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인간 잡스 CEO 잡스

스티브 잡스 공식 전기에 나타난 그의 삶


스티브 잡스가 혁신한 건 IT기술뿐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을 만들기 위해 맨 먼저 기업과 경영부터 혁신 했다. 잡스는 중앙집권적 기업을 만들어서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기업을 이윤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변화와 혁신의 도구로 삼았다. 기업이 주주와 소비자의 변덕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호했다. 경쟁 기업의 성공방정식을 창조적으로 모방하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미니멀리즘을 바탕으로 한 군더더기 없는 경영으로 경영 그 자체를 예술로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는 불세출의 CEO였다. 기업을 이끌 줄 아는 진정한 리더였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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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직함은 글로벌 씽커 Global Thinker 였다. 1976년 4월 스 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 Steve Wozniak과 함께 애플을 창업했다. 잡스 와 워즈니악은 애플I을 666.66달러에 팔았다. 컴퓨터 마니아들은 애플 I을 짐승의 기계라고 불렀다. 악마의 숫자를 연상시키는 가격 탓이었다. 1977년 잡스와 워즈니악은 인텔의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아마스 클리퍼 드 마큘라한테서 9만 달러를 투자 받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비전과 기술 만 있던 애플에 자본이 들어왔다. 1977년 1월 4일 애플은 캘리포니아 쿠 퍼티노에 정식 사무실을 냈다. 1980년 12월 마큘라의 주도로 애플은 상 장됐다. 스물 다섯 살 스티브 잡스는 일약 억만 장자가 된다.

여기까지였다. 젊은 스티브 잡스는 혁신적인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정작 직원 수는 늘고 주주들의 간섭까지 받게 된 주식회 사 애플은 더 이상 잡스 한 사람만을 위한 회사가 아니었다. 시장은 점점 더 애플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연 건 애플이 었다. 후발주자 IBM이 컴퓨터 시장의 지배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IBM 뒤엔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있었다. 애플한텐 승산이 없었다. IBM이 애 플보다 혁신적이라거나 민첩해서가 아니었다. IBM은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 하면 어떻겠느냐는 스티브 워즈니악의 제안을 거절했던 아둔한 회사였다. 이 제 애플도 IBM처럼 아둔해져 버렸다. IBM을 상대하려면 애플은 좀 더 혁 신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했다. 이미 애플은 주가가 떨어지면 주주들 눈치부터 봐야 하는 관료적인 회사로 변해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주주니 주가니 이윤 이니 하는 것들엔 관심이 없었다. 주주들한테 기업은 투자금을 불려주는 도 구였지만, 잡스한테 기업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키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시대는 잡스의 편이 아니었다. 1981년 잭 웰치가 GE의 회장이 됐다. 잭 웰치는 주주자본주의를 실현했다. 기업은 마땅히 주주들의 것이었다. CEO에겐 주주한테 최대 이윤을 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잭 웰치 는 대규모 정리 해고와 사업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단행해서 주주들을 기쁘게 했다. 더 적은 인원으로 돈 버는 사업에만 집중하고 돈 되는 기업 이라면 어디든 인수하는 게 잭 웰치의 경영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는 잭 웰치의 시대였다. 스티브 잡스처럼 허황된 비전이나 읊어대면서 주 가나 단기 성과에 무심한 CEO는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1983년 3월 잡스는 아예 펩시콜라의 CEO였던 존 스컬리를 새 사장으 로 영입한다. 자신은 맥킨토시 프로젝트에만 매진한다. 맥킨토시 프로젝 트는 맨 처음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Graphic User Interface를 적용한 혁신적 인 개인용 컴퓨터였다. 그 때까지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 정도는 알아야 했다. 잡스는 누구나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픽과 마우스를 활용했다. 맥킨토시는 분명 혁신적이었다. 하지 만 애플II만큼 대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똑같이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를 활용한 윈도우OS와 IBM의 파상 공세에 밀렸다.

