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자본 및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가상현실이 초래할 디지털 디스토피아

산업혁명이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히고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하는 데 기여했다면 디지털 혁명은 인간의 지적능력과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고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아무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게 마련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중독성은 금단증세와 함께 각종 범죄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거대자본과 이데올로기가 사이버 공간을 장악할 경우 디지털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난 20세기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원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핵반응 때의 질량결손을 발전과 같이 평화적인 용도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원자폭탄을 거쳐 수소폭탄과 중성자탄이라는 끔직한 재앙의 산물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 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과연 인류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양면성 가지고 있는 디지털 혁명 최근 디지털 혁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디지털 시대의 극히 초기단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디지털 혁명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디지털 혁명은 핵과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성의 발전과 삶을 저해 하는 게임 중독, 채팅 중독, 컴퓨터 음란물 중독 등 각종 사이버 중독이 그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매매, 자살 사이트의 급증, 그리고 각종 사기사건 역시 디지털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학교 컴퓨터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학생들의 많은 중독 증세를 관찰하게 된다. 특히 메신저 중독은 심각하다. 수십 명의 접속자 아이디를 띄워놓고 로그온을 기다린다. 로그온 됐을 때 수업은 뒷전이다. 야단쳐도 소용없다.

수업 중에 창을 숨겨놓고 게임을 하는 학생도 많다. 필자는 대학원생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이 때 학생의 집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학생 방의 컴퓨터를 켜고 원도우의 시스템 폴더를 해제한 후 로그 기록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이트에 접속해 들어간다. 이때 학생은 사색이 되고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눈을 의심해 마지않는다. 우리 아이만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음날 학생의 집을 방문해 보면 아이가 잘 걷지 못한다. 과외 선생님이 가고 난 후 부모님께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컴퓨터를 압수당한 것이다. 그럼 그 이후부터 이 학생의 성적은 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컴퓨터는 부모님의 엄격한 감시 아래에서만 하게 된다. 컴퓨터에 중독된 아 이들은 성적이 오를 수 없다. 신문에서도 여러 가지 컴퓨터 중독에 관한 기사들을 심심치 않게 읽게 된다.

가장 자주 접하는 기사는 PC방에서 며칠간 잠도 안자고, 제대로 먹지도 않으며 게임만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거나 게임에 중독된 아이가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오락만 하다가 이혼을 했다는 기사도 빈번하게 나온다.

디지털 콘텐츠는 상상의 산물

무어의 법칙을 입증이라도 하듯 컴퓨터 하드웨어는 발전을 거듭했다. 64비트 컴퓨터에 이어 조만간 128비트 컴퓨터가 출현하게 되며, 나노 컴퓨터 시대도 열리게 된다. 무어의 법칙은 마이크로칩 기술의 발전 속도에 관한 것으로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노컴퓨터란 나노기술을 접목하거나 응용해서 만든 세포 정도 크기의 컴퓨터를 말한다. 아주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속으로 투입해 몸 안의 정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신경 및 생체 인터페이스가 출현할 정도로 인터페이스도 급격한 발전을 하고 있다. 인터페이스란 사물 간 또는 사물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물리적, 가상적 매개체를 의미한다.

디스플레이 장치 역시 음극선관(CRT), 액정표시장치(LCD), 유기발광다이오드 (OLED)를 거쳐 접거나 말을 수 있는 디스 플레이가 나올 전망이다. 각종 센서, 인공지능, 주변기기는 물론 소프트웨어와 인터넷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 혁명은 조만간 유비쿼터스 시대와 맞물리게 된다. 유비쿼터스란 컴 퓨터와 네트워크가 현재와 같이 불편한 외형에서 벗어나 마치 공기처럼 우리 생활 주변의 환경으로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컴퓨터는 한 개의 작은 칩이 되고, 디스플레이는 더욱 진화해 지금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안경형 모니터로 바뀌게 된다. 안경형 모니터에는 입체 영상을 제공하는 기능이 내장돼 있다.

안경형 모니터는 개방형과 폐쇄형이 있다. 개방형은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외부의 환경과 안경 내의 그래픽이 결합돼 사용자에게 제공된다. 이를 증강현실이라고 한다.

