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전에 국회에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어 직무가 정지되는 헌정사상 미증유의 사건으로 인하여 총선 정국은 크게 요동하고 있다. 정가에 핵폭발에 비견할만한 충격을 던진 이번 사건 직후부터 수많은 국민들이 여론을 표출하며 행동에 나섰고, 이로 인하여 정치권에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기존의 정치지형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게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탄핵에 관하여 의회민주주의의 절차적, 실체적 정당성 여부 등에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번 사건이 특정 정파에 미칠지도 모르는 유·불리함을 떠나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보다 전진하고 성숙하는 계기가 되고, 또한 올바로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차기 국회가 진정한 민의의 전당으로서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시대착오적인 인식
그렇다면 과학기술인들은 이번 총선 정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또한 무엇을 준비해야할 것인가? 지금까지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인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거나, 심지어 일부러 멀리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해 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격으로, 상당수의 과학기술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고고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위치지워 온 왜곡된 의식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계 혹은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 불호에 관계없이, 연구개발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 정책 등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중대사는 정치적인 프로세스를 거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인식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고까지 할 것이다. 과학기술인 역시 민주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올바른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하고, 또한 과학기술계의 이해를 잘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서라도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과학기술 분야만큼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빠른 곳이 없으므로 과학기술인들이 연구개발의 현장에서 멀어지는 순간 경쟁력을 상실하고 도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과학기술인들은 항상 연구개발 현장을 지키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요되어 오기도 하였다.
연구현장 등지는 과기인
물론 대다수의 과학기술인들이 현장을 박차고 나가 정치인으로 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인들을 오랫동안 짓눌러온 누적된 모순 등이 최근에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고 수많은 유능한 과학기술인들 마저 연구개발 현장을 등지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는 도리어 연구개발의 경험을 갖추고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과학기술인들이 정치인, 행정가, 언론인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보다 많이 진출하는 일이, 동료 과학기술인들이 연구개발의 현장에서 마음놓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고 과학기술을 포함한 국가 발전에도 기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각 정당을 포함한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면, 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16대 국회를 포함하여 지금껏 역대 국회에서 연구개발을 경험하고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국회의원은 극히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회의원들의 과학기술 전반에 관한 식견이 대단히 부족하였다.
지금과 같이 과학기술계 전반의 위기상황이 심각해진 데에는,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한 행정 당국 뿐만 아니라 제 구실을 다 하지 못한 국회 역시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고 민생 보장 등에 주력할 수 있는, 각 분야에서 보다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물들보다는, 당리당략만을 앞세우고 정파적 싸움에만 능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의 대다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번 대통령 탄핵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국회의 직업군 불균형 현상
최근 과학기술인들에 대한 비례대표 의원 일정 비율 보장 등, 보다 많은 과학기술인들의 국회 입성을 위한 대책을 각 당에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진 바 있다.
그러나 각 당의 공천을 받은 지역구 입후보자들 중에서 과학기술인 출신은 여전히 손꼽을 정도로 적고, 직업 정치인들이나 법조계 출신 등 특정 직군의 인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그 이유가 기성의 정치 기득권층에 의하여 진입장벽이 높게 세워진 탓이라면, 비례대표라도 그 취지에 맞게 상당수의 과학기술인들이 당선 안정권에 배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할 듯하다. 500만 과학기술인을 포함하여 전 국민의 상당수가 이공계와 관련이 있는 직종에 종사할 것이며, 넓은 의미로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다녔던 사람들도 이공계라고 본다면 전 국민의 반 가까이가 된다.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가, 언제까지 이토록 턱없는 불균형을 보이면서 특정 직업군 쪽으로만 치우칠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또한 각 정당들은 과학기술인 국회의원을 그저 구색 맞추기용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현장의 과학기술인 들을 대변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과 식견을 갖춘 인사들을 대거 추천해도 모자란 판에, 그저 생색내기 좋도록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특정 인사 등이 그간 영입대상 명단에 오르내린 것을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국회의원의 과학기술 관심도
과학기술인들이 보다 많이 국회에 진출하는 일 뿐만 아니라, 다른 국회의원들 역시 과학기술에 관한 식견과 올바른 정책적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 검증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과학기술에 관련된 국회 상임위가 과학기술정통위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자원위, 건설교통위, 환경노동위, 국방위, 보건복지위, 농림해양수산위 등 도리어 대다수의 상임위가 과학기술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법사위, 재경위 등 이른바 ‘힘있는’ 상임위에서 의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역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과학기술인들은 단순한 직능적인 이해관계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민생 안정,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는 차원에서 어느후보들이 이에 잘 부응하는지 제대로 검증하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