스티브 잡스는 빌 게이츠가 애플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구상을 훔쳐 갔다고 노발대발했다. 월터 아이작슨 Walter Isaacson 이 쓴 스티브 잡스 공식 전 기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당시 잡스는 빌 게이츠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소리 쳤다. “당신은 우리 것을 훔쳤어.”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내 생각 에는 우리 둘 다 부자 제록스를 이웃으로 뒀고 내가 그 집에 침입해 텔레비 젼을 훔쳤을 땐 당신도 이미 한 차례 도둑질을 했던 거였어.” 컴퓨터를 그래 픽과 마우스로 운영한다는 구상은 애당초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의 지적 재산이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를 압도할 만큼 큰 회사였던 제록스의 자투리 개발 계획 가운데 하나였다.

맥킨토시가 경착륙하면서 애플 안에서 잡스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주 주들과 CEO 존 스컬리는 애플을 좀 더 시장친화적인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잡스처럼 기업을 개인 소유물처럼 여기는 창업주는 경영 혁 신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나중에 혁신의 신으로 추앙 받은 스티브 잡스 가 그 땐 혁신의 장애물로 손가락질을 당한 셈이었다. 주가와 직결되지 않 으면 그건 혁신이 아니던 시절이었다. 기술 혁신을 꿈꾸는 잡스한텐 치명 적인 족쇄였다. 1985년 여름 애플은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창사 이래 처 음이었다. CEO 스컬리와 이사회는 모든 걸 스티브 잡스 탓으로 돌렸다. 잡스는 모든 회사 직위에서 해제됐다. 한 가지 직함만 남았다. 글로벌 씽커 였다. 1985년 9월 17일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떠났다.

시장을 이기는 CEO

스티브 잡스는 2000년 1월 4일 애플의 정식 CEO로 취임했다. 23년 전 스 티브 잡스가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투자자인 아마스 클리퍼 드 마큘라와 함께 애플을 개업한 날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진작에 애플 에 복귀했다. 공식적으론 1996년 12월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면서부터 잡스의 애플 복귀는 기정사실이 됐다. 이듬해 2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CEO였던 길 아멜리오 Gil Amelio의 고문이 됐다. 사실 스티브 잡스는 그보 다 더 오래 전부터 애플 복귀를 노려왔던 걸로도 알려졌다. 길 아멜리오는 1997년 애플 CEO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에 ‘애플에서 보낸 500일’이라 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아멜리오는 1995년에 이미 스티브 잡스와 만난 적 이 있다고 썼다. 잡스는 아멜리오한테 말했다. “애플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회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리더밖에 없습니다.” 그 리더는 응당 잡스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분명한 건 스티브 잡스의 애플 CEO 복귀가 치밀한 작전이었단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제 기업인이 돼 있었다. 젊은 스티브 잡스는 기업을 다룰 줄 몰랐다. 힘에 부친 나머지 CEO를 대신해 줄 사람을 끌어들였다가 뒤통수를 맡았다. 마흔 초반이 된 스티브 잡스는 기업 조직을 자신 뜻대로 움직이는 경 영 능력을 길렀다. 스티브 잡스가 곧바로 애플의 CEO가 됐다면 당장 애플 주주들한텐 희소식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잡스가 경영 고문으로 참여했다 는 소식만으로도 PC시장은 신제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다. 잡스는 나서지 않았다. 화려한 구세주처럼 등장했다가 헌신짝처럼 버림 받을 수 있 다는 사실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애플은 1997년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 었다. 1997년 1분기에만 7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기록했다. 결국 아 멜리오는 1997년 7월 CEO 자리에서 자진 사퇴했다. 마땅한 후임자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애플 이사회가 스티브 잡스한테 CEO를 맡아달라고 애원 하는 형국이 됐다. 그런데도 잡스는 거절했다. 잡스는 당시 ‘타임’과의 인터 뷰에서 딴청을 부렸다. “CEO 자리를 권유 받았지만 제 인생에서 하고자 했 던 일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CEO 자리를 거절했지만 애플 안에선 이미 iCEO로 불 리고 있었다. 이젠 애플의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된 조나단 아이브 Jonnathan Ive를 발탁한 것도 iCEO 시절이었다. 동시에 스티브 잡스는 애플 이사회를 접수했다. 마큘라를 밀어냈다. 마큘라는 초창기 애플에 투자한 이래 20년 동안 이사회를 지배해온 숨은 실력자였다. 1985년 존 스컬리가 잡스를 밀 어낼 수 있었던 것도 마큘라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이었다. 1997년 8 월 마큘라는 애플 이사직을 사임했다. 그 자리를 스티브 잡스가 채웠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마큘라는 애플이 시장의 지배를 받도록 만든 장 본인이었다. 잡스가 보기엔 기업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걸 주기보단 시장 이 필요로 하게 만들 수 있어야 했다. 마큘라로 대변되는 주주들은 애플 이 시장이 필요로 하는 걸 바치는 기업이 되기를 원했다. 비전과 혁신은 다음 문제였다. 마큘라를 밀어내면서 마침내 스티브 잡스는 공식적으로 애플의 임시 CEO를 맡기로 한다. 제품 개발 부문과 이사회를 모두 장악 하고 난 다음에야 권좌에 복귀한 셈이다. 그나마도 임시였다.

