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미술의 신화, 마르셀 뒤샹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미학적인 창작의 의미를 끄집어낸다는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의 탄생을 예고하는 단어로 마르셀 뒤샹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과 함께 작품을 최종 완성하는 자는 관람객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즉 작가는 실험과 충격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빛을 보도록 해야 하며, 관람객은 작품의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행위에 독자적으로 공헌한다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2 (1912)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 예술작품도 아니고 스케치도 아닌, 그렇다고 현재 예술계에서 쓰고 있는 어떤 용어도 적용할 수 없는 것들에 알맞은 단어 같았지.
레디메이드에 대한 선택은 결코 어떤 미학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 좋거나 나쁘다는 취향이 완전히 없어지는 순간의 감정과 어울리는 시각적 무관심의 반응에서 나온 거야.

결국 레디메이드는 완전 무감동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야. 레디메이드를 느끼기 위해서는 미학적 감동이 없는 그 어떤 무관심에 이르러야 해. 레디메이드는 우리 세대에 그 많은 화가들이 우수한 손재주와 능력으로 만든 것에 대항해 정신적인 선택을 통해 미학적 고찰을 해 보자는 것이지.”

이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마르셀 뒤샹(Duchamp Marcel; 1887~1968)이 한 말이다. 레디메이드라는 말 역시 1915년 ‘자전거 바퀴’, ‘병 건조기’ 등 파리에서 제작했던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미학적인 창작의 의미를 끄집어낸다는 ‘레디메이드’는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념미술의 탄생을 예고하는 단어였다.

레디메이드의 탄생

프랑스 루앙 근처에 있는 마을 블랭빌 크레봉에서 1887년 7월 태어난 그는 공증인인 아버지 쥐스탱 이시도르 뒤샹과 마리 카롤린 뤼시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해상 중개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회화에 여생을 바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컸으며, 둘째형 레이몽은 훗날 뒤샹 비용이라는 이름의 조각가로 활동하는 등 그의 집안 분위기는 예술 그 자체였다.

뒤샹이 아버지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00년대 초 파리는 인상파ㆍ야수파ㆍ입체파 등 온갖 미술사조가 뒤섞인 혼동의 시대였다. 뒤샹의 작품을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체스 시합’(1910), ‘뒤무셸 박사의 초상’(1910) 등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반면 ‘커피 분쇄기’ (1911),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 2’(1912) 등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뒤샹은 1912년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 2를 출품한 후 직업적 화가라는 의미의 작업은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뒤샹의 이 같은 절필 선언에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그의 선언에는 ‘마르셀 뒤샹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후에 그는 전통미의 급진적인 부정을 구체화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프랑스와 미국을 넘나들며 꾸준하게 작가로 활동한다.듣도 보도 못했던 레디메이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뒤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 등 서구 미술사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많은 미술시조가 혼재해 있었던 때다. 정치에 비유하자면 마치 기원전 7세기 중국 중원을 무대로 수 십 여개의 국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던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이념과 철학을 설파했던 제자백가에 비유할 수 있을까.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1900년대 초는 전통이 무너지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능적인 예술로서는 야수파와 입체파가 마지막을 장식했으며, 뒤샹의 등장으로 예술계는 거대한 혁신의 문에 들어서게 된다.

요즘 현대미술에서는 붓 한번 들지 않고 컴퓨터에서 내려 받은 이미지로 제작을 마친 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을 쉽게 볼 수 있다. 미학적 아름다움보다는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의도를 중시하는 이른바 개념미술은 바로 1910년대 뒤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이 된 기성품

그의 작품은 서구 화단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등 없는 둥근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 한 짝을 떼어다 붙여놓은 자전거 바퀴, 유리를 팔레트로 쓴 ‘자신의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1915~23) 등을 잇달아 출품하면서 그는 새로운 실험을 거듭한다.

그의 아방가르드적인 실험은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전인 앙데팡당에 ‘샘 (Fountain)’ 을 출품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작품배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정됐던 탓에 R. 머트(마르셀 뒤샹의 또 다른 이름)라는 이름으로 샘을 출품했다. 뒤집어 놓은 남성용 변기가 전부인 샘은 위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거리가 됐으며, 결국 전시를 거부당한 채 전시기간 내내 칸막이 뒤에 방치됐다.

