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국내 벤처전문가들이 말하는 '창조경제' 패러다임

"개방형 혁신은 새로운 성장동력"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에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모방 경제'로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을 탈피하기 위해선 '창조경제'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 벤처업계 전문가들은 이 같은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들은 지금이 '개방형 혁신'을 통해 창조 경제를 이뤄야 할 적기라고 진단했다.
김의준 기자 eugene@hmgp.co.kr


대한민국 벤처업계가 뜨겁다. '제2의 벤처붐'이라 불릴 정도로 활력이 넘친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를 주도할 산업으로 주목받으며 벤처업계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첫 현장 방문지로 디지털방송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알티캐스트'를 찾은 것도 '창조경제'라는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창조경제의 중요한 모델이 방송통신융합 정보기술(IT)기업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행보라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는 IT와 산업의 융합,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통해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새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이라며 IT벤처업계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모방경제'에서 '창조경제'로

"아주 시의적절한 아젠다라고 봅니다." 고영하 엔젤벤처투자협회 회장은 말한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는 모방경제의 모델이 작동했습니다. 남이 한 걸 따라 하는 전략이었죠." 남이 만든 제품을 더 싸고 나은 품질로 업그레이드시켜 경제력을 빠르게 키워왔다는 얘기다. 이른바 패스트 팔로잉 전략이었다. 하지만 중국 등 신흥국가의 기술 향상으로 단순 '모방경제'는 경쟁력을 잃고 있다. 고 회장은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못 찾고 있기 때문에 우리경제가 정체 상태에 빠졌다"며 "한 단계 진보하려면 창조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동력이라는 것은 혁신을 통해서 나오는 건데 대기업에선 그런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작은 IT 기업들이 효율적으로 혁신을 이뤄내야죠."

지난 2007년부터 불기 시작한 스마트폰 바람은 수많은 사업 기회를 탄생시키며 작은 스타트업들이 이른바 '대박'을 터뜨릴수 있는 시장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는 잠시 침체기를 맞았던 국내 벤처IT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난해 국내 총 벤처 기업 수는 2만8,193개로 역대 최다였다. 그 중 1,000억 원 이상 매출을 기록한 벤처회사는 총 381개로, 이 또한 사상 최다였다. 벤처캐피탈 신규 투자액도 1조2,000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7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770억 원 규모의 엔젤투자 매칭펀드 (엔젤 투자자가 기업에 동일한 조건의 투자를 해주는 펀드)를 마련했다. 또한 올해 예산 500억 원을 확보해 엔젤투자 지원을 위한 펀드를 추가 조성할 예정이다.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줄곧 헬스·피트니스 부문 순위 1위를 지켜온 눔(Noom)의 정세주 대표는 말한다. "벤처 스타트업 문화가 한국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년 전과 비교해봐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앞으로 2년 안에 정말 대단한 글로벌 벤처 기업이 한국에서 탄생할 것이라 믿습니다."


'개방형 혁신' 생태계 조성

고 회장은 노키아를 예로 들며 대기업과 벤처기업 간의 상호교류를 통해 경제발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똑똑한 핀란드 인재들이 노키아에 들어갔지만 입사 후에는 별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회사의 실적 부진으로 연결됐죠. 결국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해고된 직원들이 300개 이상의 기업을 세우게 됐어요." 고 회장에 따르면, 노키아는 2011년 이후 창업한 전 직원들에게 4,000만 원씩 창업자금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크고 작은 혁신 기업들이 나중에 다시 노키아에 인수되기도 했다. 내부 창업 지원 시스템을 가동해 혁신이 일어나는 생태계를 개발한 셈이었다. 고 회장은 미국의 제네럴 일렉트릭이나 IBM 같은 회사들은 1년에 수십 개씩 회사를 인수한다며 성장과 혁신이 함께 이뤄져야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게 소위 개방형 혁신 모델(Open Innovation)이라는 겁니다. 그 생태계가 가장 잘 형성돼 있는 곳이 미국 실리콘밸리죠."

