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2일] 불타는 호떡집


호떡 집에 불이 났다. 왕서방의 비단 가게도 주서방의 청요리집도 불탔다. 1931년 7월 조선 전역에 불어 닥친 화교(중국인) 배척 운동 탓이다. 사망자만 127명, 중경상자는 393명에 달했다. 발단은 중국 지린(吉林)성 만보산 지역에 장거리 농업용수로를 건설하던 조선 농민들과 중국인들과의 충돌. 농업용수로가 콩밭을 망친다며 중국 농민 400여명이 일부 구간을 파괴하고 조선 농민들과 육탄전을 벌이자 7월 2일 일본 경찰이 나섰다. ‘탕 타당 탕.’ 일경이 발사한 총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나 문제는 국내 신문의 오보. 만주 동포 200여명이 중국인들에게 살상 당했다는 호외가 나간 후 조선 전역에 ‘동포의 원수를 갚자’는 광풍이 휘몰아쳤다. ‘호떡 집에 불 났다’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 ‘만보산 사건’이 왜곡됐으며 화교 배척으로 재중 동포들의 처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민족지도자들의 설득이 먹히기 시작한 7월 중순까지 중국인들과 만주지역의 조선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핍박을 당했다. 두 민족의 피해 속에 이득을 챙긴 세력은 일본. 조선과 중국 민족의 단합을 우려했던 일본은 테러를 방관했을 뿐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트럭을 동원해 군중을 부추기는 잔꾀까지 부렸다. 평양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도 일경의 개입 탓이다. 조선과 중국민족을 이간질한 만보산 사건 두 달 보름 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제의 주구가 되려는 조선의 젊은이도 늘어났다. 중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감정도 갈수록 나빠져갔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1932년 4월) 이전까지 조선인들은 중국 땅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가해의 역사이기에 애써 눈감아 온 만보산 사건 77주년. 오보와 왜곡, 친일, 집단적 광기의 망령에서 이제는 자유로울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