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직업이 CEO인 70대 혁신 경영인

서두칠 전 동원시스템스 사장의 커리어 장수 비결


서두칠 사장은 아무도 살릴 수 없다던 기업을 살려내 스타가 된 CEO다. 한번이면 운이라 치겠지만 같은 일을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에게 직업이 사장일 수 있는 비결을 들어봤다.
한정연 기자 jayhan@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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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랑어는 항상 빠르게 헤엄친다. 밤낮도 가리지 않는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다. 부레가 없어서 멈추는 순간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경영 자도 마찬가지다. 쉼 없이 전진해야 한다. 혁신이 없는 기업은 심해로 가라 앉기 마련이다.
“휴대폰 번호는 그대로예요. 앞으로 2년 동안은 이 번호 안 바꿀 테니 걱정 마세요.”
부채가 6,000억 원이던 한국전기초자를 3년 만에 순이익 1,700억 원짜 리 우량기업으로 변신시켜 2004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 력 있는 경영인 25인’에 오른 서두칠(72) 사장은 “스마트폰은 없느냐”는 질 문에 이렇게 답했다. 비가 내리던 6월 1일 오전 중구에 있는 힐튼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서 사장은 ‘016’으로 시작하는 피쳐폰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016이 2G(2세대)인데 내가 통신사에 물어봤더니 2013년 12월까지 는 쓸 수 있다고 합디다. 휴대폰 심 SIM을 3G로 바꿔놨으니 2년 6개월은 남았어요. 75세까진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서 사장은 흑자 전환(턴어라운드) 전문가다. 1997년 대우전자부품 사 장을 지내고 대우전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59세였던 그는 마 음속으로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조짐이 좋지 않았다. 외환위기라 는 변수가 갑작스레 닥쳤다. 시장은 혹독한 외부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진정한 리더를 원하고 있었다.
대우그룹은 갓 인수한 브라운관 유리 제조업체 한국전기초자에 서 사 장을 급파했다. 껍데기만 남은 회사였다. 연 매출 2,377억에 부채비율이 1,114%였다. 당시 차입금 3,480억 원이면 외부 지원 없이는 회생이 불가 능했다. 은행 거래조차 안 됐다. 미국 컨설팅업체가 6개월 동안 실사를 한 후 사망 선고를 내린 상태였다. 대우그룹이 가라앉던 무렵이어서 자금 지 원은 꿈도 못 꿨다.
정확히 3년 후인 2000년. 한국전기초자는 국내 700여 개 상장법인 가 운데 영업이익률 1위를 기록했다. 서 사장은 껍데기 회사를 매출 7,104억 에 차입금도 없는 초우량 기업으로 담금질했다.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 불렀다. “대우전자가 내 마지막 커리어라고 느꼈어요. 60세가 되면 은퇴해 야 되겠구나 했지요. 정규과정은 끝난 거니까 한국전기초자 사장직은 덤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마지막 인생길이니 확 뒤집어놨지요.”
서 사장은 이어서 그가 직접 쓴 책 얘기를 꺼냈다. 33쇄나 찍은 베스트 셀러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한국경제신문middot;2006년 간행) 얘기 였다. 그는 “기적은 가만히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며 “우린 회 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그건 기적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그 책의 작명도 서 사장의 솜씨였다.
서두칠 사장은 그 후에도 세상이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일을 두 번이 나 더 했다. 익히 알려진 또 다른 기적은 동원시스템스다. 서 사장은 2002 년 1월 6개월 만에 다시 CEO가 됐다. 통신장비를 만들던 성미전자를 뿌 리로 둔 회사였다. 2000년 이스텔시스템스로 상호를 변경하고 서 사장을 맞은 이 회사는 2005년 동원E&C를 합병하면서 동원시스템스가 되었다.
