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1월 미국과 일본이 벌였던 타라와 전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적전 상륙작전의 효용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처절한 살육전이었다.
이 전투는 미 해병대가 20년 전부터 가다듬어 온 적전 상륙작전 교리의 타당성을 입증했지만 3일 동안 1,001명이 사망하고 2,101명이 부상당하는 등 피투성이의 혈전이 됐다.
요즘처럼 날씨가 으슬으슬 추워질 때면 뜨거운 열대지방에서 벌어졌던 전쟁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물론 전쟁이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타라와 전투는 이 같은 범주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무대는 태평양상 적도 인근의 길버트 제도, 그 중에서도 타라와 환초 내에 있는 베시오 섬이다.
현재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인 이 섬은 길이 3km에 폭은 890m에 불과하다.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국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관광이나 어업, 농업을 제외하면 마땅한 산업이나 자원이 없어 경제의 상당부분을 선진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빈곤한 나라다.
따라서 좀처럼 국제사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려운 곳이지만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인 1943년 11월에는 이 작고 평화로운 섬이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격전지 중의 하나였다.
일본과의 결전을 예상한 미국
그 작은 섬에서 왜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을까. 해답을 얻으려면 다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세기 초반부터 이미 가시화된 미·일간의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20세기 초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모두 승리, 그동안 아시아의 맹주로 여겨지던 중국과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써 장차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할 능력을 내비쳤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1920년대부터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설정했다. 즉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해군을 신속히 일본 본토로 진격시켜 일본 해군과 함대 결전을 벌여 승리하고, 일본 본토를 해상 봉쇄한다는 요지의 작전계획 ‘오렌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항공기의 성능은 큰 발전을 이룩했다. 따라서 일본이 태평양상 도서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미국 함대를 폭격한다면 오렌지 계획은 큰 차질을 빚을 것이 분명했다.
이에 따라 미 해병대는 태평양상 도서지역에 대한 방어 및 공격에 필요한 전술교리와 장비, 훈련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 중 공격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 이전까지 실제 작전사례는 물론 체계화된 교리도 변변히 없던, 대단히 위험한 작전인 ‘적전 상륙작전’이었다.
미국의 예상대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패전국 독일에게서 빼앗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샬 제도를 미국과의 결전에 대비해 요새화했다.
또한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는 영국령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환초도 공격해 일본 영토로 선포했다. 특히 타라와 환초에 속한 베시오 섬에는 비행장까지 건설했다.
미국은 1943년 가을까지 남태평양 지역을 평정한데 이어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점령 도서지역을 차례차례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폭격이 가능한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본토까지 지상군을 진격시킨다는 방침이었다.
이 같은 시나리오를 갖고 있던 미국에게 타라와 전투로 시작되는 길버트 제도 전투는 중부 태평양 전선의 시작이자 지난 20년간 가다듬어온 해병대의 적전 상륙작전 교리의 타당성을 시험할 시금석이었다.
요새화된 타라와 환초
하지만 일본이 ‘대일본제국’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이 타라와 환초를 부실하게 방어하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타라와 환초의 베시오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일본군 내에서도 최정예로 평가받고 있던 시바자키 케이지 소장 휘하의 해군 특별육전대(해병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군 조직) 병력 3,600여명이었다.
이외에 해군 제111설영대 소속 한국인 군속 1,200여명이 있어 미군이 상륙할 당시 일본군 수비 병력은 총 4,800여명이었다.
베시오 섬의 일본군은 콘크리트제와 목제 해안 장애물, 대전차호, 지뢰원, 각종 벙커와 토치카 등을 건설해 섬을 완전히 요새화했다.
특히 강화콘크리트, 야자나무, 충격흡수용 모래를 조합해 만든 벙커는 900kg급 항공폭탄의 직격탄을 맞고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했다.
길이 3Km, 폭 890m의 베시오 섬에 벙커와 토치카가 500개나 있었고 해안포도 14문이나 됐다. 여기에 대공포 12문, 대공기관총 31정, 야포 25문, 해안방어 기관총 31정, 전차 14대가 있었다.