스티브 잡스는 당시 누구보다도 기업과 시장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잡스는 기업과 시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젊은 잡스가 기업과 시 장을 몰라서 관심이 없었다면 중년의 잡스는 기업과 시장을 너무 잘 알아 서 끊임없이 경계했다. 잡스는 1985년의 쓰라린 경험에서 분명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애플이란 기업을 스티브 잡스에 최적화시키고자 했다. iCEO 스티브 잡스의 목표는 돈이나 기업 자체가 아니었다. 벤처 붐은 많은 청년 창업자들을 벼락 부자로 만들어줬다. 더 많은 청년들이 창업한 기업을 돈 으로 환산하기 위해 벤처 시장에 뛰어들고 있었다. 기업 자체가 목적인 경 우도 있다. 대를 이어서 기업 조직을 장악해서 이윤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 력까지도 추구하는 경우다. 한국의 재벌이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 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잡스는 새로운 기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윤 이 아닌 이상을 추구하는 기업이었다.

중앙집권적 CEO

2009년 12월 ‘포춘’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CEO로 스티브 잡스를 선 정했다. 곁들인 기사에서 애플의 조직 구조를 도표로 만들어서 공개했다. 애플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중앙집권적 기업이었다. 제품 개발부터 마케팅 과 재무까지 모든 부서는 스티브 잡스와 직접 연결돼 있었다. 심지어 애플 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조나단 아이브는 오직 스티브 잡스하고만 이어져 있었다. 결국 잡스와 조나단 아이브 이외에는 어떤 애플 경영진도 디자인 에 관여할 수 없는 구조였다.

애플이 처음부터 이렇게 중앙집권적 조직이었던 건 아니다. 1980년대 초 만 해도 애플 역시 아직 벤처 회사의 테를 벗지 못한 중구난방 조직이었다. 스티브 잡스부터가 좌충우돌했다. 리사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자 갑자기 맥킨토시 프로젝트로 선회하는 식이었다. 사실 맥킨토시를 처음 구상한 건 잡스가 아니었다. 제프 라스킨 Jeff Raskin이었다. 결국 제프 라스킨은 맥킨토 시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빼앗은 스티브 잡스를 원망하면서 애플을 떠났다. 신제품 개발이 잡스의 통제권 밖에서 진행되고 있었단 증거였다. 뒤늦게 잡 스가 개발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자 반목이 시작됐다. 결국 이 사건은 존 스 컬리와 애플 이사회가 잡스를 축출하는 빌미 가운데 하나가 됐다.

