죄가 구형되었다. 법현미경학의 업무 분야는 범죄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팔레닉은 현재 웨스트 코스트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연쇄살인 미결 사건을 비롯,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유괴 사건의 세부 증거들에 대해 자문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뉴욕시의 한 화랑 소유주가 고대 청동상으로 보이는 물건을 수십만 달러에 팔려고 그에게 분석을 의뢰했는데, 덮개 안쪽에 끼어 있던 섬유 한 조각만을 조사해 보고도 팔레닉은 이 물건이 가짜임을 밝혀냈다(이 섬유는 20세기 섬유의 합성품으로 처리된 것이었다). 팔레닉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지만 그는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CNN의 <래리킹 라이브>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기가 맡았던 사건이나 관련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객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팔레닉의 검경(檢鏡)법은 다소 특이하다. 일리노이 대학 시절 담당 교수는 그가 물질에 시약을 발라 발생하는 화학반응을 토대로 어떤 물질인지 밝혀내는 19세기식 미량화학 기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한 전통적인 기법들은 X-선과 적외선, 자외선 빛을 이용한 분광법에 가려 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팔레닉은 새로운 기법들도 배웠지만 인기가 없는 전통적인 방법들도 배워 나갔다. 결국 그는 수업에 빠진 채 자신만의 기법에 매달렸다.
필자가 구두 뒷굽의 먼지를 떼어내는 끈끈한 푸른 색 발판에 올라서서 마이크로트레이스사의 실험실로 들어서자 지금까지 본 것들 중 가장 청결한 방들이 있었다. 지킬 박사의 실험실에나 있을 법한 질산 칼륨과 암모니아 바나듐산염, 클로로포름 병들이 누렇게 빛이 바랜 라벨과 해골 표시가 붙은 채 전면이 유리로 된 캐비닛 안에 놓여 있었다. 오스트리아 들개의 가죽(팔레닉의 사건들 중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 거래도 포함되어 있다)과 스쿨 버스에 치인 여자아이의 자전거, 1998년 9월 2일 노바 스코티아에서 충돌한 스위스 에어 플라이트 111기에서 나온 카페트 조각 등의 범행 증거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하지만 필자가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팔레닉의 수많은 현미경 도구 상자들이었다. 용융대 현미경은 섬유나 결정을 서서히 용융점까지 녹이면서 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낙사식 현미경은 물체로부터 나오는 빛을 위쪽에서 반사해 불투명한 물질의 표면을 그려낸다.
적외선 분광도계는 생물학 시간에 사용되는 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컴퓨터와 비슷한데 적외선 빛으로 원자들간의 결합을 여과시켜 물질의 화학구조를 도출해 낸 다음 그 결과를 그래프로 뽑아낸다. 비교 현미경은 두 물체를 나란히 놓고 관찰할 수 있어 순서대로 표본을 조사하는 데 효과적이다. “사람의 눈은 차이를 식별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기억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팔레닉은 강조한다. 편광 현미경은 결정성 구조가 독특하고 식별하기 쉬운 방식으로 빛을 조작하는 성향을 이용해 섬유와 결정을 식별해낸다. 증거들을 엮기 위해 팔레닉은 이 현미경에서 저 현미경으로 옮겨다니며 연결 고리를 구축해 나간다.
팔레닉은 자신이 사용하는 가장 정교한 도구들 중 하나인 주사전자 현미경을 보여 주었다. 이 현미경의 흑백 모니터를 보자 소행성 같은 게 보였다. “이건 모래 알갱이”라고 팔레닉이 말했다. 이 현미경은 모래 알갱이 표면에 전자빔을 반사해서 이를 800배로 확대해 3차원 입체 지도를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패인 곳과 갈라진 틈, 굴곡진 면이 잘 드러나 있다. 그 다음으로 팔레닉은 에너지 분산형 분광탐지기를 켜는데 이 탐지기는 전자들이 표본에 흡수됐다 방출될 때 나오는 X-선을 분석한다. 각 원소는 자체적으로 독특한 X-선을 방출한다.
