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따른 원자력 안전성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정연호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원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 제고를 위해 다각적 노력을 경주하겠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를 위해 중대사고 발생 초기에 원전을 실시간 점검, 즉각적 대응을 가능케 하는 기술 개발에 주력하는 한편 기존 원전보다 안전성과 경제성, 자원 재활용성, 핵 확산 저항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미래 원자력 시스템인 '제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덕=구본혁 기자 nbgkoo@sed.co.kr
Q. 국내 원자력 연구의 중추로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내·외적 고충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원전 안전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신뢰가 흔들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원자력 분야 종사자들은 지난 1년간 절치부심하며 원전의 안전성 강화 방안을 찾아 왔습니다.
당장 손봐야할 중·단기 대책을 수립, 실행 했으며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으로 안전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설 보완 및 연구개발의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원자력에너지가 지구온난화, 화석연료 고갈 등 인류의 당면과제를 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럼에도 많은 국가들이 탈(脫) 원전 정책을 천명했는데.
사고 당사국인 일본이 자국 내 모든 원전을 일시적으로 가동 중단했고, 그 밖의 많은 국가들이 원전 가동과 신규 건설을 포기했다는 뉴스들이 넘쳐나는 듯 보이겠지만 전체적인 양상은 이와 다릅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안전성 강화를 전제로 신규 원전을 추가 건설하겠다는 국가들이 여전히 많은 상황입니다.
이는 데이터로도 입증됩니다. 오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 건설될 것으로 예상되는 원전의 숫자는 후쿠시마 사고 이전 156기였지만 올해 3월 공개된 세계원자력협회(WNA)의 집계에 따르면 지금은 163기로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Q. 원전 안전 강화에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는지요?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원자력 안전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 중입니다. 원전의 고온· 고압 환경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미리 예측, 실험으로 모의한 뒤 그 결과를 토대로 설계 개선 등 안전성 향상 방안을 도출하는 열수력 안전 연구가 그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처럼 원전의 설계기준을 초과하는 중 대사고가 발생했을 때 나타날 현상과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중대사고 연구입니다.
두 분야 모두 1990년대 이전까지는 원자력 선진국과 비교해 몇 걸음 뒤처져 따라가는 형국이었지만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핵심 실험설비의 구축·운용으로 2000년대 들어서는 국내 수준도 세계적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후쿠시마 원전과 같이 전기가 완전히 차단되도 자연의 힘만으로 냉각수를 공급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 차세대 한국형 원전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냉각 실패로 노심 용융이 일어났을 때 용융물의 확산을 막는 설비 등 중대사고 대처 능력을 제고할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Q. 주요 원전 선진국과 비교해 국내 기술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원자력 시스템, 다시 말해 원전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능력은 원전 선진국과 어깨를 견줘도 손색이 없는 수준입니다. 지난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가 미국, 프랑스, 일본을 제치고 우리 원전 4기를 도입키로 결정한 것은 한국형 원전 'APR-1400'이 현존 원전 중 가장 성능이 우수하고, 안전하면서, 경제성도 뛰어나기 때문입니 다. 이와 관련 얼마 전 한국전력이 UAE와 원전 4기의 추가 건설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안전연구의 경우 특정 분야는 이미 세계 선두권에 올라섰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선진국 보다는 미진한 실정입니다. 원자력 발전이 아닌 방사선 응용 기술 분야에서도 따라잡아야 할 격차가 존재합니다.
그래도 이제 한국 하면 원자력 기술 선도국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여서 외국에 나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합니다. 참고로 지난 3월 열린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프랑스-벨기에 4개국이 고농축 우라늄 사용 최소화를 위한 공동 프로그램을 발표했는데, 이를 가능케 한 원천기술이 바로 저희 연구원이 개발한 원심분무 핵연료 분말 제조 기술이었습니다.
Q. 미래형 원전 개발 진행상황은 어떻습니까?
미래형 원전은 현재 가동 중인 원전보다 안전성과 경제성, 자원 재활용성, 핵확산 저항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제4세대 원전'을 말합니다. 이의 개발은 국가와 국민이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부여한 핵심 미션이자, 원자력 안전 강화를 위한 또 다른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4세대 원전 개발에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원자력 선진국들이 2001년 '제4세대 원자력 시스템 국제포럼(GIF)'을 창설한 가운데, 4세대 원전의 여러 노형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우 소듐냉각고속로(SFR)와 초고온가스로(VHTR)을 선택해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Q. 두 가지 4세대 원전은 기존 원전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요?
