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 업계의 새로운 여왕

메리 루 젭슨은 OLPC(One Laptop Per Child) 프로젝트로 유명한 LCD 스크린 디자이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 1명 당 한 대의 랩톱을 갖도록 한다는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100달러 정도면 살 수 있는 저렴한 랩톱 개발에 주력했다.

어지간한 LCD 스크린만 하더라도 100달러가 넘는데 무슨 수로 이같이 값싼 랩톱을 만들 수 있을까. 젭슨은 스크린상의 이미지가 정적인지 아닌지, 즉 문서를 읽고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아보고 프로세서에 절전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재치 있는 LCD 스크린을 고안해 냈다.

그녀는 지금 랩톱의 LCD 스크린과 e북 리더의 디스플레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하나로 모은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개발, 시장공략에 나선 상태다. 디스플레이 업계에 새로운 여왕이 나타난 것이다.


메리 루 젭슨에게 있어 자기공명영상(MRI)을 찍는 것은 마사지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MRI를 찍는 순간만큼은 일을 하지 않고 휴식 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말 젭슨은 진료를 받기 위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파퓰러사이언스 기자인 로렌 아론슨도 따라갔다. 항상 바쁜 그녀에게 이때만이 취재를 위해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소살리토에 있는 선상가옥과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아파트를 오가는 젭슨은 보스턴에 3일간 머물렀다. 물론 보스턴에 머무는 중에도 그녀의 스케줄은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오기 전날 자신이 창설을 도왔던 비영리기구 OLPC(One Laptop Per Child)와 회의를 했다. MIT 미디어랩의 선구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창설한 OLPC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저렴한 랩톱을 공급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유명한데, 액정표시장치(LCD) 스크린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기술부장으로 참여했다. 랩톱은 노트북의 다른 말로 미주지역 에서 주로 사용된다.

OLPC가 개발하려고 한 랩톱은 컬러 스크린에 완전한 키보드, 그리고 무선 인터넷 기능을 갖추었으면서도 100달러 정도에 살 수 있어야 했다. 이 정도 가격이라면 개발도상국 정부가 수백만 대를 사서 시골마을에 뿌릴 수 있다. 단 크기가 작아야 하고, 최소한의 전력으로 구동될 수 있어야 한다.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 돈을 지불하는 대신 리눅스와 그 외 오픈소스를 선택했다. 또한 빠르지는 않아도 1W 정도의 전력 이면 충분한 AMD의 지오드 프로세서를 채용했다. 특히 젭슨은 스크린상의 이미지가 정적인지 아닌지, 즉 문서를 읽고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아보고 프로세서에 절전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재치 있는 LCD 스크린을 고안해 냈다. 이것 역시 전력을 절약하기 위한 차원이다. 그녀는 지금도 OLPC의 신형 컴퓨터 설계를 돕고 있다.

그녀는 지금 의사를 만나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를 놓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녀는 10년 전 종양이 생겨 죽을 뻔 했다. 내일은 보스턴 북 페스티벌에 나가서 소니 및 구글의 중역들과 함께 독서의 미래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MRI가 젭슨의 뇌를 스캔하고 있는 동안 아론슨은 대기실에 앉아 그녀의 핸드백을 지키고 있었다. 핸드백 속에는 그녀의 인생이 그토록 열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숨겨져 있다.



How It Works



젭슨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는 랩톱의 LCD 스크린과 e북 리더 디스플레이의 장점을 하나로 결합한 것이다. 색상과 함께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은 물론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고해상도의 흑백 스크린을 제공하는 기능까지 갖춘 것이다.

