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금고털이 범인은 흰개미

[재미있는 과학상식]

TV프로그램 CSI 과학수사대는 범죄수사 드라마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특히 길 그리섬 반장은 법곤충학 전문으로 시체에 붙어있는 파리에서도 단서를 찾아낸다. 그런데 그리섬 반장도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2008년 1월 29일. 인도의 한 노인이 자신의 개인금고가 있는 은행을 방문했다. 노인은 3년 전 개인금고에 보석·현금·채권을 보관했는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보석은 그대로 있었지만 현금과 채권이 사라진 것. 은행에 화재가 난 적도 없고 금고 자물쇠에 손을 댄 흔적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훔쳐갔을까.

범인은 바로 흰개미였다. 흰개미들이 개인금고 속에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경찰은 범인으로 흰개미를 지목한 것이다. 그렇다면 흰개미들은 지폐와 채권을 어디로 옮긴 것일까. 바로 먹어 치운 것이다.

개미와 달리 흰개미는 지폐를 좋아한다. 지폐는 단순한 종이가 아닌 면섬유로 만든다. 물론 흰개미가 주식으로 삼는 것은 지폐가 아니라 오래된 나무 기둥이다.

목조 문화재도 흰개미의 공략 대상이다. 목재 문화재는 오랫동안 보존하기가 쉽지 않지만 문화재에 대한 선조들의 애착이 남달랐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탈 없이 전해 내려왔다. 건물 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 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해온 것.

그런데 개발에 따른 주변 환경의 변화,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흰개미가 서식하기에 알맞은 습도와 먹이를 제공, 전국의 목조 문화재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 약사전에 있는 지름 50cm, 높이 3m의 기둥 여덟 개 중 다섯 개가 이미 흰개미의 습격을 받았다.

이곳뿐만 아니라 전남 무위사, 전북 선 운사, 충남 마곡사, 충북 법주사, 경북 은해사, 강원도 오죽헌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목조 문화재 69곳 가운데 33곳이 피해를 입었다. 고문서와 서적까지도 피해 대상이다.

흰개미는 이름만 개미일 뿐 개미와 다르게 생겼다. 개미는 허리가 잘록하고 더듬이가 구부러져 있다. 하지만 흰개미는 허리가 두루뭉술하고 더듬이가 곧다. 단지 하얗고 조그마한 것이 개미처럼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흰개미라고 한다. 흰개미는 곤충강 흰개미목에 속하고, 개미는 곤충강 벌목에 속한다.

물론 흰개미는 여왕개미, 일개미, 병정개미가 있는 사회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개미와 흡사하다. 하지만 개미와 달리 여왕 외에 왕도 존재한다. 천적으로는 침팬지, 땅돼지, 개미 등이 있다. 땅돼지의 몸은 돼지와 비슷하고, 머리는 가늘고 길다.

주둥이는 원통형이며, 혀는 길어서 30cm까지 입 밖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개미는 흰개미의 번식에 필요한 여왕개미까지 죽이는 무서운 천적이다.

흰개미가 섬유질을 좋아하는 까닭은 소화기관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 때문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흰개미의 소화기관에서 셀룰로오스를 당분으로 분해하는 효소를 배출하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이 효소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면 목재를 분해, 에탄올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바이오 에탄올은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미래 에너지이지만 최근에는 세계적인 식량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주로 곡물에서 생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흰개미 소화기관 속의 미생물을 키울 수 있다면 목재에서 많은 양의 바이오 에탄올을 생산할 수 있다.

흰개미는 약 2억 년 전 지구에 나타났다. 바퀴벌레 같이 흰개미 역시 살아있는 화석인 셈이다. 흰개미는 원래 죽은 나무를 먹어치우는 생태계의 청소부 역할을 하는 이로운 존재였다.

자료제공: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