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치료제도 효과가 없었던 악성 간암 환자 19명이 작년 4월부터 한 실험용 약을 처방받았다. 이 약은 간암의 생식에 반드시 필요한 단백질의 생성을 막는다. 약효는 복용 후 몇 주가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이런 치료 속도는 암 치료제로서 매우 고무적 결과다.
특히 이 약은 범용성이 높다. 약간의 재설계만 거치면 수백 가지 질병의 치료제로도 활용 가능하다. 줄기세포나 유전자 요법으로도 고칠 수 없었던 질병을 정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미국의 생명기술기업 앨나일램은 지난 6월 자신들이 개발한 'ALN-VSP'가 간암 환자 19명의 종양에 공급되는 혈류량의 62%를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는 지금껏 자주 활용되지 않았던 인체의 방어체계를 작동, 이 같은 성과를 얻었다.
기존의 약들은 질병에서 생성되는 단백질을 막는 정도지만 ALN-VSP는 RNA 간섭(RNAi) 요법을 통해 세포 자체의 단백질 생성을 원천봉쇄하는 것. 이 방법은 암 뿐 아니라 다른 질병의 치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생물화학자이자 앨나일램의 최고경영자인 존 마라가노어 박사는 이를 싱크대에 물이 넘치는 상황에 비유한다. 지금까지의 약이 흘러 넘친 물을 퍼내는 것이라면 RNAi 요법은 수도꼭지를 잠궈 원천적으로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다르게 비유하자면 DNA가 단백질의 설계도라 할 때 RNA는 이 설계도를 보고 단백질을 만드는 생산자다. RNA는 DNA 유전자의 한 줄짜리 요약본이라 할 수 있는 'mRNA'를 만드는데 이 mRNA가 세포에 단백질 생산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지난 1998년 원시 미생물들이 단백질 생성을 차단, 외부 바이러스의 이중 가닥 RNA와 mRNA를 없애는 것을 보고 RNAi 요법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이를 즉각 인간에게 적용하지는 못했다.
포유류의 면역체계는 RNAi 방식의 방어체계를 사용하지 않는 탓이다. 이에 연구자들은 시점을 바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척추동물이 RNAi로 mRNA 활동을 제어하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중 가닥 RNA 조각을 결합하면 RNAi가 특정 단백질의 생산을 선택적으로 멈출 수 있음을 발견했다.
RNAi로 많은 질병의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예측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대상에는 인류 최대의 적인 암도 포한된다. 암 역시 단백질의 과다생성이 원인인 까닭이다.
이론상 RNAi를 활용한 암세포 생식 억제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ALNVSP의 합성 이중 가닥 RNA가 VEGF와 KSP라는 단백질을 만드는 종양 mRNA를 제거한다. 이중 VEGF는 원래 새 혈관을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암세포가 과다 생산하는 단백질로서 이것의 생성을 막으면 암세포는 영양 공급원이 사라져 사멸하게 된다.
실제로 연구자들이 ALN-VSP의 합성 RNA를 간세포에 투입하자 인체의 RNAi 시스템이 합성 RNA와 종양을 유발하는 mRNA를 모두 파괴했다. 이는 곧 암세포에 대한 영양 공급 차단으로 이어져 암세포는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
미국 듀크대학의 분자생물학자 브루스 설렌거 박사는 "우리는 RNAi 요법으로 2만종의 유전자 발현을 멈출 수 있다"며 "남은 과제는 다른 세포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타깃세포만 정확히 공격하는 약의 개발"이라고 밝혔다.
다만 연구자들은 이 약물이 정상 세포의 정상적 단백질 생산을 방해하거나 약품이 표적에 도달하기 전에 인간의 면역체계에 의해 파괴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앨나일램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약물을 지방으로 감싸 주성분이 간에 확실히 흡수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주사 대신 혈관으로 약품을 투입해도 약효가 발현될 확률을 높인다.
단일 유전자만 공격하는 이 요법 덕분에 아직도 별다른 치료법이 없는 암 유전자 중 75%를 공격할 수 있으며 암 외의 다른 질병의 치료에도 혁신이 예견되고 있다.
일례로 앨나일램은 헌팅턴병과 세포배양 시 콜레스테롤 수치가 대폭 증가하는 증세를 완화시키는 실험을 진행 중이며 시력감퇴, 근육성 이영양증, 에이즈 등의 치료에 RNAi 요법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형 제약사들도 RNAi 요법 프로그램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시티 오브 호프병원의 분자유전학자 존 로시는 RNAi 요법의 접근방식이 비교적 간단하다는 점을 들어 향후 2년 내 일선현장에 도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앨나이램은 앞으로 36명의 환자를 ALN-VSP 임상실험에 추가 투입할 계획이며 투약량도 늘릴 계획이다. 로시는 "RNAi 요법은 질병 치료의 혁신"이라며 "설령 이것이 간암에만 효과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누릴 혜택은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