LCD 스크린의 기능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의 각 픽셀은 일반적인 LCD 스크린의 픽셀과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백라이트(A)가 액정 레이어(B)에 빛을 비추면 액정은 전기에 의해 바뀌는 빛의 방향에 따라 통과하는 빛의 양을 제어한다. 액정을 통과한 빛은 적색, 녹색, 그리고 청색 필터를 통과하면서 색조가 더해진다. 그리고 이 빛들을 섞어 스크린에 색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흑색과 백색의 반사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 백라이트를 끄면 픽셀은 빛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반사하게 된다. 전등이나 태양에서 들어오는 주변광(D)은 디스플레이로 들어와 픽셀의 대부분에 닿게 되는데, 이 픽셀은 반사경(E)을 감싸고 있다. 마치 컬러모드에서처럼 주변광이 액정을 통해 반사돼 나오면서 빛의 밝기가 변하게 된다. 하지만 빛을 흡수해 약화시키는 컬러 필터(C) 대신 빈 공간으로 빛을 내보내게 된다. 따라서 이 빛은 사용자의 눈에 백색, 흑색, 또는 백색과 흑색 사이에 있는 254가지 단계 음영의 회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10인치 규모의 시제품 LCD 스크린, 즉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였다. 젭슨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랩톱의 LCD 스크린과 e북 리 더 디스플레이의 장점을 하나로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스크루 드라이버로 기존 LCD 스크린을 제거하고 대신 자 신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태블릿 PC의 전원을 켜도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LCD 스크린처럼 보였다. 태블릿 PC란 펜으로 화면에 그림을 그리면 커서가 그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컴퓨터를 말한다. 공책처럼 사용할 수 있으며, 키보드를 장착하면 노트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외관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그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는 기존의 LCD 스크린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통상 LCD 스크린은 색상은 물론 동영상도 보여주지만 엄청난 전력을 잡아먹는다. e북 리더에 채용되는 대표적 디스플레이인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는 전력을 훨씬 덜 소모하고 종이 같은 느낌이 나지만 흑백으로만 나오는데다 페이지 로딩에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다. 젭슨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는 이 두 가지 기술의 장점만을 골라 모은 것이다. 모드를 바꾸면 LCD 스크린을 빛나게 하던 백라이트의 빛은 줄어들지만 디스플레이 전체가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색상만 흑백으로 바뀔 뿐이다.

그녀가 만든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는 주변광으로 백라이트를 대체하고, 픽셀이 감싸고 있는 거울 같은 소재의 반사경을 이용해 흑색, 백색, 그리고 회색을 나타낸다. 백라이트가 완전히 꺼지면 젭슨이 만든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 즉 3Qi는 아마존의 킨들만큼이나 선명하고 가독성 높은 문자를 표시한다.

3Qi는 '스리 치'라고 읽는데, '치'는 영혼을 나타내는 중국어다. 그리고 3G 무선 네트워크와 비슷하게 보이는 스펠링을 이용한 말장난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모드에서 3Qi는 일반적인 LCD 스크린의 5분의 1밖에 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킨들이나 다른 유명 e북 리더의 전자 잉크 디스플레이와는 달리 동영상 재생을 포함한 일반적인 LCD 스크린의 기능을 모두 구현한다.

젭슨은 보스턴 북 페스티벌의 강연에서는 "디스플레이야 말로 독서의 미래입니다"라고 말할 것이지만 아론슨에게는 더욱 직설적인 말을 했다. "책은 이제 끝났어요." 이 같은 말은 독서가 끝났다는 게 아니다. 식물의 시체로 만들어진 매체, 즉 종이의 시대가 끝났다는 소리다.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 1~9월 사이 팔린, 다운로드 가능한 e북(전자책)의 규모는 1억1,250만 달러에 달한다. 이는 5년 전 같은 기간의 720만 달러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 난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06년 소니의 리더 디지털북, 2007년 킨들의 등장 이후 미국 내에서 e북 리더의 판매량은 매년 2배로 뛰고 있다. 2008년 에는 100만대, 2009년에는 300만대, 올해에는 600만대가 팔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2018년까지 전 세계에서 무려 7,700만 대의 e북 리더가 팔릴 것이라고도 한다. 현재 쓰이는 e북 리더가 단일 용도에만 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믿기 힘든 수치다.

하지만 랩톱의 LCD 스크린과 e북 리더 디스플레이의 장점을 모아 만든 저렴한 단일 스크린 패키지, 즉 스위치 조작 한 번으로 고화질 컬러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던 랩톱이 태평양 횡단 비행기 내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을 적게 소모하는 e북 리더로 변하는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계산에 넣는다면 얘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랩톱은 간단한 평면형 터치스크린이 되는 것이며,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e북 리더의 상식도 완벽히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된다. 이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 속에 미래의 전자제품이 숨어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젭슨은 미래의 역사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젭슨의 3Qi 외에도 첨단기능을 갖춘 제품은 많다. 그리고 조만간 디스플레이 업계의 선두주자들이 내놓은 다양한 신제품을 보게 될 것이다.