폐쇄형에서는 외부의 창을 닫고 순수한 가상현실만 체험하게 된다. 3차원 공간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는 트래커가 장착된 안경형 모니터를 쓰고 거실을 거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천정을 올려다보면 트래커는 하늘을 보여주고, 앞으로 걷게 되면 주변 환경을 뒤로 보내 실제 특정한 장소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딛고 서 있는 땅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거실 안을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이때의 디지털 콘텐츠는 완전히 상상의 몫이다. 이 사람은 무한한 바다 위를 날 수 있다. 하늘에는 거대한 고래들이 날고,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며, 하늘까지 솟아있는 미지의 대륙이 보인다.


체감형 HMD와 휴먼 인터페이스

기존의 CRT나 두부장착 영상장치(HMD) 방식의 모니터는 해상도에 근본적인 한계 가 있다. 이들 방식으로 해상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스크린 크기를 키워야 한다. 만약 고해상도 HMD를 제작한다면 부피가 커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무거워지고 착용하기도 힘들다.

또한 LCD를 무리하게 확대하면 픽셀이 보여 사실성이 떨어진다. 이점이 이들 방식 의 근본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OLED 방식 이후에는 정해진 규격 내에서 해상도를 더욱 조밀하게 올리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디스플레이의 진화인 셈인데, 앞으로는 디스플레이가 매우 얇아 말거나 접을 수도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안경형 모니터는 더욱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지며, 현재와 같은 사각의 프레임을 없애고 현실체험과 같은 파노라마 뷰가 가능해진다. 한마디로 현실에 가까운 시각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체계 중 외부를 인식하는 정보의 90%는 시각에 의존한다. 청각과 촉각 은 보조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안경형 모니터는 유비쿼터스시대 디스 플레이의 핵심이다.

지금의 불편한 외형은 사라지고 안경형으로 대체돼 나갈 것이다. 이럴 경우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구현은 훨씬 수월해진다. 이미 청각에서 3차원 공간감의 구현은 높은 수준에 와 있다.

촉각의 경우 데이터 글러브 데이터슈트 등 햅틱 장비들이 발전돼 가고 있고, 후각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 같은 장비들은 수요가 많아지면 가격도 저렴해지고 불편한 외형도 개선될 것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제공되고 있는 웹서비스 커뮤니티 중 세컨드라이프는 게임과 같은 3D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사이버 공간 안에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며, 그 안에 거미줄 같이 수많은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처음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커뮤니티는 점점 접속자 수를 늘리며 거의 세계적인 수 준으로 확대된다. 이곳에서 유저는 특정한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만약 세컨드라이프가 진화해 고해상도 체감형 HMD와 발달된 휴먼 인터페이스로 제공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여기에 무한 이익을 추구하는 다국적 거대자본까지 결합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지금까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높은 사실성의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면.


체감형 3D 매트릭스에서의 권력

그것은 거대한 매트릭스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의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나온 개념으로 거의 실제와 다름없는 가상현실을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견제가 가능할까. 매트릭스의 중독성이라면 거대자본의 무제한적 권력과 이데올로기 조작까지도 가능하다.

디지털 시대의 초기단계인 지금도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고 있고, 이로 인한 고용 창출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온라인 게임의 부정적 효과 같은 이유로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래에 체감형 3D 매트릭스가 만들어지면 강력한 중독성 때문에 대중의 예속, 이데올로기 조작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이 통제되는 미래 세계의 암울한 모습은 영화를 통해서도 체감할 수 있다.

테리 길리엄 주연의 ‘브라질’은 정보화로 인해 모든 것이 획일화된 미래의 도시에서 시민 샘 로리가 정부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일생을 그린 것이다. 또한 ‘비디오 드럼’은 미디어의 폐해를 지적하는 대표적 영화로 꼽힌다.

어쨌든 현실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물도 리니지와 같은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게임(MMORPG)에서는 사이버 세상을 호령하는 군주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에서의 정체성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체성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이라고도 불리는 MMORPG는 수십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인터넷을 통해 모두 같은 가상공간에서 즐기는 롤플레잉 게임의 일종이다. 게임 내에서는 그도 수많은 병졸을 거느린 그야말로 막강한 실세다. 그의 존재감은 가상세계 내에 존재한다.