복귀한 잡스가 애플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변 화시킨 건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현대 경영학의 일반적인 관점을 뒤집은 짓이었다. 현대적 경영의 선구자로 통하는 슬론은 1923년부 터 GM을 이끌면서 개인이 아닌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업을 만들었 다. 힘을 분산시키고 사업부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슬론의 기업 혁신은 슬 로니즘이라고 불렸다. 20세기 초반은 미국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점차 분리 돼 가던 시기였다. 더 이상 CEO 혼자서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GM이 포드를 누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헨 리 포드는 거대한 포드 왕국을 중앙집권적으로 경영하려고 고집을 부렸다.

스티브 잡스도 헨리 포드처럼 슬로니즘을 부정했다. 스티브 잡스는 21세 기 초반에 20세기 초반 이후 100년 동안 실종됐던 독재적 CEO 리더십을 복 원했다. 그걸 중앙집권적이라고 부르든 봉건적이라고 부르든 같은 얘기였다. 슬로니즘과 대비되는 잡스이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포드는 실패했 지만 잡스는 성공했다. 애플의 모든 제품에 자아를 뜻하는 아이(i) 혹은 미 (Me)가 따라붙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잡스는 자기중심적 주의를 애플의 철 학으로 삼았다. 애플 제품을 통해 모든 소비자들도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 는 세상을 갖게 만들고자 했다. 잡스는 회사 안에서 뿐만 아니라 회사 바깥 시장을 상대할 때도 자기중심적이었다. 헨리 포드는 말했다. “내가 만약 포드 의 고객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았다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을 원한 다고 답했을 겁니다.” 잡스 역시 시장을 조사하기보단 자신이 원하는 걸 했 다. 그걸 소비자들이 원할 것이라고 확신하거나 소비자들이 원하게 만들 거 라고 자신했다. 현대적 마케팅을 깡그리 무시했다. 스티브 잡스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만 혁신한 게 아니었다. 맨 먼저 경영 자체를 혁신했다.

창조적 모방의 CEO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음반사들의 음원 유통 방식은 정말로 사용자 친화적 이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음반사들은 애플에게 뭔가를 준 게 분명 합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에 따르 면,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아이튠즈를 처음 목격하고는 좌절감 에 휩싸였다. 그날 밤 쓴 이메일 제목은 “애플의 잡스가 또 다시”였다.

스티브 잡스는 1980년대 빌 게이츠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스티브 잡 스가 보기에 패인은 두 가지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이라는 시장 지 배 적 사업자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는 다른 소프 트웨어 개발 업체들한테 윈도우OS의 라이선싱을 제공했다. 윈도우 운영 체제를 바탕으로 마음껏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팔 수 있게 했다. 1997년 애플의 임시 CEO로 복귀한 잡스는 1980년대 게이츠가 썼던 전 략을 창조적으로 모방했다. IBM이 마이크로소프트한테 그랬던 것처럼 애플 한테 광대한 시장을 열어줄 거대 기업을 찾았다. 스티브 잡스의 시야는 넓었 다. 단지 IT분야에만 머물렀다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기가 어려웠다. 스티 브 잡스는 픽사를 통해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IT기기들은 결국 디지털 문화를 담게 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소비자들은 자신한테 주 어진 개인용 단말기를 활용해서 결국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게 될 것이라 고 봤다. 잡스는 “21세기가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잡스는 그 혁신 모델을 소니에서 찾았다. 워크맨을 디지털 화한 아이팟을 만들었다. 아이팟에 담을 음악 시장을 혁신했다. 2002년 초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와 다른 제품 군에서 경쟁하기보다 소니와 경쟁하겠습니다.” 결국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IBM 전략을 모방했고, 소니의 워크맨 전략도 모방했 다. 대신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IT산업에서 창조적 모방은 창작 그 자체만큼이나 더 값진 경영 기법이다.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빌 게이츠는 아이튠즈를 처음 본 날 마이 크로소프트 경영진들한테 이렇게 지시했다. “이제 잡스가 일을 이루었으니, 우리는 재빨리 움직여서 그만큼 좋은 인터페이스와 저작권이 있는 무엇인가 를 얻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애플을 모방하려고 했다. 월터 아이작슨은 이렇게 썼다. “그러나 MS는 잡스가 길을 보여준 다음에도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잡스의 전략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골몰하는 사이 에 오히려 잡스가 다시 한번 MS의 전략을 재해석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전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건 윈도우OS를 바탕으로 개 발자들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윈도우 생태 계를 구성한 셈이었다. 잡스는 애플 생태계를 구상했다. 앱스토어를 만들었 다. 애플리케이션 시장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조성된 윈도우 생태계와 같은 원리였다.

