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라쇼몽 효과’에 빠진 일본 정부

노현섭 국제부 기자

국제부 노현섭 기자



“세계무역기구(WTO) 상급위원회는 중요한 쟁점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았으며 분쟁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24일 일본 중의원 특별위원회에 참석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앞서 WTO 상소기구가 예상을 깨고 한국 정부의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의 수입금지 조치가 타당하다는 판정을 내린 데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며 “일본은 WTO 개혁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국의 승소로 끝난 한일 수산물 분쟁을 놓고 일본 외교당국이 보이는 태도에는 사실을 숨기고 진실을 왜곡하는 이른바 ‘라쇼몽 효과’가 그대로 나타난다. 라쇼몽 효과는 일본 영화계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라쇼몽’에서 따온 말이다. 살인 사건을 두고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그려낸 이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당사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되고 결국 본질마저 흐려 놓는지를 보여준다. 사회학에서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사고의 주관성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에 ‘라쇼몽 효과’라는 용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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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를 둘러싼 분쟁에서 밀린 일본 정부는 ‘정부 책임론’을 피하기 위해 “일본이 패소한 것이 아니다”라며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보다 못한 일본 언론들도 “일본 정부가 사실과 다른 얘기를 주장하며 패소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고 쓴소리를 할 지경이다.

한국의 손을 들어 준 WTO를 매섭게 비판하는 일본의 태도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법원 판결에 대해 ‘국제사회의 룰’을 준수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도 상반된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외교청서에 “한국 측에 의한 부정적인 움직임이 잇따라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며 한일 갈등의 책임을 한국 측에 넘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행동을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혼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본은 스스로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피해자로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한국 등 주변국 환경에 대한 명백한 가해자다. 라쇼몽 효과의 폐해는 반성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남을 탓하거나 사실을 숨기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본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노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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