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길대(몬트리올 소재) 임상심리학과의 알랭 브루네 교수는 여느 때라면 환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다만 최근 연구를 위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겪고 있는 환자들을 상대로 각자 정서적으로 큰 상처가 됐던 사건들을 다시 떠올리는 고역을 감내케 하고 있다.
PTSD의 원인이 되는 사건은 경우에 따라 강간이 될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의 외상일 수도 있다.
환자가 극도의 흥분 양상(울거나 몸을 떨거나 혈압이 상승하는 등의 징후)을 보이는 순간 브루네 교수는 개발된 지 25년 된 고혈압 치료제, 프로프라놀롤(propranolol)을 복용케 한다.
하지만 이는 혈압 수치를 저하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브루네 교수의 목적은 훨씬 더 심오한 데에 있다. 바로 나쁜 기억의 외상을 제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연구 결과 프로프라놀롤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차단해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스트레스 호르몬이란 외상을 유발하는 “투쟁 혹은 도주” 상황에 처할 경우 체내에서 분비되는 물질이다. 이 호르몬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즉 인체의 감각을 첨예화시킴으로써 생명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상의 원인이 되는 광경이나 소리, 냄새를 머릿속에 영구적으로 각인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 결과 머리 속에는 나쁜 기억이 영원히 저장될 수 있는 생화학 창고가 생성되게 된다.
현재 미국에는 PTSD환자가 190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들의 경우 외상의 원이되는 사건을 떠올리기만 해도 사건 당시와 동일한 수준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프로프라놀롤의 효능은 이미 하버드대 신경정신과 로저 피트먼 교수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서 입증된 바 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외상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겪은 직후 곧바로 프로프라놀롤을 복용한 환자의 경우 문제의 경험을 회상하더라도 현격히 완화된 감정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현재 피트먼 교수와 브루네 교수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한층 더 진일보시켜 문제의 경험이 발생한 지 수 년이 지난 시점에도 나쁜 기억을 제거해내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작용원리
1 외상이 편도체를 자극해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그 결과 뇌에서의 기억 형성과정이 증진된다. 2 외상 관련 기억은 우선 해마에 저장된다. 그런 다음 화학반응에 의해 대뇌피질의 뉴런에 암호화된다. 이렇게 해서 문제의 기억이 장기 저장소에 자리 잡게 된다.
3 외상을 떠올리는 순간 그 기억이 해마로 다시 옮겨와 더 많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도록 자극할 수 있다.
4 프로프라놀롤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차단해주는 한편 외상에 대한 지각 수위를 완화시켜준다. 이렇게 해서 새로 편집된 기억이 뇌에 재저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