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e Around the World

범선이라기보다는 우주선처럼 생긴 요트팀 필립스호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캐터머랜형(동체가 두 개인 배) 요트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큰 축에 속한다. 이 필립스호는 영국 다트머스항의 잔잔한 앞바다를 가로질러 16노트의 속도로 가뿐히 나아간다. 범선으로서는 대단히 빠른 속도다. 이 정도면 전통을 자랑하는 아메리카컵 경주대회에서도 당당히 우승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아메리카컵 대회에는 이런 파격적인 모양의 요트는 참가할 수 없겠지만.

가장 주목할 점은, 아직 돛을 모두 올리지 않았는데도 무척 빨리 달린다는 것이다. 높이 40m, 폭 1.8m의 두 마스트는 가벼운 바람을 받으며 마치 항공기의 가느다란 수직 날개처럼 요트를 앞으로 밀어낸다. 길이 36m에 이르는 두 선체에 달린 칼날처럼 얇은 뱃머리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갈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남극해에서 돛을 활짝 펼친 채 12m 높이의 파도면을 따라 쌩쌩 달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4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팀 필립스호는 작년 12월 31일, 밤바람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세계 일주를 한 파격적인 모습을 지닌 요트들 가운데 하나다. 이 세계 일주는 스키를 타고 에베레스트산을 활강하는 것에 비유할 만큼 스릴 만점인 모험이다. 경기 규칙도 아주 간단하다.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과 돛을 조작하는 보조동력장치나 자동조종장치를 쓸 수 없다는 것 등이다. 반면 배의 크기나 승무원의 수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출발지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이며, 반환점은 남극이다. 여기서 다시 남극 대륙을 오른쪽에 두고 한 바퀴 돌아 당초 출발 지점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면 된다. 총 4만km를 항해하는데 드는 시간은 꼬박 65일 정도로 예상된다.

날씨와 바다의 상태는 먼저 무역풍으로 시작되었다가 적도 부근에 이르면 악명 높은‘무풍대’로 접어든다. 이때 즈음이면, 항해자들은 이를 한없이 참고 기다려야 한다. 남극해의 위도 40도대가 항해의 승부처다. 이 구역에서는 시속 80km가 넘는 강풍이 몰아쳐 파고가 평균 12m에 이르고 뉴질랜드 남부나 케이프 혼 같은 좁은 해역에서는 풍랑이 더욱 거세진다.

브루노 페이론 조직위원장이 ‘세기의 시합’이라고까지 칭한 이번 대회는 악천후가 기승을 부리는 망망대해에서 벌이는 대모험이라 할 수 있다. 최고의 속도를 추구하면서 요트 구조에 혁신을 몰고 올 세계일주 대모험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단 배에 타는 사람들은 육지로부터 1,600km 이상 떨어진 바다에서 살을 에이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 또 간신히 몸만 누일 수 있는 갑갑한 통 안에서 하루 네 시간씩만 눈을 붙여야 하며, 포효하는 바람이 뿌려대는 얼음 덩어리에 흠씬 두들겨 맞는 혹독한 상황에서 견뎌내야 한다. 낭만적인 유람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팀 필립스호를 이끄는 피트 고스 또한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남극해로 원정갔을 때의 추억을 들려준다. “맑은 날은 단 하루도 없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끔찍한 날들뿐이었다”. 1996년 방데 글로브 무기착 세계일주 레이스에서 악천후에도 불구, 프랑스 출신의 항해가인 라파엘 디넬리를 구출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영국 해병대 출신의 고스에게서는 대자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치밀한 사고력과 여유 만만한 기질과 행동에 대한 강박관념을 모두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대담한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영국 다트머스항으로 흘러드는 다트 강변의 토튼스 조선소에서 팀 필립스를 제작하던 고스는“일단은 출발선까지 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팀 필립스호는 대담무쌍하게 설계된 요트 중에서도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간 요트지만, 출발선에 서기까지는 아직 극복해야 할 설계상의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요트들은 모두 둘 이상의 선체를 가진 초대형급이다. 엔자호를 개조한 27.6m 길이의 팀 레가토호는 한때 74일의 세계일주 기록을 보유한 적이 있는 대형 요트다.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세 척의 요트는 모두 31.5m 길이의 거의 동일한 캐터머랜형으로 마스트 높이가 각각 44m에 이른다. 게다가 가벼운 무게, 복수의 선체에서 얻는 안정성, 몇 십평 넓이의 돛은 바람만 적당히 불어주면 65km에서 8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