이 표본은 산소와 실리콘이 2대 1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음을 분광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이 모래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을까? 모래 알갱이 표면의 틈새에 끼여 있던 부스러기는 소금 결정과 규조라는 해조류의 규소질 껍데기임이 밝혀졌다. 이를 통해 팔레닉은 이 모래 알갱이의 출처가 강변이나 사막이 아니라 물에 염분이 포함되어 있고 유기물이 많은 바닷가 해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팔레닉은 종종 사람들에게 묻은 먼지를 조사하기도 한다. 흙은 시간이 흘러도 훼손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가장 도움이 되는 증거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흙은 피처럼 부패하는 일이 없다”고 팔레닉은 말한다. 그는 1974년 한 주유소에서의 총격 사건과 관련해 처음으로 흙을 증거로 다루기 시작했다. 팔레닉은 총을 쏜 남자의 바지 무릎 부분에 묻어있던 고운 흙 때문에 그가 주유소에 있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만약 흙이 어떤 도로로부터 90cm 이내에서 묻은 것이면 팔레닉은 그 안에서 타이어의 고무 조각까지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 안에 꽃가루 알갱이들이 있으면 그는 해당 지역의 식물분포에 대한 열쇠를 얻게 된다. 토양 성분을 알아내는 일 외에도 팔레닉은 어떻게 쌓여 있는지도 분석한다. 용의자의 차 내부 카페트에서 나온 흙만으로는 그가 범죄 현장에 있었는지와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가 없다. 여러 곳에서 묻혀 온 흙들이 그곳에 뒤섞여 있어 출처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 틈새에 쌓인 흙은 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차가 돌아다닌 곳을 순서대로 기록하면 증거가 될 수 있다.
팔레닉은 한 여자사체의 신발 뒷굽에 끼어 있던 진흙덩이를 분석한 적이 있었다. 이 여자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 담배 농장에서 발견되었지만 그곳의 진흙은 죽은 여자의 신발 뒷굽의 진흙과 일치하지 않았다. 팔레닉은 신발 뒷굽에서 두터운 양모와 잘게 씹힌 가죽, 침과 밀짚을 발견했다. 그가 수사관들에게 이 여자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는 마굿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자 수사관들은 기뻐했다. 진흙 말고 다른 단서들을 근거로 이들이 독자적으로 수사를 벌인 결과 말 농장주가 용의선상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1년 12월에는 클리블랜드에 사는 한 운전자가 교통위반 딱지를 부당하게 끊기자 홧김에 벌금으로 낸 수표 메모란에 ‘저주받을...’이라는 욕을 썼다. 이 수표가 들어 있던 봉투에는 미량의 흰색 가루도 들어 있었다. 이 운전자는 탄저균이 든 것처럼 위장해 누군가에게 겁을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겁만 주려 했던 것일까?
쿠야호가 읍의 경찰은 이 사건을 팔레닉에게 의뢰했다. 그는 이 가루가 탄저균이 아님을 알아낼 수 있었다. 탄저균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탄저균의 기다란 포자를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는 조사를 계속했다. 팔레닉의 파일에는 최소한 1만개에 달하는 참고 샘플이 있는데, 그는 자연사 박물관 관장이나 제조업체 내부의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이를 모아 왔다.
그의 수집품들 중에는 드릴이나 톱, 큰 해머로 뚫고 자르거나 으깬 입자들이 포함된 금속과 합금, 인조 섬유, 사람의 머리카락, 여러 동물들의 털(그의 서랍들 중 하나엔 낙타의 털로 가득 차 있다), 광물, 모래, 나무, 꽃가루, 포자, 나뭇잎, 씨앗, 음식물(양념, 소금이나 설탕의 알갱이, 풀), 폴리머 제품들, 가짜 약품, 폭발물, 여러 산업현장의 노동자들 옷에서 채집한 직업 관련 먼지류 등이 있다.
