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된 곤충은 무려 150만종. 동물 중 가장 많은 종수와 개체수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종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는 그만큼 곤충을 활용한 연구개발 및 산업화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인데, 실제 최근 들어 곤충의 특성과 습성을 최첨단 산업과 접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부에서는 곤충산업을 21세기를 이끌 대표적 분야로 꼽고 있다. 한마디로 곤충이 인간 문명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해 주는 셈이다.
곤충의 습성, 생활에 적용
유명 건축가 믹 피어스는 1990년대 고객으로부터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 에어컨 시설이 없는 쇼핑센터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피어스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 에어컨이 없는 건물을 만들라니….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는 우연히 무더운 지역에 사는 흰개미를 주목했다. 평소 곤충에 관심이 많았던 피어스는 흰개미들이 개미탑 상부의 통풍 공(空)을 열고 닫음으로서 내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피어스는 흰개미들이 탑을 만드는 방법에 착안해 에어컨 없이도 내부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이야기는 프란스 요한슨이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메디치 효과(The Medici Effect)’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바로 인간이 곤충의 특징이나 습성을 잘 이용하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곤충과 동물의 습성을 활용, 생활에 적용해 왔다. 특히 곤충이나 동물의 특징을 생활에 활용하는 사례는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912년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룬 1997년 작 타이타닉에는 쥐를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이 슬쩍 나온다. 이 영화에서 타이타닉과 빙하의 충돌이 있기 전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쥐였다.
‘호화 유람선 안에 웬 쥐’라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당시 뱃사람들은 일부러 배 안에 쥐를 실어서 탔다. 쥐들의 뛰어난 청각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집단으로 대피하면 필시 큰 위험이 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지난 1995년 일본의 고베를 강타한 대지진 때도 각종 연구소에 있던 실험용 쥐들이 지진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난리법석을 피웠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21세기의 산업 주역
이미 곤충은 21세기 산업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곤충은 친환경적인 농산물 생산이나 생물학적 방제산업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 곤충산업은 빠르게 일반화되고 있다.
잠자리 농법은 그 실례다. ‘잠자리 많은 해엔 풍년 든다’는 속담대로 잠자리는 모기를 비롯한 해충을 잡아먹는 대표적인 익충으로 꼽힌다. 대규모의 잠자리 생태원을 만들어 인공 부화시킨 다음 매년 수십만 마리를 방사, 무(無) 농약 환경농업을 이룬다는 계획이 국내서 이미 실현 단계에 와 있다.
천적을 활용한 방제산업도 주목되는 분야다. 소나무 재선충병을 예로 들어보자. 예전 같으면 소나무 재선충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산에 불을 내 병든 소나무를 태우는 방법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다른 생물과 산림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이 때 천적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는 환경오염도 막고 전염병도 막는 최적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최근 곤충학자와 생물학자들은 소나무 재선충의 매개충인 솔수염 하늘소에 기생하는 벌을 이용해서 방제를 하는 생물학적 방제기술을 연구 중에 있다.
진딧물을 죽이는 무당벌레와 진디흑파리 등을 길러 곤충농법이 크게 발전한 네덜란드 등에 수출하는 기업도 이미 국내에서 나왔다.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기 마련인 만큼 천적 곤충의 상용화는 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벤트 산업에서도 곤충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수년전부터 나비를 상품화한 나비축제로 매년 수 십 억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생겨났다.
나비축제뿐만 아니라 반딧불 축제, 풀벌레 음악회 등 곤충을 활용한 각종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곤충을 이용한 과학 발전
그렇다면 오늘날 곤충을 이용한 과학의 발전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이제는 곤충산업이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등 최첨단 산업과 접목되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곤충의 기능과 습성이 그동안 인간이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곤충산업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 과학자들은 곤충과학을 로봇 산업, 하이브리드 산업 등과 함께 국가의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꼽을 정도다.
도쿄대학 첨단과학기술센터의 간자키 료헤이(神崎亮平) 교수 연구실에서는 로봇공학, 생물학, 의학. 정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곤충의 탁월한 기능을 과학기술에 접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특히 곤충의 뇌는 이 연구소가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분야다.
곤충의 뇌는 10만개 정도의 작은 신경세포로 구성돼 있다. 이는 1,000억 개나 되는 인간의 뇌와 비교하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과는 다른 뛰어난 기능이 적지 않다.