남극해에서는 강풍을 수반한 ‘폭풍’으로 분류되는 저기압 세력이 기승을 부린다. 각 팀은 항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기상 전문가까지 영입했다. 이는 폭풍이 일어날 때 폭풍 맨 앞자락을 찾아낸다는 혁신적 발상인데, 이곳은 바람은 강하지만 파도는 많이 일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폭풍 앞 가장자리를 잘만 타면 요트는 65km가 넘는 속도를 여러 날 동안 유지할 수도 있다.

4.8m 길이의 캐터머랜 요트가 해안선을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큰 바다로 나가는 요트의 크기와 파도의 규모는 여기에 최소한 6배는 곱해야 실감이 날 법하다.

그러니 거기에 따르는 위험도 어마어마하다. 배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캐터머랜형은 플랫폼이 넓어서 한번 뒤집히면 바로 잡기도 쉽지 않다. 일전에 케이프 혼 부근을 질주하던 엔자호는 거대한 파도가 뱃머리를 강타하는 바람에 선원들이 순간적으로 9m 높이의 허공으로 솟구쳤던 적도 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 요트가 수면에 내려앉아 균형을 되찾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현재 팀 필립스는 속도 면에서 가장 앞서 있다. 두 개의 선체가 다가오는 파도를 관통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주효했다. 이 길고 가느다란 뱃머리는 파도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창으로 파도의 벽을 찌르는 것 같다. 고속 군용 초계정을 개발했던 애드리언 톰슨이 설계한 이 요트의 선체는 마찰력을 줄이면서도 물 속에 가라앉지 않도록 충분한 부력을 갖는다. 윈드서핑에서 영감을 얻은 삭구(索具)도 혁신적이다. 쇠줄의 지탱을 받지 않고 선체에 혼자 박혀 있는 마스트에 돛이 달려 있는데, 너무나 단순한 구조라서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조종석으로 연결된 두 개의 줄만으로 거뜬히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크기가 구조물에 압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선체, 마스트, 2개의 육중한 대들보는 탄소섬유로 이뤄져 있으며 이 역학 구조는 면밀한 계산을 거쳤다. 지금까지 항해에서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딱 두 번뿐이다. 한번은 별로 악천후가 아니었는데도 좌현 이물이 부서졌고, 또 한번은 지난 10월 중순 뉴욕으로 시운전을 떠났다가 출항 하루만에 한쪽 마스트의 기초가 말썽을 일으켜 항해를 중단해야 했다.

출항을 겨우 두 달 앞둔 시점이긴 했지만, 지난 10월 말 이곳을 찾았을 때, 선체의 균열은 용접상의 문제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좀더 심각한 설계 결함이 발견됐다. 가느다란 관처럼 생긴 선체는 항공기 제작에 쓰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파도로 인한 충격 효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선체를 다시 만들 때 칸막이 벽을 보강했지만 몇 달의 시간을 소비했다.

마스트의 이상은 설계상으로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대회를 불과 석 달 앞둔 시점에서 터졌기 때문에 사실은 더 큰 위기 상황이었다. 거대한 마스트의 회전을 가능케 하는 청동 소켓과 마스트의 기초를 떠받는 티타늄 볼이 꽁꽁 얼어붙어 마스트의 조작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피해는 비교적 가벼웠지만 귀중한 연습 시간을 다시 몇 주일 까먹었다. 팀 필립스호의 수리 현장을 찾았을 때 두 개의 마스트는 아직도 바닥에 놓여져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평으로 놓인 마스트를 보면 이 요트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기초부에서 마스트의 반대편 끝을 보면 너무나 큰 나머지 끝이 가물가물해서 잘 보이지가 않을 정도다. 마스트를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바람의 힘을 탄력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개의 선체를 연결하는 아치 모양의 빔 위에 마스트 하나를 세우는 일반적 구조와는 달리 각각의 선체에 별도의 마스트를 세운 것이다. 이런 방식을 택하면 마스트를 지탱하고 선체들을 연결하는 쇠줄이 필요없다. 두 선체를 연결하는 빔은 마음대로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고 마스트도 구부릴 수 있다.