팔레닉의 자료실에는 광학 결정학, 화산재, 자궁 세포학, 주름 강화 섬유, 모피와 관련된 책들이 즐비하다. 물론 팔레닉이 맥크론과 함께 완성한 6권 짜리 대작 <입자 지도(Particle Atlas)>도 꽂혀 있는데, 여기에는 비듬이나 자동차 브레이크 라이닝, 탄흔에서부터 푸딩 재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현미경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는 흙먼지를 통해 끔찍한 테러 행위를 밝혀낸 적도 있다.
1985년 한 인도 여객기가 캐나다 밴쿠버를 출발해 비행하던 도중 대서양 상공에서 폭파돼 30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었는데 같은 날 이른 시각 또 다른 인도 여객기에 실리기로 되어 있던 작은 짐이 동경 나리타 공항에서 폭발했다. 캐나다 수사관들은 동경에서 폭발한 폭발물 잔해를 가지고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관들은 먼저 폭탄에서 활성 물질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씻어냈다. 일단 이 물질의 성분과 구성비를 알아낸 후 주요 폭발물 제조업체의 제품들과 비교하면서 두세 개 제품으로 범위를 좁혔다. 하지만 수사가 더 이상 진척이 없자 그제서야 수사관들은 원래 샘플에서 쓸모 없어 보이던 부분들을 버린 데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팔레닉에게 연락을 했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알 수 없는 물질의 입자 2개 뿐이었다.
팔레닉은 이 물질이 니트로글리세린의 충격을 흡수해 저절로 폭발하지 않도록 해 주는 흡습재였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물질은 많지만, 팔레닉은 동경 폭발 사건의 폭탄 잔흔을 편광현미경으로 분석해 한번에 어떤 물질인지 알아내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팔레닉은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는 파스퇴르의 말을 좋아한다. 큰 몸집의 팔레닉은 현미경과 함께 있는 자신의 실험실을 마치 집처럼 편안하게 느낀다. 이곳에서는 희귀한 증거나 끔찍한 미스테리가 꼼꼼하지만 두뇌 회전이 빠른 그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물건이 스킵 팔레닉의 현미경 렌즈 밑에 들어올지 모르지만 일단 들어오면 그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낼 것이다.
필자인 고든 그리스는 <붉은 모래시계(The Red Hourglass)>의 저자로 그의 두 번째 책인 회고록을 다이얼 프레스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이다. 고든이 쓴 글은 ‘2002년 베스트 자연과학 저술집’에 실리게 된다.
완벽한 범죄란 없다
범죄의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증거를 없앨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증거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1성폭행 살인 사건
개요: 1991년 알래스카 글레날렌 근처에서 열한 살짜리 소녀가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었다. 수사관들은 소녀의 세탁한 옷에서 광택 페인트 조각과 미세한 금속 구(求)와 조각들, 그리고 붉은색과 푸른색 섬유들을 발견했다. 그 지역 주민인 찰스 스미스아트(사진은 그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가 살해 현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되었다. 이 사건은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수사관들에게는 그가 이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부족했다.