SFR은 사용후 핵연료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최대 메리트입니다. 이외에도 기존 원자로보다 향상된 다양한 안전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기의 오작동이나 고장으로 원자로 온도가 크게 상승해도 스스로 출력이 제어돼 정상 상태로 돌아가는 '고유안전 특성'을 가지고 있고, 소듐 냉각재가 끓는점인 880℃까지 대기압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높은 압력에 따른 위험도 없습니다. 특히 소듐은 핵연료 피복재나 원자로 구조재와 화학 반응을 하지 않으므로 SFR은 근본적으로 후쿠시마 원전과 같은 수소 폭발 사고가 불가능합니다.
VHTR은 원전에서 발생하는 1,000℃에 가까운 초고온 열에너지를 활용, 미래에너지로 각광 받는 수소를 생산하는 등 여러 산업분야에 대한 활용성이 뛰어납니다. 물론 이 역시 안전 특성이 우수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냉각재로 물이 아닌 헬륨 기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수소 폭발이나 증기 폭발이 일어나지 않으며 헬륨은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하고 방사성화가 진행되지 않아 방사선 누출 가능성도 매우 적습니다.
덧붙여 VHTR은 우라늄을 3중 코팅해서 만든 지름 0.9㎜의 알갱이 입자를 핵연료로 쓰는데, 이 알갱이들이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핵분열 생성물질을 가둬둬 방사능 유출 가능성을 현저히 낮출 수 있습니다.
Q. 건설 목표 시점은 언제입니까?
오는 2028년 SFR 원형로 건설, 2026년에는 VHTR을 이용한 수소 생산시스템 실증을 목표로 필요한 기술 확보와 장치 개발 등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SFR의 핵심 계통을 실제 온도와 압력으로 모의할 수 있는 '1단계 소듐 열 유체 종합효과시설(STELLA 1)' 구축을 완료했고, 이에 앞서 작년 12월에는 VHTR 구축을 위한 핵심 연구시설인 '초고온 헬륨 루프'를 완성한 바 있습니다.
Q. 중소형 스마트(SMART) 원자로는 어떤가요?
지난 1997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독자 개발해온 스마트 원자로는 지난 2010년 말로 기술 개발을 일단락 짓고 인허가 기관에 표준설계인가(SDA)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인허가 심사가 1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인허가에 필요한 모든 검증 시험과 관련 문서 제출이 완료됐기 때문에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인허가를 받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향후 인허가 획득이 완료되면 우리나라는 오는 2050년까지 약 39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글로벌 중소형 원전 시장의 선점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됩니다.
Q.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JRTR) 수출 이후 추가 진전사항은 없는지?
2009년 JRTR 국제 경쟁 입찰에서 승리, 건국 이래 첫 원자력 시스템 일괄 수출을 기록했지만 그에 앞서 그리스와 태국의 연구로 부분 개조 사업을 수주하는 등 연구로 기술수출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연구용 원자로의 계측제어계통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사업의 수주를 확정짓고 계약서 서명만 남겨놓고 있으며, 2009년 추진됐다가 중단됐던 네덜란드의 대형 연구로 '팔라스(PALLAS)' 건설 사업 입찰 재참여를 위한 준비도 진행 중입니다. 세계 정상급의 연구용 원자로 설계·건설 능력을 바탕으로 향후 50년간 약 20기의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 원자력 수출 산업화에 일조한다는 목표입니다.
Q. 그런 목표를 위해서는 전문 인력 확보가 중요할 텐데요.
맞습니다. 그 부분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앞으로 10년 사이 베이비붐 세대 과학자들이 대거 정년퇴직하게 되는데 자칫하면 연구 현장에 큰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관장으로서 상당히 초조한 입장입니다. 젊고 우수한 인력의 확보가 급선무지만 이는 한 가지 방법만으론 달성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1960~70년대처럼 해외에서 교포 과학자들을 다시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선진국에 더해 말레이시아, 베트남 같은 원자력 후발국에서도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여성 인력의 활용도 제고를 위해 원내 탁아시설 설립 등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Q. 최근 연구원의 체질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학기술계 종사자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이 이제는 게임의 룰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기초과학이 됐든, 응용기술 개발이 됐든 과거와 같은 추격형, 모방형 연구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선도형 연구, 창조적 연구가 가능하도록 연구개발의 속도와 효율성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연구 체계 현대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례로 모델 시뮬레이션 방법론의 개발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원자로를 개발할 때 직접 하드웨어를 제작해 측정해봐야만 성능이 확인됐지만 모델 시뮬레이션 방법론이 확립되면 머릿속에 떠오른 첨단 원자로의 모든 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모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만큼 실험에 들어가는 직접비를 줄이고, 개발 기간도 대폭 축소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원자력 연구개발 과정에서 창출된 지식정보 자원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전수할 수 있도록 '원자력 기술 기록화 사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