휴대폰 칩 업계의 거두인 퀄컴, 현재 e북 리더용 디스플레이 업계의 선두주자인 E잉크, 이 외에도 여러 대기업이 2011년에 e북 리더용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선보일 것이다. 하지만 젭슨의 3Qi는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저렴하게 발매되는 제품이 될 것이다.

젭슨의 회사인 픽셀 치(Pixel Qi)는 실리콘밸리와 타이베이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조만간 수백만 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젭슨은 아직 시장에서 높은 인지도를 얻지 못했지만 그녀는 3Qi가 넷북, 태블릿 PC, e북 리더 등에 사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넷북이란 이메일, 채팅 등 비교적 간단하고 기본적인 인터넷 위주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값싼 랩톱을 말한다. 3Qi는 현재 수천 대 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젭슨은 이날 아론슨에게 3Qi를 미리 보여주었는데, 병원 대기실을 지키고 있는 동안 핸드백에서 이를 다시 꺼내보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이 제품의 흑백모드는 마치 신문을 읽는 것만큼이나 보기 편하다는 것을 아론슨은 알고 있다. 각 픽셀의 흑백 부분이 매우 크고, 작은 픽셀 부분 중 일부는 개별적으로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흑백 해상도는 1인치당 200도트에 달한다.

이는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아론슨은 젭슨이 뭔가 거대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젭슨은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의 심각한 건강문제에 시달리면서도 아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디스플레이 업계의 대형 회사들과 경쟁을 하고 있다. 그녀는 시장 개척에 바빴고, 밖에서 심하게 시달렸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에 비해 비교적 여유롭게 MRI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MRI 촬영을 마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무실을 이렇게나 오래 비워 본 것은 처음이군요."

예술과 엔지니어링의 결합

치료를 받아 활력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젭슨은 항상 차분하고 긍정적 이다. 특히 수십억 달러 규모의 디스플레이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 고 있는 여성치고는 말이다.

그녀는 업무시간에 몰려오는 끊임없는 고객의 요구에도 사무적으로 대하며, 절대 스트레스를 받은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컨퍼런스에 참여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타인의 이목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녀는 예전에 치료 후 기생충 감염을 막기 위해 마치 해적 선장처럼 안대를 한 채 자신의 업무 모습을 담은 여러 편의 웹 비디오를 촬영한 적이 있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고도 매우 편안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44세의 젭슨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재미와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며, 예술과 엔지니어링이 결합된 흔치 않은 경력을 쌓아왔다.

코네티컷 주 윈저에 살던 농부의 딸인 그녀는 엄지공주 같은 동화책에 나오는 입체그림을 좋아한 나머지 편광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원 리를 배우게 됐다. 또한 그녀는 밤을 새워 라디오를 분해해보고, 짧은 소설을 썼으며, 목탄화를 그렸다. 그녀는 6학년 때 미적분도 독학했다. 그녀의 부모는 항상 돈 문제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자동차 엔진을 수리했지만 업소에 화재가 나서 다 태워먹었다. 그 다음에는 정계에 입문하고자 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매우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전기공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대학에는 가고 싶었죠. 그리고 전기공학을 전 공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요."

젭슨은 브라운 대학 1학년 때 엔지니어링과 예술을 융합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홀로그램을 제작하는 방법을 배운 것. 홀로그램은 레이저 광선으로 2차원 평면에 3차원 입체를 묘사하는 기술. 즉 2개의 레이저 광선에 의한 간섭효과를 이용, 필름에 0.2~0.3㎛의 깊이로 홈 을 새기는데, 이 미세한 홈 때문에 빛의 굴절이 달라져 보는 각도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색깔과 형태가 달라진다. 따라서 마치 3차원의 영상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녀는 홀로그램 제작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MIT 미디어랩에서 석사 학위를 땄는데, 거기에서 매우 혁신적인 3D 비디오 시스템의 개발을 돕는다. 우연히도 이 3D 비디오 시스템은 1991년 파퓰러사이언스에 소개됐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엔지니어링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가끔씩은 오스트레일리아 지폐에 보안용 홀로그램을 장치해주는 등 실 용적인 일을 하기도 했다. 또한 순수 예술적인 일도 했다. 독일 쾰른시의 한 블록 전체를 로마시대의 목욕탕 풍경을 담은 20m 크기의 홀로 그램으로 뒤덮은 것.