결과 이 금속 입자들을 주사전자 현미경의 에너지 분산형 X-선 분광 탐지기로 조사해 본 팔레닉은 둥그런 구는 철이고, 작은 조각들은 놋쇠임을 알아냈다. 쇳가루는 용접이나 그라인딩을 하는 경우처럼 몇 가지 경우에만 구 모양이 된다. 스미스아트는 가끔 이웃 아이들의 자전거를 고쳐주는 집 뒷마당에서 용접을 하곤 했다. 이 금속 증거물 외에도 살해된 소녀에게서 나온 섬유와 스미스아트의 자동차와 옷에서 나온 섬유가 거의 일치함으로써 1993년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항소했지만 2000년 12월 재심리가 열리기도 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2히틀러 제복 사건
개요: 몇 년 전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의 한 수집가가 경매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가 입었던 것이라는 라벨이 붙은 나치 제복을 최고가에 낙찰받았다. 하지만 진짜인지 의구심이 생긴 수집가는 팔레닉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결과 팔레닉은 두 종류의 섬유를 라벨에서 떼어냈다. 첫 번째 섬유를 편광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그는 이 섬유가 폴리에스테르(1)임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섬유는 면. 팔레닉이 이 면을 형광 현미경에 놓고 보자 섬유가 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바르는 광택제 처리가 되어 있었다(2). 폴리에스테르나 광택제는 2차 대전 이후에 개발된 것이었다. 수집가는 소송을 걸었지만 이 사건은 재판을 하기 직전 해결되었다.
3디마지오 사인복 사건
개요: 1997년 스포츠 에이전트인 제롬 로몰트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가 사인을 한 야구복 상의를 배편으로 두 차례 받기로 하고 돈을 지불했다.
조 디마지오가 보낸 첫 번째 선적분은 별 이상 없이 제대로 도착했지만 두 번째 선적되어 온 야구복 상의의 사인은 염료가 번져 거의 쓸모가 없었다. 보험회사가 배상을 꺼리자 로몰트는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결과 야구복을 정밀 조사한 후 팔레닉은 잉크와 섬유는 똑같지만 섬유유연제는 각각 다른 것이 사용됐음을 밝혀냈다.
첫 번째 선적분의 야구복은 실리콘 오일로 처리가 돼 잉크가 뭉쳐 있었지만(1) 조 디마지오의 사인이 번져버린 야구복들은 지방산 에스테르로 처리됐는데 공교롭게도 이 물질은 잉크를 녹이는 데 알맞은 용매였던 것이다(2). 팔레닉이 증언을 한 2001년 12월 재판에서 로몰트는 보험회사로부터 175만 달러를 받아냈다.
4마틴 루터킹 살해 사건
개요: 1976년 암살사건 조사를 하는 하원 상임위원회에서는 마틴 루터킹 주니어 살해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해부 사진(1)을 보면 킹의 앞쪽에 있던 난간에서 튀어 그의 몸에 박힌 것으로 추측되는 쇠조각들이 두피에서 발견된다. 범인인 제임스 얼 레이가 저격한 각도를 고려해 볼 때 그는 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저격범이 있었던 것일까?
결과 현미경 슬라이드를 편광현미경으로 조사를 하던 팔레닉은 이 금속 파편들에 난간을 설치하는 데 사용되는 절단기에 의한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파편들은 부드러운 것이 납과 흡사했지만 놋쇠는 아니었다. 팔레닉은 먼저 간단한 기술로 실험을 시작했다. 둘로 자른 조각 중 한 개를 용액에 녹인 다음 말려서 요오드화 칼륨을 첨가했다. 그 결과 노란 육각형 모양의 전형적인 요오드화 납이 생성되었다(2). 그런 다음 다른 반쪽을 화학 원소 분석을 하는 X-선 분광 탐지기로 검사했다. 이번에도 역시 납이었다. 킹의 두피에 박혀 있던 금속은 난간이 아니라 총알에서 나온 것이라고 팔레닉은 결론지었다. 또 다른 저격범은 없었던 것이다.