마스트와 선체가 만나는 지점에는 가장 큰 하중이 실린다. 이 부분은 125톤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바람에 맞서 돛을 감싸고 있는 외줄을 풀면 전체 삭구가 순식간에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하중이 대폭 줄어들고 배의 속도는 느려지고, 돛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될 것이다. 고스는 “도끼가 안전 밸브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돛에 댄 뻣뻣한 널은 견고함을 더해주며 각 돛의 후면 모서리를 지탱하는 타원형의 활대는 돛을 내리거나 짧게 했을 때 수납하는 역할까지 한다. 군더더기를 최대한 없앤 삭구 덕분에 다른 경쟁 요트의 절반 수준인 6명의 승무원으로도 너끈히 항해할 수 있다. 승무원을 줄인 덕분에 경쟁자들에 비해 최소 4,500kg은 줄인 것이다.

기자는 거대한 팀 필립스호가 정박해 있는 다트머스항으로 다시 갔다. 아직은 마스트가 없기 때문에 요트에서 가장 높은 곳은 수면에서 5.4m 떠 있는 승무원들이 생활하는 누에고치 모양의 선실이다. 선체와 선체를 연결하는 가로대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주차장만한 크기의 선실은 안정성을 더해준다.

마스트를 다시 세우는 대로 고스는 출발점을 향해 풍랑이 거센 비스케 만과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수천 마일의 여정에 나설 것이다. 그곳에서 24시간 동안 928km를 주파한 대기록을 세운 플레이스테이션호를 비롯, 쟁쟁한 팀들과 한판 승부를 벌일 것이다.



클럽 메드 시승기
대부분 항해자가 꾸는 꿈은 똑같지 않을까? 그것은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다가 운 좋게 인어 아가씨를 만나는 것. 나에게도 모처럼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나는 33m 길이의 캐터머랜형 요트 클럽 메드가 정박중인 포르투갈에 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배를 모는 날이다.

클럽 메드를 보면 너무 커서 입이 벌어진다. 113평방미터의 주돛, 3.9m의 대거보드, 흘수선 위로 42m나 치솟은 탄소섬유 마스트. 배가 항구를 서서히 빠져 나오자 13명의 승무원이 닻 올릴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다. 다부진 근육질의 체구에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올해 42세 된 그랜트 돌턴 선장은 어느 모로 보나 이 일의 적임자다. “대거보드 내려.”주돛을 준비하던 승무원에게 소리친다. “계속 감아올려.” 돛을 올리는 권양기 앞에서 작업하는 두 승무원에게 고함을 지른다.

그들은 열심히 손잡이를 돌리고 4분 뒤 돛이 완전히 올라간다. 신기록이다. 선장은 “처음에는 여덟 명이 주돛을 올리는 데 20분이나 걸렸다”고 귀뜸한다. 갑자기 선장이 나에게 조종간을 넘긴다. 엉겹결에 돛을 활짝 올리고 질주하는 클럽 메드의 조타수가 된 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1.8m 아래의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잔잔하다. 12노트의 바람을 업고 신기록을 작성할 수는 없지만-이 배는 얼마 전 24시간 동안 1,000km를 주파했다-우리는 마치 스텔스 미사일처럼 다른 배들을 가볍게 따돌리고 나아간다. 30분 동안 조타수를 맡으면서 나는 속도를 19노트까지 끌어올렸다. 이 배의 최고 속도는 37노트. 범선을 타고 이 정도로 달리는 기분은 더없이 상쾌하다.

클럽 메드는 내가 예전에 카리브해에서 빌린 적이 있었던 13.5m 길이의 유람선처럼 경쾌하게 내달린다. 조종간은 더없이 민감하고 승선감은 비단처럼 부드럽다. 나는 우쭐해져 속도를 더 내려다가 문득 내가 쥐고 있는 티타튬 조종간의 가격이 내 자동차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돌턴에게 조종간을 넘겼다. 클럽 메드는 최고 속도를 두 번이나 경신했지만 뉴질랜드와 케이프 혼 사이의 18m가 넘는 파도는 아직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 빠르기에 중점을 두고 설계됐지만 열악한 조건에서는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한다. 바람만 제대로 불어주면 최대 24노트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스피드와 파워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 이상이 되면 속도를 줄여야지 안 그러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산산조각 난다. - 마이클 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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