199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의 태양반사경군을 사용해 달 표면에 영화를 영사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달을 숭배하는 여러 종교에서는 이런 아이디어를 신성한 달을 훼손하는 짓으로 생각했고, 그들의 반대를 감안한 젭슨은 이 아이디어를 철회했다.

그녀는 20대 중반을 보내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찰과상이 낫지 않았고, 에이즈 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신장질환이 나타났다. 그녀는 프리랜서 홀로그래퍼이었기 때문에 건강보험이 없었고,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광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브라운 대학에 갔다. 상급 학위가 있어야 남자들뿐인 전자업계에서 더 높은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하지만 학업 도중에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 되는 것을 알았다. "저는 맹인이 돼가고 있었고, 게다가 휠체어까지 타야 했어요. 남은 인생을 부모님과 같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의사들이 그녀의 뇌하수체에서 호르몬을 파괴하는 종양을 발견 해냈다. 뇌하수체란 뇌의 정중앙부 하단에 위치한 신체기관으로 주요 기능은 다양한 호르몬의 분비다. 그녀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수년만의 일이었다. "의사들은 콧구멍을 통해 종양을 제거했어요."

종양을 제거한 젭슨은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동안 시간에 맞춰 약을 먹어야 했다. 종양 부분에서 원래 생산하던 호르몬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이 약의 복용으로 인해 인생에서 매우 큰 긴박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12시간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 다고 할 경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디스플레이의 새로운 정의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9년을 보낸 젭슨은 MIT 교수 임용에 도전했다. 그녀를 면접한 교수 중에는 네그로폰테도 있었다. 젭슨과 네그로폰테 는 죽이 잘 맞게 됐으며, 이를 통해 OLPC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네그로폰테는 그녀를 유럽에 파견, 기술계의 지도자들과 만나게 했다. 그녀는 OLPC의 LCD 스크린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이 프로젝트의 실현을 도왔다.

마이클 보브는 MIT 미디어랩의 기술자문으로 젭슨이 대학원에 다 니던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만 LCD 스크린 제조회사 및 엔지니어들은 매우 저렴한 랩톱을 만들자는 젭슨의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없다고 믿었어요. 젭슨은 그들과 큰 싸움을 벌였지요."

개발도상국에 저가형 랩톱을 대량 보급하는 일이 과연 인도적인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OLPC 프로젝트의 효과는 부정할 수 없다. 즉 최소한의 구성요소만 갖춘 넷북을 만드는 모험을 가능케 했다는 것. 넷북은 현재 랩톱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비영리기구인 OLPC가 100달러는 넘지만 200달러는 안 되는 랩톱 XO-1을 만들어내자 거의 모든 컴퓨터 제조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소형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에이서, 아수스, HP 등의 컴퓨터 제조회사들은 연간 4,000만대의 넷북을 출하하고 있다.

물론 넷북이 처음 선보인 것은 지난 2008년 3월 인텔이 자사의 프로세서인 아톰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사용한 컴퓨터가 최초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넷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고, 인터넷 이용에 특화된 저가의 랩톱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지난 2005년 1월 선보인 XO-1이 이 같은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랩톱이었다. 값이 싸고 성능이 한정적이면서 인터넷이나 전자책 열람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었던 것.

젭슨은 2008년 초 OLPC를 그만두었다. 디스플레이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그녀는 자비(自費)와 그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모아 둔 80만km의 마일리지를 활용해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인 3Qi의 개발을 시작했다.

개발의 출발점은 OLPC 랩톱의 LCD 스크린. 이 LCD 스크린은 전기가 귀한 지역에서 사용하기 위해 소비전력을 적게 하고, 소비전력이 적은 만큼 배터리의 사용시간이 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젭슨은 남편인 존 라이언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곤 한다. 남편은 이동통신 컨설턴트인데, 자기 일보다는 아내의 프로젝트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아내는 그를 최고 운영책임자에 임명했다.