5스프레이 페인트 방울 사건
개요: 1960년대에 열여섯 살짜리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캘리포니아의 브루커 힐러리에게 10여 년 전 재심이 허용됐다. 증거가 됐던 타이어와 발자국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찾던 수사관들은 재조사해 본 결과 작은 축구공 모양의 페인트 방울을 발견했다. 이것은 힐러리의 자동차 시트 안감에서 떨어진 스프레이 페인트 방울(1) 같았다. 그는 이 페인트 방울을 묻힌 채 돌아다니다가 가는 곳마다 문질러 떨어뜨린 게 분명했지만 배심원들을 설득하려면 이 방울들의 출처가 같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결과 편광 현미경을 사용해 팔레닉과 그 지역 수사관들은 각 페인트 방울들이 면섬유를 둘러싸고 있음을 확인했다(2). 다음으로 전자 탐침 현미경 검사를 통해 이 물질이 티타늄과 납, 철의 합성물임이 밝혀졌다. 적외선 현미경분광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이 페인트의 주성분은 알키드 에나멜이었고, 적외선 스펙트럼을 통해 안료가 프러시안 블루임이 드러났다. 페인트 방울은 용의자와 희생자 중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든 똑같은 특징을 띠고 있었다. 힐러리는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6애틀란타 어린이 살해 사건
개요: 1979년과 1981년 사이 애틀란타에서는 2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 시체에서 올리브그린 색깔의 카페트 섬유가 발견되었다. 1981년 6월 23세의 웨인 윌리엄스가 이 살인사건들 중 두 건과 관련해 기소되었다(다른 열 건의 증거도 결국 그의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이와 유사한 섬유들이 그의 집과 자동차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피고측에서는 그런 섬유는 흔하다고 주장했다.
결과 단면도를 보면 이 섬유에는 세 개의 돌출부가 있다. 이런 종류의 섬유는 듀퐁사의 신제품으로 ‘흙이 잘 감춰지는 특성’이 있는 카페트용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세 개의 돌출부가 있어도 이 섬유들은 돌출부 두 곳은 크고 다른 한 곳은 작다(위). 조사 결과 이 섬유는 사우스캘리포니아의 한 소규모 폴리에스테르 제조업체인 웰멘사 제품으로 섬유 모양을 약간 변형해 듀퐁사의 특허를 교묘하게 피해 만든 것이었다. 웰멘사의 직원들은 이 카페트 제품이 조지아에서는 조금 밖에 안 팔렸다고 증언했다. 배심원단은 희생자들과 윌리엄이 우연의 일치로 이 섬유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판단했다. 윌리엄은 현재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과학’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
새로운 DB와 디지털 기술들로 인해 범죄 현장 조사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증거들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래리 스티븐스
곤충을 통해 정보수집
절지(節肢)동물들은 시체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곤충들로 법과학자들은 이들이 낳아 놓은 구더기를 소중한 단서로 이용한다. 시체가 부패하면 여러 가지 곤충들이 몰려든다. 항상 검정파리가 수분 내에 날아드는데 다른 곤충들은 기다렸다가 시체의 단백질이 발효될 때 덤벼든다. 시체 내의 곤충 종류와 성장 정도(알, 유충, 번데기, 성충)를 조사해 이 정보를 해당 지역의 기후 자료와 비교한 후 곤충학자들은 사망 시간을 추정한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캐나다의 법곤충학자들은 전국 규모의 곤충 수명 DB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들은 도살한 짐승의 사체를 들판에 내다 놓고 어떤 곤충이 제일 먼저 덤벼들어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는지와 어떤 식으로 영역 싸움을 하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어떤 종류의 결과를 남기게 되는지 조사하고 있다.
움직이는 화학 실험실
캘리포니아 소재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법과학 센터에서는 증거물을 화학 성분으로까지 분석해 1시간 내에 중요한 범죄 내용을 범죄 현장에서 바로 밝혀내는 휴대용 장치를 고안해 냈다. 30kg짜리 여행가방 만한 이 장비는 축소판 가스 색층분석-질량 분광기(GC-MS)로 지문 자국에 남아있는 호르몬을 분석해 범인의 연령대와 성별을 알아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금 알갱이 하나 보다도 작은 결정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코카인이나 헤로인 같은 약물 복용을 했는지까지 밝혀낸다. 이 장비는 손으로 쓰거나 컴퓨터로 작성된 편지를 분석해 어떤 종류의 잉크나 토너가 사용되었는지 밝혀내기도 한다.
