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곧 국가의 미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사람의 삶은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과학기술이 전제돼야만 더 좋은 성능의 휴대폰을 개발하고, 자동차도 만들 수 있다. 또한 우주도 가고, 유전자를 연구해 질병을 고칠 수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총괄했던 과학기술부가 지난해 폐지되고, 교육인적자원부와 합쳐져 교육과학기술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교육과 과학기술 부처의 통합이 시너지 효과를 내기보다는 과학기술 부문의 추동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의 진단이다.
과거 과학기술부 산하에는 26개의 대표적인 이공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있었다. 지금 13개 연구기관은 기초과학을 다룬다는 이유로 교육과학기술부, 나머지 13개 연구기관은 돈 버는 기술을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지식경제부에 편재돼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이끌어 온 연구기관들은 이처럼 뿔뿔이 흩어져 주무부처의 변방에 머물고 있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는 이처럼 위기국면에 처한 연구기관들의 확실한 자리매김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을 가다'라는 시리즈를 지난해 신설, 운영해 오고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이끌어가는 연구기관들의 목표, 전략, 활동, 그리고 성과를 알려 과학기술 입국의 꿈과 취지를 되살리고자 한다. - 편집자 註
화학(化學)은 물질의 성질·조성·구조 및 그 변화를 다루는 과학이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정체와 변화를 연구하는 것. 지금까지 화 학은 원자를 꿰어서 약 1,800만 가지의 화합물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이 화합물을 통해 인류의 산업 생산성 은 수직 상승을 거듭했고, 소독약과 항생제 등의 개발 을 통해 수명도 늘어났다.
앞으로 세계 최초란 이름으로 등장할 화합물 역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즉 연구개발의 산물이 될 것 이다. 자연계에서 새로운 화합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학은 과학기술의 '오디세이(Odyssey)'로 불린다. 새로운 과 학적 발견이나 발명은 바로 화학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화학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주거, 산업, 교통, 통신 등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의 토대가 바로 화 학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화학은 대체에너지, 전자 통신기기의 첨단소재, 새로운 개념에 입각한 바이오 칩 등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처럼 화학이 다루는 범위는 넓다. 하지만 한정된 인력과 예산을 통해 세계적인 원천기술을 개발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화학연구원이 주력하고 있는 연구 분야도 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그 린화학, 반도체와 LCD 등에 사용되는 첨단소재, 그리 고 신약 개발에 이용되는 신물질 등 3가지다. 그린화학이란 투입되는 에너지를 절감하는 동시 에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SK에 기술을 이전한 중질 나프타 접 촉 분해 기술이 대표적이다. 이 기술은 올해 가동되는 SK 울산공장에 적용될 예정으로 연 1억 달러의 에너 지 절감효과와 함께 60만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가 기대되고 있다. 천연가스로부터 합성석유를 생산해내는 GTL(Gas to Liquid) 기술도 화학연구원의 작품이다.
국내외 22 건의 특허출원이 이뤄진 이 기술은 가스 파이프라인 연결이 어려워 개발되지 못한 오지의 한계 가스전이 나 석유를 시추하면서 함께 나와 대부분 태워 없어지 는 가스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화학연 구원은 지난해 정부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내세운 만큼 그린화학을 통해 국가 전략 에 부응한다는 방침이다.
첨단소재는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연구 비중을 확대해 왔기 때문에 상당한 성과와 함께 어느 정도 기 반이 마련된 상태다. 지난 2004년 LG 이노텍에 기술 을 이전한 백색 LED용 황색 형광물질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백색 LED는 노트북 등 IT기기의 LCD 용 백라이트나 휴대폰의 카메라용 플래시로 사용된 다.
문제는 백색 LED가 처음부터 백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적·청·녹 등 3가지 색의 발광체를 적절히 배 합해 흰색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3가지 발 광체를 사용하면 총 6개의 전극이 필요하고, 그만큼 생산단가와 전력소모도 크다.