시바자키 소장은 섬의 이 같은 방어태세에 만족한 나머지 “100만명의 적이 100년 동안 공격해야 점령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베시오 섬은 1m만 땅을 파도 곧장 물이 나오는 산호섬이었기 때문에 이런 설비는 대체로 지상에 건설됐다.
항공정찰을 통해 베시오 섬의 일본군 병력과 방어설비 규모를 파악한 미군은 당시 단일작전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함대(항공모함 17척, 전함과 순양함 각 12척, 구축함 66척, 수송함 36척)를 투입했다.
또한 ‘울부짖는 미치광이’로 불리던 홀랜드 스미스 해병 소장이 이끄는 상륙부대(해병대 제2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육군 제27보병사단의 일부 병력을 합쳐 총 3만5,000명)를 동원했다.
이 작은 섬에 이 정도의 함대와 병력을 투입할 만큼 이 작전의 중요성과 예상 난이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미군의 엄청난 손실
미군이 작전 개시일로 정한 1943년 11월 20일. 해군 함포와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아침부터 2시간 반 동안 베시오 섬을 두들겨 댄 후 오전 9시부터 베시오 섬 북부 레드 비치에 해병대의 제2, 제8연대 상륙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타라와 전투 이후 44년이 지나 물리학자 도널드 올슨이 밝힌 바에 따르면 작전 개시일로 정한 11월 20일은 달의 인력이 극히 약해져서 평소에는 수m에 달하던 조수간만의 차가 수cm 단위로 급격히 줄어드는 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3년 당시에는 그 사실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상륙전에 이뤄진 사전정찰도 불충분했기 때문에 해병대를 태운 상륙주정들은 목표 해안을 450m나 남겨놓은 채 수심 90cm 밑의 산호초에 걸려 좌초해 버리고 말았다.
계획대로였다면 수심이 최소한 150cm가 돼서 상륙주정의 운항에 지장이 없었어야 할 시각이었다.
튼튼한 방어설비 덕택에 상륙 전 준비포격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베시오 섬의 일본군은 좌초된 미 해병대의 상륙주정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물론 미 해병대는 상륙주정에서 곧장 뛰어내려 가슴팍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헤치며 진격해야 했다.
상륙주정과는 달리 해병대의 수륙양용장갑차(LVT)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기관총탄도 제대로 못 막는 빈약한 장갑 때문에 상당수가 격파 당했다.
머리 위에는 일본군의 기관총탄이 날아다니고, 발을 까딱 잘못 디뎠다가는 산호초 구덩이에 빠져 익사할 수 있는 그 위험한 상황에서 미 해병대는 진격을 계속, 상륙 3시간 만에 해안을 점령했다.
하지만 미군의 인명피해는 막심했다. 해안을 점령하기까지 300여명이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해안을 점령한 이후 해병대는 일본군의 1차 방어선까지 진격해 교전을 벌이고, 이들이 점령한 해안을 통해 후속부대와 보급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군은 섬 곳곳에 설치한 방어거점을 이용해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토치카와 벙커를 하나하나 화염방사기와 폭발물로 제거해 가며 진격했다.
다음날인 21일. 레드 비치에 상륙한 해병대 후속부대는 전차를 앞세워 베시오 비행장을 공격하면서 일본군을 분단시키고, 오후 4시 55분부터는 베시오 섬 서측의 그린 비치로부터 미 해병대 제6연대의 상륙이 시작됐다.
21일 날이 저물 때까지 섬의 서측 전체가 미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다. 일본군 지휘관 시바자키 소장은 이 날 오후 2시 미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인 22일 오전. 아직도 그린 비치에서는 상륙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어제 그린 비치로 상륙한 해병대 제6연대와 레드 비치로 상륙한 해병대 제2연대가 상봉했다. 또한 22일까지 미군은 베시오 비행장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서 일본군 주력은 베시오 비행장 동쪽으로 완전히 밀려났으며, 그렇지 않은 일본군들은 미군의 공격 루트에 포위돼 자살적인 저항을 벌이다가 전멸해 갔다.