이 같은 서비스가 앞으로 매트릭스에서 엄청난 규모로 진화할 것이다. 그것도 체감형 일인칭 시점의 가상현실로 말이다. 이에 따라 아무리 미천한 존재도 이 서비스 안에서는 무한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다. 이 사용자는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저택을 지을 수 있다. 배우자가 있고, 식구도 있으며, 이웃과 친구가 된다. 음성인식과 인공지능에 의해 그 속의 캐릭터들과 대화를 한다.

캐릭터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말 못할 고민도 온라인상의 캐릭터 들과는 소통이 가능하다. 사실 사람들은 다마고치와 같은 작은 완구에서도 캐릭터의 실재감을 체험하게 된다.

다마고치는 지난 1996년 일본의 주부 아키 마이타가 개발한 휴대용 디지털 애완 동물. 작고 간단한 달걀 모양의 공간 안에 살며 플레이어는 과자나 음식 먹여주기, 함 께 놀기, 배설물 치워주기 등을 할 수 있다. 이 같은 완구에서도 캐릭터의 실재감을 느끼게 되는데, 하물며 미래의 온라인 가상 캐릭터와의 친밀도와 존재감은 말할 것도 없다.

이로 인해 사용자가 갖게 되는 정체성의 큰 부분을 캐릭터들과 가상현실 환경이 차 지하게 된다. 문제는 사용자가 그 공간 내에 완전히 몰입하게 됨으로써 중독성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커진다는 것이다.

증강현실이 쌓아올린 바벨탑

증강현실도 중독성이 강하다. 만약 자신의 아파트를 스캔하는 서비스가 제공되면 아파트 구석구석까지 3D 정보를 입력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그의 아파트는 빠져나오기 힘든 매트릭스가 된다. 실제 현실과 가상이 결합된 그의 아파트는 환영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거의 실제와 흡사하다. 거실 소파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상의 여인이 앉아 있다.

그것도 알몸으로. 탁자 위에는 동물도 식물도 아닌 기괴하게 살아 움직이는 꽃이 놓여 있다. 여인은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잠시 후 벽속에서 그 여인과 사이버 섹스로 낳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아빠(사용자)에게 매달린다.

이 캐릭터들은 인공지능이 결합돼 있어 사용자와 일상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가상가족의 대화는 현실에서는 감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를 털어놓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거추장스러운 오프라인의 결혼도 필요 없이 이 상태가 정신적으로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특정 서비스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나온다. 수 년 전에 죽 은 애완견도 꼬리를 치면서 반겨준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외형 데이터를 스캔하고 말투와 음색 등 언어적 특성과 성격 등을 입력해 데이터베이스화 해놨기 때문이다. 의식이 존재하는 한 여기에서는 죽음도 없다. 거실에는 장식용 전등인 샹들리에 대 신 허공에서 현란하게 변신하는 프랙탈 생명체가 빛을 발하고 있다.

프랙탈이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말한 다. 프랙탈 구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과 황홀감이 깊은 감동으로 전해져 마음을 흔들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커뮤니티 내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리턴하거나 아니면 리셋을 누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4차원 세계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증강현실이 바벨탑이라고 할지라도 수년간 쌓아올린 실재감을 쉽게 허물기는 어렵다. 현실에서와 같은 시공간 종속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순간 전기 공급이 끊어지거나 사용료가 다해 서비스가 중단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암담한 현실 속으로 되돌아 왔을 때 엄청난 좌절감과 금단 증세가 올 것 이다. 이에 따라 그는 재차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못할 짓이 없게 된다. 이것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약의 중독 증세와 흡사하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매혹적인 그 공간의 포로가 되는 셈이다. 특히 이 같은 서비스가 실제 시작되면 거대 자본과 결합된 매트릭스는 도저히 인간의 의지로 깨기 힘들게 되며, 인간을 노예로 예속시킬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지금의 온라인 게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온라인에서는 나(주체)와 대상(객체)이 현실과 모니터 내부라는 차원으로 분리돼 있다. 하지만 미래의 매트릭스는 이 양자가 결합된 동일 공간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진다.