부피를 줄이는데도 한 계가 있다. 그래서 나온 기술이 하나의 청색 발광체에 황색 형광물질을 부착함으로써 백색을 만들어 내는 것. 그 동안 이 기술은 일본 기업이 독점하고 있었다. 화학연구원이 보다 연구력을 집중하고 있는 분야 는 신약 개발에 이용되는 신물질이다.
정밀화학이자화학 산업의 꽃으로도 불리는 신물질은 원천기술 하
나 당 수조원의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대표적 블루오 션이다. 화학연구원의 대표적 기술 이전 성과인 에이즈 치 료제용 신물질의 경우 하루 1회 투여만으로도 약효가 유지돼 사용의 편리성은 물론 독성 등의 부작용도 적 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길리어드가 85억 원의 기술료를 지불하고 이 기술을 이전해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대표적 기술 이전 성과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코드분할다중 접속(CDMA) 이후 최대 규모다.
화학연구원은 이와 함께 기존 당뇨병 치료제에서 나타나는 위장장애와 체중증가 등의 부작용을 줄인 당뇨병 치료제용 신물질을 개발해 국내 기업에 기술 이전했다. 또한 뇌졸중 치료제용 신물질을 개발해 미국의 제약회사인 다뉴브에 넘겼다. 물론 화학연구원이 당장 신약 개발에 나설 가능성 은 크지 않다. 신약 개발은 투자 실패에 따른 위험부담 이 너무 크다.
제품화를 위한 임상실험 등 상당한 투자 가 필요한데다 경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 라 화학연구원은 우선 신물질 개발을 통해 투자 실패 에 따른 위험부담을 줄이고, 향후 국내 여건이 조성되 면 신약 개발에 직접 뛰어들겠다는 복안이다.
화학연구원은 지난해 9월 민간기업 연구소와 대학 에서 잔뼈가 굵은 오헌승 원장이 부임하면서 새로운 변화와 도약을 추구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 는 연구, 그리고 산·학·연의 장점을 취합한 융·복 합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겠다 는 것이 그의 취임 일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목표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 즉 척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정부출연연구원의 구조적 취 약점. 오 원장은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 자 개개인의 능력을 결집시키는 등 연구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계획이다.
오 원장이 모토로 내세운 에코(ECHO) 경영도 이 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E(Ethics; 윤리경영), C(Customer; 고객만족), H(Human; 사람을 위한 기 술), 그리고 O(Outcome; 연구성과)의 단어가 조합된 에코 경영은 앞으로 화학연구원이 지향해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오 원장은 에코 경영을 통해 오는 2011년까지 세계 적인 원천기술 7개를 개발하고, 연구비의 7% 수준에 달하는 기술 이전 수입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발상의 전환, 조직문화의 일 신을 꾀하고 있다.
오 원장은 민간기업 연구소에 근무할 때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하지만 점심은 반드시 구내식당에서 직원 들과 함께 한다. 화학연구원에 부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임원식당의 칸막이를 없앤 것이다. 직원들은 화 학연구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첨병이자 동지(同 志)로 그들과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 원장은 외부에서 손님이 방문해도 구내식당을 이 용하자고 권유한다. 또한 기관장의 결제는 5초 이내에 이루어져야 한 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결제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거나 쓸데없이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것.
그래서 원장이 결제해야 할 서류는 비서의 책상에 놓이 게 되며, 오 원장은 틈나는 대로 읽어보고 결제한다. 그의 사무실은 연중무휴 개방돼 있지만 불필요한 가 구나 장식은 없다. 보직자는 물론 말단 연구원과의 커 뮤니케이션에는 e메일이 많이 이용된다. 한마디로 목 적 지향적이며, 실용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이다.
강재윤 기자 hama9806@sed.co.kr
interview: 오헌승 한국화학연구원장
Q. 정부출연연구원은 처음이신데?
A. 처음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연구자로서 의 첫 걸음을 뗀 게 국방과학연구소였으니까요. 그 이후에는 줄곧 LG와 삼양사의 연구소장을 지냈고, 화학연구원에 오기 직전에는 대학에 있었습니다.