벤처자본을 확보한 후 그녀는 캘리포니아 샌 브루노의 유튜브 맞은편에 있는 사무실을 빌렸다. 사무실의 탕비실은 액정을 가지고 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실로 꾸며졌다. 젭슨은 여기에서 LCD 스크린을 통해 더 많은 빛을 받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녀의 연구팀은 점점 커갔다. 젭슨의 말에 따르면 이 연구가 마무리됐을 무렵 OLPC 랩톱의 LCD 스크린에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흑백모드에 대한 기본적 아이디어 하나 뿐 내부의 모든 레이어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OLPC 랩톱인 XO-1의 LCD 스크린은 반투과 방식을 이용한 컬러 모드는 물론 반사 방식을 이용한 흑백모드 모두를 지원하도록 설계 되 어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랩톱을 주는 것만큼 멋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중요한 일이랍니다." 그녀의 회사인 픽셀 치가 커가는 것과 비례해서 OLPC의 랩톱에 들어갈 LCD 스크린 제작단가는 떨어질 것이다. 그럴수록 젭슨의 기술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

젭슨은 아직도 픽셀 치의 기술부문 업무에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사무실에 있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타이베이의 제조공장을 찾아가 생산을 감독하거나 앞으로 그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사용할 회사와 접촉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이 일 때문에 1년에 무려 50만km를 비행했다.

그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 설계는 분명 큰 이점을 갖고 있지만 제품을 파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디스플레이 서치의 랩톱 분석가 존 제이콥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행위는 어떻게 보면 에스키모한테 얼음을 팔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얼음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젭슨은 최후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놀라운 기술 전도사인 것이다.

그녀는 픽셀치를 설립한 이후 한 달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돌면서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다. 중국에서 텍사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터 제조회사가 그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를 쓰도록 설득하는 것. 어떤 컴퓨터 제조회사 사장이 픽셀 치를 '오늘 있다 내일 사라질 업체' 라고 비하하면 그녀는 OLPC에서 내준 납품 자격 인증서를 보여 준다.

"대체 어떤 회사가 생산을 시작한지 1년도 안 돼 100만대의 제품을 출하할 수 있나요? 그런 회사가 있을까요? 아무데도 없지요. 그런 회사는 없어요. 우리 회사는 이미 100만대에 달하는 납품 자격 인증서를 받았어요. 이 정도면 믿으셔야죠."

거물기업을 상대로 한 일전

타이베이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 제조공장을 찾아가는 젭슨에게는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가 온다.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 공장바닥에 누워 잘 때도 있다.
사실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 하나에 들어가는 레이어를 만들려면 100가지가 넘는 기계가 필요하다. 또한 픽셀 치가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가령 작업실의 먼지 몇 점 이 자재를 오염시킬 수 있으며, 한 회 생산 물량의 액정이 이전 것과 규격이 다를 수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문제가 생길 때면 젭슨은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 "시간은 없고, 비운 커피 잔 수는 늘어가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엄청난 중압감을 이기고 일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날들이 행복 합니다. 이럴 때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멈추지 않고 리듬에 맞춰 일을 해내는 그녀의 능력은 소리 없지만 힘 있게 일을 추진하는 성격에서 기인할 것이다. 또한 뜻밖에도 그녀 가 앓고 있는 질병에서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

수술로 뇌하수체가 망가진 탓에 그녀의 몸에서는 인체의 생체시계 를 조절하는 호르몬인 코티졸이 생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제트랙 때문에 고통 받는 일이 없고, 호르몬 약을 먹자마자 졸음이 사라진다. "저의 약한 건강이 장애가 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큰 이점이 되기도 합니다. 장래에는 회사의 중역들이 일부러 뇌하수체 제거수술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이 같은 행보는 어떻게 보면 꼭 필요한 것이다. e북 리더 시장은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e북 리더용 디스플레이 사업에 뛰어 든다는 것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대신할 새로운 운영체계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차적인 경쟁상대는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를 통해 이 업계를 일으켜 세우다시피한 E잉크다. E잉크의 시장점유율은 무려 90%에 달한다. 지난 1997년 MIT 미디어랩에서 분리돼 나온 이 회사는 킨들을 포함, 현재 쓰이는 대부분의 e북 리더에 디스플레이를 공급하고 있다.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는 입자의 전자기적 성질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인쇄된 글자의 형태를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전자 잉크는 둥근 모양으로 된 수백만 개의 초소형 캡슐로 이루어져 있다. 초소형 캡슐은 투명한 외피 속에 푸른 염료와 조그만 칩이 담겨 있으며, 전극으로 불리는 두 겹의 전도체 사이에 위치한다.

초소형 캡슐은 투명한 전도체 사이에서 마이너스 전기를 받으면 흰색으로 변하고, 플러스 전기를 받으면 검은색으로 변해 글씨가 새겨진다. 글씨는 전류에 변화가 생길 때까지 유지된다. 즉 페이지를 전환할 때만 전류를 소모한다는 뜻이다.

