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청정분석 기술 '피코랩' 구축
대기가스 등 환경정보 분석기법 세계 수준으로 … 기후변화 검증·운석의 지구 유입량 산출 성공도
“지금은 외국에서 건네준 빙하 시료를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지만 조만간 국내 기술로 얻은 시료를 통해 세계적 연구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007년 2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은 국내 과학계에서 불모지로 여겨졌던 빙하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어 관련 연구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홍성민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박사에게 돌아갔다.
그는 아직까지 국내 자체 기술이 확보되지 않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해외 선진국이 채취한 빙하 시료에 의존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빙하분석 기법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 박사는 “빙하는 과거 수십만 년 동안 기후변화를 비롯해 온실가스·에어로졸 등 대기 성분의 변화를 반영하는 다양한 환경정보들을 품고 있어 ‘냉동 타임캡슐’이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빙하는 눈이 다져져서 녹지 않고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때문에 대기 구성물질을 다 간직하고 있다. 또한 빙하 속에는 작은 기포들이 있다. 눈과 눈 사이를 차지하고 있던 공기다.
이 기포를 분석하면 수 십 만 년 전 지구 온실가스 상태를 알 수 있다. 과거 대기가스까지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바로 빙하인 것이다.
문제는 빙하에 쌓여 있는 다양한 무기 염소들이 ppb(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농도 단위)의 100만분의 1에 이를 만큼 초극미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는 “빙하 코어에 달라붙은 오염물질을 제거, 신뢰성 있는 분석결과를 확보할 수 있는 고도의 청정 분석기술 확보는 해외 선진국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도전적 과제”라고 설명했다.
홍 박사는 지난 수년간의 연구 경험을 통해 전 세계 3~4개국만이 확보하고 있는 청정 분석기술인 ‘피코랩(pico-lab)’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초극미량 원소를 분석하려면 오염물질을 제어할 수 있는 청정실험 환경을 구축하고 모든 실험용기의 청정도를 검증, 분석의 재현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며 “피코랩은 이렇게 완성된 청정실험 기법으로 운영되는 실험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체 구축한 피코랩에서 선진국과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남극 보스톡 빙하에서 세계 최초로 지난 42만년 동안 빙하기-간빙기로 이어지는 장주기 기후변화를 검증하는 코발트·비소 등의 미량금속들을 분석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탈리아·프랑스 연구팀과 공동으로 북극 빙하를 가지고 운석에서 배출되는 백금(Pt)과 이리듐(Ir)을 분석, 매년 지구로 유입되는 운석의 연간 유입량을 산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 2004년 12월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됐다.
홍 박사는 “땅속 수천m 밑에서 빙하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남극 대륙으로 연구기지가 들어가야 한다”며 “2011년 대륙기지가 완성되고(세종기지는 대륙 바깥에 위치) 건조중인 쇄빙선이 투입되면 우리도 남극의 중심에서 빙하 연구는 물론 운석탐사·우주과학연구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조만간 외국에서 빌린 빙하가 아닌 국내 기술로 뽑아낸 빙하 시료를 가지고 당당하게 선진국과 같은 독점적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INTERVIEW
“남극생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
겨울 영하 50도·여름엔 백야현상… 인간 한계 시험
“1년 동안 배를 타고 망망대해에서 생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극에서의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2004년 12월부터 2006년 1월까지 13개월간 남극 월동(越冬)연구대장으로 남극생활의 특혜(?)를 누렸던 홍성민 박사는 남극생활을 고립된 환경 속에서 계속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문명세계와 고립된 곳에서 하루 24시간 16명의 대원이 기지 안에서만 생활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군대생활보다 훨씬 힘들더군요.” 홍 박사의 말처럼 5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남극의 겨울은 최대 영하 50도 밑으로 떨어지고, 낮에도 어두컴컴하기만 하다. 반대로 여름이면 밤이 돼도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이어진다.
극과 극을 오가는 이 같은 가혹한 환경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하다. 이 때문에 월동대원은 세종기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 인원으로 꾸려진다.
당시 그를 포함, 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 건강을 돌보는 공중보건의, 전기 담당자, 배관설비 담당자 등 16명의 대원들이 1년여 동안 함께 생활했다.
그는 “대원들 상당수는 남극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월동대원에 지원한 이들”이라며 “요리사, 공중보건의의 경우 평균 경쟁률이 8대 1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근무시간은 한국의 일반직장인과 같은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대원들은 세종기지 내 연구 장비를 통해 남극의 빙하 밑에 고이 간직된 지구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겨 나가는 연구 활동을 한다.
홍 박사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대부분의 대원들이 기지 내 마련된 운동시설에서 체력을 단련하며 밀폐된 공간 속에서 자칫 무력해질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다진다”고 말했다.
이재철 서울경제 기자 hummi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