스티브 잡스는 혁신적 모방의 CEO였다. 잡스가 도둑이란 얘기가 아니다. 잡스는 디지털 혁명의 근원이 복제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IT시장에선 무엇이든 복제될 수 있다. 음원이든 영화든 개인 신상정보든 뭐든지 상관 없 다. 당연히 IT기업의 사업 전략 역시 복제의 대상이다. 복제를 부정하려고 하 면 오히려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잡스가 그랬다. 자신만이 창조적이라 고 믿었다. 정작 자신만의 창작물이라고 믿었던 맥킨토시의 그래픽 유저 인 터페이스를 게이츠가 선점하자 화만 냈다. 중년의 스티브 잡스는 창조적 모 방을 무기로 쓸 줄 아는 CEO가 돼 있었다.

미니멀리즘 CEO

2010년 2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공개했다. 엉뚱하게도 스티브 잡스 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앉았던 소파가 이목을 끌었다. 검은 소파는 프 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작품이었다. 로 코르뷔제는 극단적인 미니 멀리즘을 추구했던 건축가였다. 코르뷔제의 소파는 가구 하나 없는 집에 서 살았던 스티브 잡스에겐 더 없이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잡스는 어떤 소 파에 앉았느냐 만으로 자신이 어떤 제품을 만들었고 어떤 디자인을 추구 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스티브 잡스는 분명 프리젠테이션의 귀재였다. 정작 잡스는 말을 하기보 다 말을 아껴서 더 큰 메시지를 전달했다. 스티브 잡스는 표현 하나 하나까 지도 신중하게 골랐고, 몇 번이고 연습했으며, 무대 위에 올라가선 준비된 말 이외는 어떤 단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 이외에는 드물게 허락 된 임원 말고는 어느 누구도 애플을 대변할 수 없었다. 이런 극단적인 자기 절제는 프리젠테이션 뿐만 아니라 애플 경영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잡스는 미니멀리즘을 기업 경영에 도입한 CEO였다. 사실 기업은 절대로 미니멀해질 수 없는 존재다. 프리젠테이션만 해도 시장에 기업의 의사를 전 달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무언가 더 많은 정보를 그럴 듯하게 쏟아내는데 혈 안이 되기 일쑤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은 제품에 온갖 기능을 덕지덕지 덧붙여놓고는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기업 경영의 방정식을 모두 무시했다. 제품 디자인에서만이 아니었다. 제품군 자체 가 미니멀해졌다. 아이팟과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일직선 구조였다. 애플이 터치스크린 방식을 맨 처음 상용화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소수 의 제품 군으로 다수의 기능을 수행하자면 터치 스크린 방식이 정답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미니멀 경영이 기술 혁신의 촉매제가 된 셈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리즘 경영과 CEO란 직업을 예술가에 가깝게 만들 었다. 예술의 본질은 결국 사물의 핵심만 발라내는 행위다. 기업 경영에서 모 든 군더더기를 배제하는 미니멀리즘 경영은 분명 예술이었다. 잡스 역시 스 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겼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미니멀리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기업 경영의 주요 요소로 활용했다. 잡스는 기업이 투자자나 소비자한테서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투자자나 소비 자들의 변덕은 온갖 즉흥적인 요구로 기업 경영을 백화점식으로 변질시키는 주범이었다. 미국 IT산업의 본산인 실리콘밸리가 금융 중심지인 동부가 아니 라 서부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하버드에서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주커 버그 역시 회사가 커지자 서부로 도망쳤다. 자본과 혁신은 언제나 북미 대륙 만큼 거리가 멀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대중적 존재감을 일종의 보호막으 로 삼았다. 애플 안에선 “스티브가 그랬다”는 말 한 마디면 모든 논쟁이 끝났 다. 애플 밖에서도 “스티브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언제나 화두였다. 스티브 잡 스는 자기 방식을 표준으로 삼게 만들어서 다른 의견을 잠재워버렸다.