동원시스템스에 위기가 감지된 건 2000년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선로 장치 ADSL가입자가 폭증하면서부터다. 통신사업자가 요구하는 납기를 못 맞추기 시작했다. 동원시스템스는 많은 물량을 사전 발주해 제품을 확보해 두었다. 하지만 모 통신사가 상당한 계약물량을 임의로 해지하면서 재고 를 떠안게 됐다. 재고자산 평가손실만 400억여 원. 서 사장은 당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요청을 받고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동원시스템스는 차 입금 1,000억 원과 미지급금 200억 원을 쌓아둔 상태였다. 서 사장은“동 원시스템스는 재무적 문제보다는 기업문화에 문제가 많았다”며 “연구팀은 타이밍을 못 맞췄고 영업팀은 고객을 읽는 눈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각 부서를 가르고 있는 파티션의 높이를 자발적으로 줄이게 했 다. 하지만 지시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필요성만 꾸준히 설명했다. 머리 위까지 솟아 있던 파티션 높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데 1년 6개월 가량이 걸렸다. 조직원의 자발적인 참여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그의 지론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서두칠의 리더십은 팔로우 미 Follow me가 아 닌 렛츠 고 Let’s go”라고 정의했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함께 가자’고 외 치는 사람이 서두칠이란 얘기다. 이는 그가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갖춘 인 물로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 사장은 “조직원 마음이 불안하면 안되니 절대 사람을 해고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조직을 안정시킨 후 CEO만 알고 있던 경영 상황을 모 든 조직원과 공유하면 한국인 특유의 끼가 살아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국내 최고 수준의 턴어라운드 전문가가 제시한 비결치곤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실천은 어려운 법이다.
“나는 어떤 기업에 가든 수익을 내기 전까지 월급을 안 받습니다. 한국 전기초자 사장을 하는 4년 동안 서울을 일 때문에 수십 차례 오갔지만, 절대 집에 들르지 않았어요. 월화수목금금금으로 4년을 살았죠. 리더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는 동원시스템스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후 2007년 4월 회사를 나 왔다. 하지만 강의 요청이 빗발쳐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대 등 여러 대 학과 지역 상공회 등에서 기업 혁신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일흔을 넘긴 서 사장의 관록과 능력을 시장이 여전히 원했기 때문이다.
서두칠의 기적은 최근에도 일어났다. 그는 2009년 7월 섬유 가공기계 플랜트 업체인 이화글로텍 CEO를 맡았다. 5~6개만 붙여놔도 40m가 넘 는 엄청난 규모의 기계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열처리를 통해 천 짜는 공 정을 마무리하는 시스템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었다. 당시 이화글로텍은 내리 5년 동안 적자를 내고 있었다. 금융회사들은 신용등급이 트리플C 인 이화글로텍에 외화지급보증은커녕 차입금 회수를 요구했다. 수출업체 로서 사실상 생명을 다해가던 시기였다.
서 사장은 이 만년적자 기업을 불과 6개월 만에 턴어라운드시켰다. 어 떻게 가능했을까?
“현금흐름은 기업의 생명입니다. 안산 공장을 팔고 당진으로 갔습니 다. 늘 하던 대로 일을 진행시켰어요. 사람을 정리할 바에는 차라리 두 배 씩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설득했지요. 모두 잘 따라와준 덕분입니다.” CEO 나 알 수 있던 경영 정보를 주기적으로 공개해 노동강도가 세진 것에 대 해 양해를 구한 것도 서두칠 사장이 한 일이었다. 그는 250억 원 수준이 던 이화글로텍 매출을 13개월 만에 400억 원대로 올려놓았다.
평생직업으로 사장을 선택한 그는 전문경영인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첫 직장에서 최고가 되어야 하고,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갖춰야 하며, 누구와도 말이 통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 사장이 이화글로텍에서 구원투수로 세이브를 하나 더 올린 지는 아 직 1년이 채 안됐다. 당장 맡고 있는 회사는 없지만 구원투수는 매 경기 등판을 준비하며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서 사장은 이 기간 동안 400페 이지에 달하는 영문 논문을 직접 써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기에 처해 있는 기업을 어떻게 혁신시킬 것인가가 주제 였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는 지금도 여전히 현직 CEO로 출격하기 위해 등판대기 중이다.

서두칠 사장의 세컨드 커리어 관리법
1/ 첫 직장에서 최고가 되라
2/ 솔선수범해야 나를 따른다
3/ 모든 정보를 공개해 신뢰를 쌓아라


FO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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