실제 곤충의 뇌는 고도의 감각수용 기능과 기억·학습 기능, 행동 지령·제어 기능을 갖고 있다. 뇌 용량이 작은 개미가 길을 찾거나 먹이를 운반하는 등의 복잡한 일을 수행해 낼 수 있는 것은 뇌가 신경흐름에 따라서 다음 행동을 차례대로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곤충의 뇌는 초 경량화, 초 슬림화된 첨단구조라고 부를 만하다. 뇌의 명령을 전하는 신경시스템과 일을 실행하는 몸체 등은 간소하면서도 합리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어 과학자들이 참고로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간자키 연구소는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곤충의 뇌를 분석해 조작하는 연구와 이를 토대로 생체·기계 융합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에나방의 행동 양식을 구현하는 곤충 조종형 로봇을 개발했는데, 이는 누에나방의 행동을 87% 이상 재현한 로봇이다. 연구소는 역으로 이 로봇의 행동을 조작해 누에나방의 반응을 관찰하는 등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파리의 비행 능력을 활용한 비행기를 개발 중에 있다. 파리는 어느 방향으로도 이착륙이 가능하고, 비행 중에도 매우 빠른 속도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조지아 기술연구소는 이 같은 파리의 비행 능력을 닮은 곤충 스파이 비행기인 엔터모터(Entomopter)의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나비의 체온조절 방식도 응용되고 있다. 나비는 날개를 이용해 체온을 조절하는데, 이를 컴퓨터 칩을 냉각시키는 연구에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구조물이라는 벌집의 6각형은 현재 포장에 사용되는 골판지는 물론 벽걸이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액정화면의 구조, 무선이동 통신의 기지국 설계 등에 이미 응용되고 있다.
문명의 새로운 성장 동력
제조업에도 곤충이 활용되고 있다. 멕시코는 선인장 깍지벌레를 써서 전기절연체를 생산하고 자연염료까지 만들어낸다.
또 빛이 닿으면 색깔이 변하는 남미의 나비를 연구해 자동차나 옷감의 도료로 쓰는 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나비 날개 표면에서 뽑아낸 광물성 천연염료를 위폐방지용 물감으로 사용하는 남미 국가도 있다.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데도 곤충을 이용한다. 미국은 이라크 전에서 꿀벌과 나방을 이용해 폭발물을 탐지하는 실험을 실시했을 정도다. 곤충의 촉각은 갖가지 외부 정보의 수용기관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곤충의 신경세포는 1만~10만개로 100억 개가 넘는 사람의 신경세포보다 훨씬 적지만 기본적인 기능은 비슷하다. 곤충의 촉각이 미량의 특별한 물질에 대해 갖고 있는 놀라운 감응력은 최첨단 센서의 개발에 응용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곤충의 활용도가 큰 대표적 분야는 의약품이다. 예를 들어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됐던 파리와 누에의 분비물 등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더러운 곳에서 사는 파리의 알과 유충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항균 물질이, 누에에는 간세포 이상 증식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있다는 사실이 각각 발견된 것이다.
국내 연구진들은 이미 누에를 이용해 동충하초 재배에 성공했고, ‘한국판 비아그라’인 누에그라를 개발했다. 현재 누에그라는 5개 제약회사에서 만들 정도가 됐다.
이뿐만 아니다. 누에 성분을 이용한 화장품과 혈당강하제, 머리염색약 등도 나왔다. 이미 15년 전에 ‘곤충기능 이용기술 개발’을 국가 생명공학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한 일본은 유전공학을 활용해 곤충의 유용 유전자를 추출, 암 증식을 억제하는 신약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무당거미에서 추출한 단백질 분해 효소인 ‘아라자임(Arazyme)’이 관심을 끌면서 곤충산업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주목 받고 있다.
곤충기술은 연구 분야를 한정하기가 어려울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생겨나고 있고, 그 활용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현재 지구상에 보고된 곤충만도 무려 150만종이나 된다. 동물 중 가장 많은 종수와 개체 수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종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만큼 향후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곤충의 활용도가 다방면으로 확대되면서 곤충이 인간 문명의 성장 동력이 돼 가고 있다. 덕분에 곤충의 몸값도 날로 뛰고 있다.
이상훈 서울경제 기자 sh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