가상현실이 가져오는 금단증세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달동네의 반 지하실 에 한 폐인이 살고 있다. 이 사람은 비참한 현실, 그리고 이에 따른 경제적 빈곤 때문에 증강현실보다는 가상현실 서비스를 선호한다.

오늘도 잠에서 깨자마자 서비스에 재빨리 접속한다. 깨어있을 때는 언제나 매트릭 스 안에 들어가 있다. 매트릭스에 들어가자 마자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다. 대지 200만평 위의 대저택이다. 이 저택을 만들기 위해 지난 10년간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많은 시종들이 있고, 전용 골프장과 수영장이 있다. 그리고 기괴한 가상세계를 여행하는 전용 비행기도 있다. 저택은 유리로 된 거대한 궁전이다. 이 속에서 모든 사람은 발가벗고 생활한다. 관음증의 세계다. 이 속에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진다.

그리고 그 재미는 한도 끝도 없이 업그레이드된다. 이 사람이 오프라인으로 나오는 것은 너무도 배가 고프거나 아니면 용변이 급했을 때뿐이다. 간단히 라면이나 죽으로 때우고 다시 온라인으로 들어간다. 잠도 온라인에 접속된 채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환상적인 해변에서 애인과 바캉스를 즐기고 있을 때 잔고 부족으로 서비스 가 중단된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곧바로 걷잡을 수 없는 금단증세로 빠져든다. 매트릭스의 꿈에서 깨어나 내팽개쳐진 비참한 현실로 돌아오는 것. 이 때문에 그 사람은 다시 온라인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도, 살인, 도둑질 등 못할 게 없게 된다.

필자는 지난 2005년 미술대학 내에서 게임 엔진과 HMD 트래커 진동슈트 등을 이용해 1인칭 가상현실 게임을 테스트한 적이 있다. 마우스나 키보드로 입력하던 값들 을 인간의 신체 동작으로 입력하는 인터페이스로 전환했다.

일인칭 아케이드 슈팅게임이었는데, 매 게임마다 5분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매우 격렬했다. 게임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폭음과 함께 진동슈트가 요동을 쳤다. 뒤에서부터 접근하는 적에게 습격당한 것이다. 몸을 돌려 360°를 방어해야 한다. 적은 공중으로부터도 공격해 오기 때문에 상방과 하방도 방어해야 한다.

이는 현실에서의 체험과 같이 격렬한 몸동작을 수반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게임도 정교해진다. 미래의 사이버 공간은 게임, 커뮤니티, 여행, 생활 등이 모두 녹아들어간 체감형 서비스 공간이 될 것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기본 욕구인 성이 결합된다. 실제 필자는 지난 2006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폐쇄적 관음공간인 사이버 에로티카 파크를 설계, HMD로 전시한 적이 있다.


거대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결합

영화 론머 맨은 초창기 가상현실을 주제로 다룬 영화다. 내용은 피(被) 실험 대상이 된 바보 청년이 가상현실 실험 도중 점점 지능이 진화돼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 기본적으로 가상현실은 인간 꿈의 구현이며, 디지털 상으로 표현하지 못할 한계란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꿈은 잠재의식을 대면하는 통로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이 속에서도 프로이트가 제기한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꿈에서조차 원초적인 자아는 억눌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세계에서의 원초적인 자아는 자아의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 가상 현실은 꿈보다도 해방된 공간이며, 의식의 컨트롤 아래 잠재의식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릴 수도 있다.

가장 깊이 숨겨져 있는 자신과의 통로가 열리게 되면 그 때 자신의 원초적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세컨드라이프 형태의 콘텐츠는 언젠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거대한 글로벌 자본과 결합돼 월드와이드웹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할지 모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세상을 장악하듯이 이 매트릭스는 국경을 넘어 인류문명을 장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과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도저히 인간이 빠져 나 오기 힘든 매트릭스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은 필연적으로 매트릭스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도 개발하고 세뇌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스스로 강화되는 길을 밟는다. 거대자본은 언젠가 매력적인 미래 시장인 매트릭스와 결합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단순한 가상현실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역사의 방향을 새로운 차원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과학문명이 인류 발전과 복지를 넘어 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지구멸망이라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듯이 지금의 디지털 발전은 머지않은 장래에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 내 인류의 역사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미래는 과연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글_안광준 한성대학교 교수 umggg@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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