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기자들과 만나 중국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에 대해 “카드라는 것은 일단 쓰면 카드가 아니다”라며 “제소할 건가, 안 할 건가는 옵션으로 항상 갖고 있지만 어떤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지 아주 세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WTO 제소와 관련해서는 여러 시나리오와 우리나라의 득실을 따져야 하지만 옵션으로는 항상 갖고 있다는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중국에 쓸 수 있는 카드 한 장은 들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김 본부장의 말이 나온 지 하루 만에 이를 뒤집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에 따른 중국 정부의 경제보복 문제로는 WTO에 제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하루 전인 13일 만해도 중국의 사도 보복 가운데 국제규범 위반 소지가 있는 조치들에 대해서는 WTO 제소 같은 통상법적 대응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던 정부다. 더욱이 산업부는 3월 복수의 법무법인으로부터 중국의 사드 보복이 WTO ‘최혜국대우’ 규정 위반이며 이를 제소할 경우 승소 가능성이 있다는 자문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졌다.
정부 안팎에서는 청와대의 통상전략 뒤집기를 두고 해석이 엇갈린다. 청와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협조라는 이유를 들기는 했지만 굳이 별도의 사안을 두고 청와대에서 브리핑까지 할 이유는 없는 탓이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의 반발 탓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의 꼬리 내리기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이날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우리나라의 산업부가 WTO 같은 각종 통로로 중국에 사드 보복 조치를 철회하도록 요구하고 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만약 한국이 WTO에 제소하려 한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현재로서는 중국 정부 차원의 요구가 있었는지는 확인이 어렵지만 13일 발표에 대한 중국 내 반발 기류가 거세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WTO 제소 카드를 유지하던 정부가 갑자기 이를 제외한다고 하면서 그동안의 정부 노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돼 버렸다”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의 대응에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처음부터 WTO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인데 이를 과도하게 쓰려고 하다가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국 정부가 나선 게 아니라 민간이 주로 보복을 하는 상황이라 국제법 적용이 안 되고 반한 감정을 건드리면서 나갔던 부분인데 정부가 처음에 간파를 못 했던 것”이라며 “중국이 우리 정부가 예측한 대로 가지도 않고 실제 해당 카드를 쓸 수도 없어 WTO 제소를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 몰고 갔다”고 강조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전문가들은 우리 외교에 큰 구멍이 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 논란이 많은 사드 한반도 배치 때도 미국에 통화스와프 같은 반대급부를 받았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중국의 보복만 불러왔고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협의할 때도 보상금 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중국을 WTO에 제소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이냐는 주장이다. 실제 정부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에도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가하면서 사드 보복 문제 등은 별도로 거론조차 못 하는 실정이다.
반면 주변국인 일본은 북핵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와의 공동대응 방침에도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에서는 뒤로 물러나거나 손해 보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말이다. 외교에서 철저히 자국 실리를 챙긴다는 것이다. 결국 국내 기업은 정부가 WTO 제소 카드를 버리면서 사실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전직 통상교섭본부의 고위관계자는 “WTO 제소를 하겠다 하지 않겠다는 생각 모두 다 우리가 갖고 있는 카드인데 왜 이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지 이해가 어렵다”며 “북핵 문제와 관련해 다른 딜(거래)이 있었다면 그만한 성과를 얻었음을 보여줘야 하는데 국민들 입장에서 이 부분은 알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다.
/세종=김영필·강광우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