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도입 논의에 불씨를 지핀 가운데 공을 넘겨받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의 절대다수가 유보 입장을 보였다. 집권 여당의 책무를 넘어 당 운영에도 ‘윤심을 따라가는 데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거구제 개편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견을 모으는 게 대단히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험로를 예고했다.
서울경제가 4일 국회 정개특위 위원 17명 중 15명에게 현행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방안에 대한 찬반을 물은 결과 국민의힘 소속 위원 8명 중 7명이 판단을 유보했다. 7명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도부와의 협의가 우선이다” 등의 신중한 태도를 나타냈고 1명만 “승자 독식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며 찬성했다.
반면 조사에 응한 야당 소속 위원 7명 중 6명은 선거구제 개편에 찬성했다. 6명 중 3명은 중대선거구제에 힘을 실었고 3명은 현행 제도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1명은 남인순 의원으로 “위원장으로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고 답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은 2명이다.
윤 대통령의 의중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신중론을 유지하는 것은 의석을 대거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중대선거구제 도입 시 ‘보수 텃밭’ 영남이 흔들리는 게 불가피한데 과연 손해를 본 이상의 의석을 수도권과 호남에서 확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모습이다.
국민의힘의 A 위원은 “중대선거구제는 조심히 접근할 문제”라며 “영남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있지만 호남에서는 국민의힘의 지지 기반이 없다. 수도권에서 (잃은 의석만큼을) 얻을 수 있을지도 지켜볼 문제”라고 말했다.
영남권 의원들의 저항, 공천을 둘러싼 내부 갈등, 지역 대표성 훼손 등 협의 과정에서 난관이 수두룩하다는 현실론도 반영됐다. 이 때문에 2024년 총선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사실상 어렵다는 전망도 나왔다. 국민의힘의 B 위원은 “총선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선거구제를 흔들면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라면서 “2028년 총선 때 대도시에서 부분적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며 속도 조절을 제안했다.
여당의 미지근한 반응은 그간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여당은 3대 개혁,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원칙적 대응 등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천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당 지도부 인사들도 윤심을 얻은 후보들을 사실상 추대하는 방식으로 선출해왔다. 십수 년간 정치적 구호에 그쳤던 정치 개혁 논의가 올해는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윤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여론 조성을 주도해왔던 친윤계도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보수 지지세가 강한 영남·강원에 지역구를 둬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유력한 만큼 리스크를 만들지 않겠다는 판단으로 읽힌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이 선거구제를 던진 배경을 두고 여당은 혼란스러울 것”이라며 “친윤계 당권 주자들의 약점인 ‘수도권 경쟁력’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야당은 이례적으로 윤 대통령의 의지를 반겼다. 야당 위원들은 윤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매우 고무적”이라며 호응했다. 다만 개편 방식에 대해서는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으로 갈렸다.
주 원내대표는 여당 소속 정개특위 위원들과 논의의 첫발을 뗐지만 협의가 길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가급적 중대선거구제로 옮겨갈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보자는 이야기가 있었다”면서도 “의견을 모으는 것이 대단히 어렵겠다는 느낌도 들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