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 선언을 다시 꺼내들었다.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기를 제안”한다면서 “한국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종전 선언을 이뤄낼 때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문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종전 선언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고 한다. 북한은 지난달 핵 물질 생산을 위한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한 데 이어 이달 들어 사거리가 1,500㎞에 달하는 신형 순항미사일과 열차에서 발사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쏴올렸다. 이런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뜬금없이 종전 선언을 또 외친 것이다.
종전 선언의 기원은 십수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간 정상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07년 9월 시드니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 계기 양자회담 이후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를 폐기하면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즉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이를 검증하는 조건으로 정전 상태에 있는 한국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내는 평화협정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 구상이 거두절미하고 ‘종전 선언’으로 명명돼 그해 10월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3자 혹은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2018년 판문점선언에 다시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한다”는 조항으로 포함됐다. 원래 있던 검증 가능한 북핵 폐기 조건과의 연관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북한이 핵시설을 재가동해도, 미사일을 발사해도 이 정부는 막무가내로 나가는 것이다.
정작 북한이 종전 선언에 얼마나 매력을 느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 이틀 만에 북한은 두 개의 담화를 내놓았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했지만 리태성 외무성 부상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수백 번 종전 선언을 해도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북한의 이중적 태도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미국이 종전 선언, 연락사무소, 인도적 지원 등 온갖 인센티브를 제시했지만 북한의 관심사는 오로지 제재 해제뿐이었다. 북한에 종전 선언은 자신들의 요구 조건에 맞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뜻이다.
미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의 제안에 대해 “종전 선언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데 열려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 선언이 정전 체제, 유엔사, 주한미군 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 내는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존 볼턴 전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2018년 싱가포르 회담에서 종전 선언의 대가로 북한의 모든 핵 무기,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신고를 요구하려 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다. 미국에 종전 선언은 비핵화 레버리지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은 모호하다. 아마도 자기를 빼놓고 하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돕기 위해 북한을 열심히 설득할 생각도 없을 것이다.
임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애써 축소하면서 아무도 관심 없고 시기도 생뚱맞은 종전 선언이라는 평화 놀음에 매달리는 행태가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