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으로만 존재해온 물질 세계 최초 발견 ‘키메라’
그리스어로 반인반수(半人半獸)를 의미하는 ‘키메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자의 머리와 양의 몸, 뱀의 꼬리를 가진 괴물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두 종류 이상의 개체에서 만들어지고 두 가지 모순된 성질을 가진 물질을 ‘옥시모론’(Oxymor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옥시모론은 난폭하고 음산한 분위기의 키메라와는 달리 두 가지 물질의 장점만을 모은 물질을 일컬었다. 오랫동안 옥시모론은 이론으로만 존재해오면서 과학자들은 이 옥시모론을 기다려 왔다. 서울대의 유한일 교수는 아주 우연하게 이 옥시모론을 찾아냈다. 유 교수는 전형적 세라믹인 티타늄산화물(Ti3C)과 규소탄화물(SiC)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낸 ‘티타늄규소탄화물’(Ti2SciC2)이란 물질의 성질을 연구하던중 이 물질이 바로 ‘옥시모론’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금속과 세라믹의 장점만을 가진 그야말로 옥시모론이었던 것이다.
열전현상 응용·공학분야 획기적 전기 - Nature지 보도
유 교수는 열기전력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든 물질은 양끝에 서로 다르게 열을 가하면 내부에 기전력이 생기는데 전기를 가했을 때 물질이 뜨거워지는 것도 열기전력 때문이다. 그러나 초전도체에서는 열기전력이 없다. 전기저항이 ‘0’이 되기 때문이다. 열기전력은 물질이 초전도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유 교수는 티타늄규소산화물에서 열기전력이 0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다결정구조를 가진 세라믹 물질인 Ti2SciC2의 열기전력 측정 결과 실험 오차 실온인 섭씨 20°∼ 550° 범위내에서 온도차에 따른 전위차가 생기지 않는 현상, 즉 제백(Seebeck)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회로분야, 열전지 등 응용분야 넓어
유 교수는 “처음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뭔가 잘못됐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실험을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며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이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니 유 교수가 당황했던 것은 당연하다. 유 교수는 “전위차가 생기지 않는 현상은 확인된 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새로운 물질은 세라믹인데도 불구, 전기전도도가 전 온도 범위에 걸쳐 금속인 구리에 버금가며 열전도도 역시 금속만큼 높다. 게다가 파괴인성과 강도, 내열충격성 등 기계적 특성은 기존의 어떤 세라믹보다도 뛰어나다. 또한 내산화성이 탁월해 윤활유 없이도 선반가공과 드릴링 등 기계적 가공이 가능하다.
보통의 세라믹은 높은 온도에는 잘 견디지만 외부 충격을 받거나 뜨거운 상태에서 갑자기 차가워지면 쉽게 깨진다. 변형도 잘 되지 않는다. 반면 금속은 마모가 잘 되고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녹는다. 티타늄규소탄화물은 분명 세라믹이다. 그러나 전기나 열을 매우 잘 통하고 큰 온도변화에도 깨지지 않는다. 실험 결과 티타늄규소탄화물은 전기나 열전도성이 구리만큼이나 우수했다. 세라믹은 잘 깨져 가공하기가 어렵지만 이 물질은 쉽게 깨지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모양으로 가공이 가능하다.
이 같은 우수한 성질 때문에 티타늄규소화합물은 열에도 강하고 마모에도 잘 견뎌야 하는 항공모터나 많은 열을 빨리 뽑아내야 하는 정밀 전자회로, 반도체 리드선, 연료전지 커넥터 등의 소재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온 공학으로 관심분야 확대
유 교수는 새로운 세라믹 신소재의 발견으로 열전현상을 응용·제어하는 공학분야가 발전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또 재료의 열전현상을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열전특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재료공학적 기법을 찾는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연구성과는 재료공학계에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학술지
5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유한일 교수는 엄격한 유교집안에서 자랐다. 학업성적이 우수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마음먹고 모 명문고에 응시했으나 쓴잔을 마시기도 했다. 검정고시로 대학 입학 자격을 따낸 유 교수는 명문고 입시 낙방의 쓰라린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대 입학시험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 교수는 젊은 시절 어려웠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유 교수는 요즘 이온공학(Ionics)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온공학은 세라믹소재의 새로운 응용분야로 최근 각광 받고 있는 분야. 유 교수가 이온공학분야에서 또다른 옥시모론을를 발견할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