당시 일본 해군은 상륙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잠수함 부대도 파견했지만 미 구축함들의 대잠 초계망을 뚫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일본 해군의 주력부대는 11월 1일 부게인빌에 상륙한 미 해병대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지원은 해 줄 수가 없었다.
섬 동쪽 끝으로 밀려난 잔여 일본군들은 22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인 23일까지 미군에 대해 산발적인 공격을 여러 차례 감행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미군의 압도적인 반격에 휘말려 궤멸했다.
23일 오후 1시까지 미 해병대는 베시오 섬 전역의 일본군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다음날인 24일 정오에 성조기와 유니언 잭을 게양했다. 원래 하루면 족할 것이라고 생각됐던 작전이 만 3일이 넘게 걸린 셈이다.
베시오 섬을 빼앗긴 일본군은 27일 역(逆) 상륙작전으로 미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탈환할 계획도 세웠지만 도저히 승산이 서지 않아 반격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고 유야무야됐다.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거의 전원이 전사하고, 일본군 17명과 한국인 군속 129명만이 살아남아 미군의 포로가 됐다.
미군의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3일 동안 1,001명이 전사, 2,101명이 부상당했다.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8개월 동안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의 지상군 전사자가 1,768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피해였다.
미 해군은 이 전투에서 발휘된 미군의 용맹을 기념하고자 1946년에 취역한 항공모함과 1976년에 취역한 강습상륙함에 타라와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섬 전투에 참전했던 많은 미군들에게 타라와 환초는 ‘피투성이의 타라와(Bloody Tarawa)’라는 끔찍한 별명으로 남아있다.
타라와 전투의 여파
타라와 전투는 앞서도 밝혔듯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공들여 수립한 적전 상륙작전 교리의 우수성 및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투였다.
베시오 섬의 레드 비치에서 미 해병대 선발대는 눈앞에 닥친 일본군의 맹공격과 수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450m나 되는 거리를 반쯤 헤엄치다시피 해서 전진했다.
해안 교두보를 확보해 후속부대의 상륙을 돕고 전투의 성공에 공헌한 것은 분명 우수한 상륙작전 교리에 입각한 평시의 철저하고 혹독한 훈련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엄청난 인명피해 때문에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 염전주의가 들끓은 것은 분명 문제였다. 일본은 이 같은 미국 내의 여론을 십분 이용, 전쟁을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하고자 패전의 그 날까지 노력한다.
또한 충분한 사전준비 작업이 없었고 현지의 자연조건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 첫날 레드 비치 상륙 과정에서 익사자를 포함한 수많은 전사자를 발생시켰다.
더욱이 상륙 전 준비포격도 그 양과 질이 충분하지 못해 일본군 방어진지를 충분히 무력화시키지 못하는 등 상륙작전 운영상의 문제점도 드러났다.
이 전투 이후 미 해군은 유명한 수중파괴대 UDT를 창설, 상륙 전 목표 지역의 자연 및 인공장애물을 정찰하고 필요시에는 이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기게 된다.
그 외에도 수륙양용장갑차의 장갑과 무장을 강화하고, 일본군 방어진지를 상륙전에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술과 장비를 강구하게 된다.
특히 상륙해안의 자연조건에 대한 충분한 자료 확보 등 아군의 피해가 적은 상륙작전을 벌이기 위한 다각적인 조치가 취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전투에서 벌어진 엄청난 인명손실에 경악한 미군 지휘부 일각에서는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생화학 무기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도 한다.
타라와 전투는 ‘타라와의 해병들과 함께(With the Marines at Tarawa)’,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 등의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졌다.
이 전투에서는 일본군 설영대 소속의 한국인도 1,000여명이나 전사했다.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세계대전의 와중에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총알받이로 머나먼 남국의 섬에 끌려가 최후를 맞았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계절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글_이동훈 칼럼리스트 enite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