“나의 작품 샘은 취미에 대한 문제를 실험적으로 즐기려는 생각에서 나왔지.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적은 오브제를 골랐어. 소변기를 보고 그것을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지. 예술적 쾌락은 위험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곧이듣게 할 수 있고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났지.”

뒤샹은 인류 역사와 함께 했던 전통적인 미술의 개념을 무너뜨린 작가로 평가받으면서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주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작가로서 절정기였던 1938년 그는 작은 가방에 그의 대표작을 담아서 ‘가방형 상자’라는 작품을 만든다. 대표작을 무작위로 선택하고 축소해 한데 모아 색채를 입히고 오브제를 사용하는 등 다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여행가방 속의 상자’는 여러 개의 에디션이 있다. 이른바 걸어 다니는 ‘뒤샹 미술관’인 셈이다. 전쟁으로 자주 옮겨 다녀야 했던 그에게 작품을 관리하기 위한 일종의 보관방법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도 그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이 됐던 이 작품은 최근 60억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언어의 마술사 뒤샹

그의 기존 미술 뒤집기는 언어ㆍ개념ㆍ복제ㆍ유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 그의 작품 제목은 중의적인 언어의 유희가 담겨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L.H.O.O.Q.’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 L.H.O.O.Q.를 써 넣었다. L.H.O.O.Q.는 프랑스어로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Elle a chaud au cul)’와 비슷하게 들리는 말로 다빈치의 동성애를 비꼬며 예술작품의 신화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뒤샹은 ‘현대미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기도 한다.

‘한쪽 눈으로 한 시간 가량 유리의 다른 편을 자세히 쳐다보기’(1919), ‘에로즈 세라비는 소금장수를 잘 안다’(1922), ‘왜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1935) 등 유난히 그의 작품에는 알 듯 모를 듯한 제목이 많다.

“나는 시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를 좋아해. 내게 동음이의어로 말장난을 치는 것은 마치 시를 짓는 일과 같아. 단어들의 소리는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그가 작품에 시적이고 언어 유희적인 제목을 달았던 것은 작가로서 재정적인 독립을 위해 일했던 사서라는 직업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22세 되던 1909년. 그는 프랑스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의 사서 자리를 얻으면서 원근법 등 다양한 책을 읽는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그는 가끔 프랑스 문화원에서 사서로 일하며 책을 읽었다.

사서로 일했던 그는 예술을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이다.



작품 완성하는 자는 관람객

오랜 세월 예술작품은 특정 계층이 품위를 유지하고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었다. 화가들은 대부분 공방이나 궁정에 소속돼 수요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이를 벗어나 작가들이 작품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의 감성과 느낌을 그대로 반영했던 18세기 후반의 인상파, 야수파가 대표적이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18세기 말의 서구 미술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관람객들의 관점을 이해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작가들이 넘쳐흐르는 감성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새롭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람객을 예술의 한 구성요소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주인공은 바로 뒤샹이다. 기성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뒤샹에게 관람객은 어떤 의미였을까.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림은 화가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의해 창조됩니다. 작품을 외부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람객이기 때문이지요. 관람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독자적으로 공헌을 합니다. 이러한 공헌은 후대가 잊혀 진 예술가들을 재평가하고 명예를 회복시킬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는 1957년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미국 예술연맹 기간에 ‘창조적 행동(The Creative Act)’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그가 남긴 말이다.창조의 또 다른 완성자로서 관람객을 끌어들인 그는 작가들의 역할이 더 큰데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작가는 실험과 충격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빛을 보도록 하는 것이 의무라고 역설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한 시선, 미술의 기능적인 미학을 믿지 않았던 회의론적 사고, 작품 거래에 뛰어난 능력에 대한 비판 등으로 자신만의 자유의지를 예술로 펼쳤던 뒤샹은 모순과 혼돈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지표가 됐다.

뒤샹은 세잔이나 피카소 등과 달리 특별한 경향에 묶이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 어느 곳에서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뒤샹이 모더니즘의 미학과 미술사, 미술제도와 시장, 그리고 미술기관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예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i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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