사실 이런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경영은 결국 구글한테 추격을 허용하는 빌미가 됐다. 198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방 정책과 수평적 연대로 시장 지배자가 됐듯이, 구글도 무료 개방형 OS인 안드로이드를 앞세워 애플을 추 격했다. 구글은 모바일 시대의 MS였다. IBM이 맡았던 역할엔 삼성이 캐스 팅됐다.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 경영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간결하게 수직화하는 애플의 미니멀한 모델은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데는 불리할지 몰라도 기술 혁신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경영 방식이 었다. 잡스는 더 빨리 혁신적인 제품들을 출시해서 경쟁자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1980년대 애플이 패했던 건 분명 관료화되면서 속도를 잃었기 때문이 었다. 이번엔 달랐다. 잡스가 절대 권력을 쥔 애플은 빠른 혁신을 지탱할 수 있었다. 결국 구글 역시 모토로라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의 수직 통폐합 전략을 일부 복제했다. 한때 빌 게이츠를 모방했던 업계는 다시 스티브 잡스 를 모방하고 있었다.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그는 사망하기 얼마 전 빌 게이츠와 마 지막 만남을 가졌다. 잡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업계의 늙은이들처럼 과거를 회고했습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게이츠는 잡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개방형의 수평적 모델이 승리할 거라고 확신했었어. 하지 만 자네는 통합형 수직 모델도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네.” 잡스는 짧 게 말했다. “자네 모델도 성공했어.” 잡스다운 미니멀한 대답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는 CEO

2011년 6월 6일 스티브 잡스는 생애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무대 에 올랐다. 여전히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뼈저리게 수척해진 상태였다. 사실 잡스는 2월 무렵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삶을 정리하고 있 었다. 어쩌면 잡스는 이날 프리젠테이션이 마지막일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 을 지도 모른다. 그는 약간은 탁한 목소리로 아이클라우드를 소개하기 시작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클라우드가 하늘에 하드디스크가 둥둥 떠 있는 거라고 상상하곤 하지요.” 청중들은 웃었다. 잡스의 유머 감각만큼은 건강했 다. 아이클라우드는 잡스가 평생을 추구해온 IT혁명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 었다. 잡스는 누구나 컴퓨터를 갖는 세상을 꿈꿨다. 이젠 어디나 컴퓨터가 있 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아이클라우드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와 맥북을 연 결해서 사용자가 언제 어디서든 캘린더를 확인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용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건 자동으로 이루어집 니다.” 그는 덧붙였다. “그냥 작동하는 거죠(It just works).”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갈 무렵 스티브 잡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한 가지 가 더 있습니다(There is one more thing).” 매번 프리젠테이션 말미에 잡스 가 덧붙이곤 하는 말이었다. 이젠 잡스의 상징이 된 표현이었다. 객석에선 박 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잡스는 언제나 “보여줄 게 한 가지가 더 있다”고 말 하곤 했다. 그렇게 모두가 잡스의 생각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생각을 원하 게 만들었다. 잡스는 사람들이 “한 가지 더”를 원할 때 비로소 혁신과 진보 가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프리젠테이션을 마친 뒤 스티브 잡스는 아내 로렌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이마를 마주 댔다. 그렇게 잡스의 다르게 생각하 기(Think Different)는 끝이 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티브 잡스는 글 로벌 씽커였다.

사진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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