샘플은 물질을 톡톡치거나 탐침을 허공에서 흔들어 채취한다.
그런 다음 이 샘플을 GC-MS의 가열실에 넣으면 증발하면서 옅은 안개처럼 되어 관을 통해 질량분석기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샘플은 전자빔과 부딪히면서 분자들이 분리되어 각 물질의 화학적 구성에 따라 고유한 이온들로 바뀐다. GC-MS는 이 결과를 10만 개가 넘는 화합물 DB와 대조해 샘플에 포함된 화합물을 밝혀낸다.
DNA 증폭검사
최근 들어 중합효소 연쇄반응(PCR)이라는 기법으로 인해 DNA 테스트의 정확도는 상당히 향상되었다. PCR은 특정 DNA 절편을 수백만 번 복제해 아무리 작고 훼손된 샘플이라도 보다 더 잘 조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화학적 과정이다.
PCR 분석을 하기 위해 연구원들은 범죄 현장에서 채집한 용의자의 혈액이나 몸에서 떨어진 물질(미량의 혈액, 머리카락, 침, 정액 등)로부터 DNA를 추출한다. 각 샘플로부터 13~16개 정도의 특정 DNA 절편을 선택해 이를 PCR로 증폭한다. 각 절편의 복제본은 초박형 시험관에 저장되어 컴퓨터화된 장비에 부착된다. 이 장비에서 양전하를 발생시키면 음전하를 띤 DNA들이 그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무거운 DNA일수록 느리게 이동한다.
컴퓨터는 각 DNA 절편의 크기를 계산한다. 한 사람에서 추출한 DNA 절편의 크기가 다른 사람의 것과 정확히 일치할 가능성은 100억분의 1도 안 된다. 특정 용의자의 DNA를 ‘NDIS’라는 전국 전과자 DNA의 DB와 대조해 볼 수도 있다.
흐려진 영상 재생
지난 3월 런던 빌딩 꼭대기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에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던 13세 살짜리 아만다 도울러의 유괴 장면이 포착됐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영국 경찰들은 의기양양해 했다. 하지만 테이프를 들여다보던 경찰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도울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햇빛 때문에 이미지가 희미해져버렸다. 2분 후 햇빛은 사라졌지만 도울러도 사라져버렸다.
이 2분간의 영상을 재현하기 위해 FBI 법과학자들은 최근 디지털 이미지 처리 기술을 사용해 훼손된 비디오 테이프를 복원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 먼저 픽셀(pixel)이라는 작은 점들을 각 점의 밝기를 나타내는 숫자로 변환했다. 그런 다음 소프트웨어를 이용, ‘노이즈(noise)’를 찾아내 이를 제거하거나 비디오 내 다른 부분들의 콘트라스트를 높여주면 희미한 부분을 되살릴 수 있다.
탄도학 데이터 베이스
2년 전 한 경비원이 휴스톤에서 살해됐는데 현장에서 40구경 스미스 웨손 탄창이 발견됐다. 같은 날 이른 시각 두 명의 점원들이 무장강도에 의해 살해됐고, 현장에서 40구경 스미스 웨손 탄창 3개가 수거됐다. 두 사건에 사용된 탄창에 나 있는 노리쇠 자국을 비교해 본 경찰은 이 탄창들이 같은 총에 사용된 거라고 확신했다. 경찰은 1993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수천 건의 범죄에 사용된 무기에 관한 정보가 수록된 전국 통합 탄도학 정보 네트워크(NIBIN)를 조회했다. 조회 결과 최근 사용된 탄창의 노리쇠 자국과 2000년 초 휴스톤에서 한 남자가 권총 강도를 당한 뒤 발견됐던 탄창의 자국이 일치했다. 경찰은 사건 당시 강도들이 희생자의 신용카드를 편의점에서 사용하려 했다는 사실도 이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알아냈다. NIBIN은 내년에 대부분의 경찰서에 보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