정부출연연구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길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흔히 말하는 산·학·연을 모두 경 험한 사람이 됐습니다. 각 부문의 특징을 모두 경험한 만큼 이들의 장 점을 조화롭게 융합해 나간다면 비교적 탁월한 연 구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Q. 정부출연연구원의 문제점이라면?
A. 화학연구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출연연 구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연구 인력의 평균 연령이 다소 높다는 문제는 있지만 개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고 시설도 상당한 수준에 있 습니다. 하지만 연구자 개인 또는 팀 단위로만 연 구 활동이 이뤄지는 것은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연구자 개개인이나 팀 단위로는 나름대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세계적인 원천기술 차원, 그리 고 스케일이 큰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평가를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Q. 그 같은 문제가 왜 발생했다고 보십니까?
A. 민간기업 연구소에서의 경험과 취임 후 지금 까지 살펴본 바로는 연구과제 중심제도(PBS), 그리 고 동종 연구기관 사이의 경쟁 부재 등 2가지 원인 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10년 전 도입된 PBS는 연구개발의 생산성을 높 인다는 취지였지만 연구자 개인이나 팀 단위로 연 구 과제를 따오는데 함몰돼 큰 그림은 그리지 못 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연구자나 팀과의 교류는 막히게 됐고, 연구간 시너지 효과도 거둘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각종 연구 과제를 수탁할 때 경쟁자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화학연구원과 같은 분 야의 정부출연연구원이 존재한다면 경쟁을 벌이 고, 이 과정에서 좀 더 생산성 있는 연구가 이뤄졌 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출연연구원은 각 분야별로 1개씩이 기 때문에 결국은 산업체 연구소나 대학과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정부출연연구원의 위상에 걸맞은 연구보다는 산업체 연구소나 대학이 수행해도 될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Q. 문제점을 알면 해결책도 있을 텐데?
A. 우선 분산된 연구조직을 몇 개의 큰 단위로 합 쳤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선정된 3개 분야에 연구 비와 연구 인력의 약 70%를 집중시켜 세계적인 연 구 성과를 창출할 계획입니다. 기초적이고 장기적 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에는 나머지 30%의 투자를 통해 빨리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 줄 생각입니다.
또한 연구 인력에 대해서는 우수하지만 개별화 된 연구능력을 결집시켜 융합연구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일부에서는 구조조정을 통해 사람 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하지만 이 같은 방법에는 반대합니다. 사람을 바꾸기보다는 연구환경의 변 화를 통해 성과를 이끌어 내는 게 바람직한 방법이 라고 생각합니다.
Q. 성과를 내는 연구를 강조하시는데, 그럼 신약 개발에도 나설 것인지?
A. 우선 분산된 연구조직을 몇 개의 큰 단위로 합 쳤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선정된 3개 분야에 연구 비와 연구 인력의 약 70%를 집중시켜 세계적인 연 구 성과를 창출할 계획입니다. 기초적이고 장기적 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에는 나머지 30%의 투자를 통해 빨리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 줄 생각입니다.
또한 연구 인력에 대해서는 우수하지만 개별화 된 연구능력을 결집시켜 융합연구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일부에서는 구조조정을 통해 사람 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하지만 이 같은 방법에는 반대합니다. 사람을 바꾸기보다는 연구환경의 변 화를 통해 성과를 이끌어 내는 게 바람직한 방법이 라고 생각합니다.
Q. 화학연구원의 향후 비전은?
A. 화학연구원은 우리나라가 세계 5대 화학강국 으로 성장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 워두고 있습니다. 물론 양적인 성장만을 놓고 본다면 세계 5대 화 학강국에 진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학연구원의 목표는 화학이 다 른 산업 분야의 기반 역할을 하며 질적으로 5대 화학강국에 들어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