이는 같은 페이지를 짧아도 수분 동안 들여다봐야 하는 전자책에 이상적이다. 하지만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는 흑백 이외에 다른 색상이 없고 동영상 재생도 안 된다.

젭슨과 경쟁사들은 E잉크는 물론 서로의 제품에 정면승부를 걸고 있다. 3Qi 외에도 색상과 동영상 재생은 물론 천연색 모드에서도 전력 이 많이 사용되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디스플레이를 올해 안에 출시하겠다는 회사도 여럿 있다.

퀄컴에서 만든 미라솔은 작은 금속조각을 움직여 픽셀을 만든다. 이 금속조각의 직경은 몇 ㎛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빛의 파장과 색상에 맞춰 위아래로 움직인다. E잉크의 전자잉크 디스플레이와 마찬가지로 백라이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미지를 변화시킬 때만 전력 을 소비한다.


필립스에서 분리된 리쿠아비스타는 올해 말 전력이 적게 드는데다 동영상이 재생되는 흑백 디스플레이를 생산할 예정이다. 천연색 디스플레이는 내년 말에 나온다. 이 제품은 일렉트로웨팅이라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LCD의 액정을 전력소비가 없는 물속의 기름방울로 대체한 것이다.

기득권자인 E잉크도 올해 하반기 천연색 버전을 출시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디스플레이를 실험하고 있으며, 이 제품 역시 수년 내 생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쟁사들의 발 빠른 움직임에 대해 젭슨은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이들 제품 가운데 현재 출하 가능한 건 하나도 없어요." 더구나 그녀의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는 경쟁사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뛰어나다.

실제 3Qi는 기존 LCD 스크린의 설계를 개선한 것이기 때문에 연 간 15억대의 LCD 스크린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자재와 기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 결과 10인치 규모의 3Qi를 장착한 넷북은 일반적 인 LCD 스크린을 장착한 넷북보다 훨씬 저렴하다.

디스플레이 성패 관건은 가독성



하지만 3Qi의 성공 여부는 제품을 써 본 사용자들의 판단, 그 중에서도 가독성에 좌우될 것이다. 백라이트를 사용하는 LCD 스크린은 한동안 유저의 눈에 직접 조명을 비추기 때문에 피로를 가중시킨다는 속설이 있었다. 반면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는 반사광을 사용하기 때문에 눈에 피로를 덜 준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VCD 사이언스의 디스플레이 컨설턴트이자 인포메이션 디스플레이 협회의 회원인 루 실버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빛은 다 같은 빛일 따름입니다. 사람의 눈은 어떤 것이 반사광이고 어떤 것이 발산광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반사광이란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 에 반사된 것을 말하고, 발산광이란 직접 망막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다만 빛을 내보내는 방식은 다르다. 전자잉크 디스플레이에 있는 초소형 캡슐은 마치 인쇄용지처럼 여러 방향으로 빛을 분산시킨다. 하지만 LCD 스크린의 경우 특정 각도로만 빛을 내보낼 뿐이다. 이에 따라 그 모습은 종이처럼 어떤 각도에서 봐도 한결같지는 않다.

젭슨의 연구팀은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해 3Qi의 반사 각도를 조절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LCD 스크린이기 때문에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만큼 인쇄물에 가까운 질감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는 얘기가 달라질지 모른다. 라이언의 말에 따르면 픽셀 치의 진정한 목표는 "미래의 디바이스는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을 던지고 자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현재와 같이 휴대폰, 넷북, e 북 리더 등 3가지 디바이스를 동시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은 별로 편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킨들과 같은 e북 리더는 인쇄용지와 동일한 수준의 독서를 할 수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컴퓨팅을 지원하는 디바이스로 가기 위한 전환기적 제품일지 모른다. 3Qi 역시 전환기적디스플레이며, 궁극적으로 디바이스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촉매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현재의 3Qi를 개량하기 위한 단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이브리드 디스플레이의 효율을 더욱 높이고, 여러 가지 사이즈로 만드는 게 바로 그것이다. 사업가로서 젭슨을 움직이는 힘은 과거 홀로그램을 독일 도시에 영사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들이 즐기는 이미지야말로 그동안의 고된 기술적 작업에 대한 보상입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