개방형 혁신 모델은 2003년 UC버클리의 헨리 체스브로우 Henry Chesbrough 경제학 교수가 제시하며 유명세를 탔다. 그는 개방형 혁신을 '기업이 안으로의 지식 흐름과 (inflow) 밖으로의 지식 흐름 (outflow)을 적절히 활용하여 내부 시장 가속화와 외부 시장 확대를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업 내부의 R&D 확대 외에도, 때에 따라선 뛰어난 기술을 갖춘 외부 기업을 인수해 부가가치 창출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기업혁신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벤처 인수합병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놓여 있다. 꾸준히 반복적으로 M&A가 이뤄지는 선순환 시장 구조가 정착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물론 몇몇 굵직한 인수합병 사례가 있기는 하다. 2008년 구글에 인수된 국내 인터넷회사 태터앤컴퍼니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구글에 인수된 벤처기업'이었다. 2011년 소셜 커머스 업체 티켓몬스터는 무려 4,000억 원에 미국 리빙소셜에 인수되는 기록을 세웠고, 동영상 솔루션 업체 엔써즈도 45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KT에 팔렸다. 하지만 이런 상징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창업 ? 기업확장 ? 회사매각 (M&A) ? 목돈 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실제 지난해 미국에서의 M&A 건수는 전체 회수 시장의 90%에 이르렀지만 국내에서는 7%에 불과했다.

이에 대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기업 책임론이다. 벤처기업이 좋은 기술을 들고 나오면 대기업이 막대한 자본으로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기존 벤처 기업의 인력을 빼오기도 하면서 M&A생태계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얘기다. 두 번째 이유로는 현재 국내 벤처기업 창업가들의 역량 미달을 꼽을 수 있다. 구글에 인수됐던 태터앤컴퍼니의 창업자이자 현재 아블라컴퍼니 대표를 맡고 있는 노정석 대표는 말한다. "구하려고만 하면 투자자본은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라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고 뭔가 수익을 기대하는 활동이잖아요. 자선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만족되지 않는 기업가들에겐 돈을 대주지 못하는 거죠. 단순한 시장 논리예요." 그는 "한국에선 여전히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창업 시장을 기피한다"며 "창업가 수가 늘면 분명 질적 향상도 뒤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초기 창업가들이 투자받을 만한 공급처가 많지 않다는 것도 국내 시장의 현실이다. "초기 투자의 꽃"으로 불리는 엔젤투자 업계만 봐도 미국에는 30만 명가량이 있지만, 국내에는 500명 정도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는 고영하 회장이 지난해 엔젤투자협회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 회장은 "2020년까지 1만 명의 엔젤투자자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라며 "시간은 걸리겠지만 꾸준히 성공 사례를 만들어 사람들의 참여도를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 성공 사례' 늘려야

아블라컴퍼니의 노 대표는 벤처 업계 활성화를 위해 성공적인 창업이나 매각 사례를 더욱 보편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처를 통해서도 궁극적으로 능력 있는 학생들이 의사나 변호사, 대기업 임원 같은 성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대한민국 창업 사회에 그런 성공 사례를 많이 만들겠다는 게 제 인생의 미션입니다. 기업가로서, 그리고 사회적인 공헌자로서 제 역할은 한국에 그런 사례를 많이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활용해 회사를 운영하고 투자하는 이유입니다." 티켓몬스터의 초기 엔젤투자자였던 노 대표는 현재 헬스케어 앱 1위를 달리고 있는 눔(NOOM)에도 투자를 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는 풍토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항상 위험의 크기와 보상의 크기는 똑같아요. 실패하면 배우는 게 있을 거고, 거기서 배운 걸 토대로 성장하면 더 위대한 영역으로 가는 거죠."

눔의 정 대표도 이 의견에 공감했다. "실패가 무조건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2년 반 동안 투자를 못 받아서 매일 라면만 먹고 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비전이 있었기에 돈이 없어도 뛰어난 개발자들을 영입할 수 있었고, 결국 성공적인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죠. 성장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들은 비전을 보고 사업에 동참합니다."

'창조경제'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 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상용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말한다. "벤처 창업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라 혁신이 목적입니다. 혁신을 통한 결과로 일자리가 많아지는 거지, 목표 자체를 일자리에 두면 곤란합니다." 페이스북은 3,000명 정도 직원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들의 고용창출 효과는 3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스라엘이나 싱가포르에서 정부 주도하에 이뤄지는 펀드투자 제도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부 지원하에 투자와 소득공제 등의 제도를 마련해 창업과 엔젤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완화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인재들이 점차 벤처업계로 진출하고, 창업가 수가 지금보다 늘어나면 결국 질적 향상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마련이다. 거기에 대한민국 특유의 역동성과 글로벌 마인드, 그리고 뛰어난 교육수준이 '개방형 혁신 모델'과 조화를 이루면 국내 벤처업계는 한 단계 진보할 것이다. 고 회장은 말한다. "그게 이뤄져야만 한국 경제 전체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당면한 국가 과제입니다. 창업 국가를 만들어야 대한민국이 지속 성장할 수 있어요."


개방형 혁신 모델은 기업 내부의 R&D 확대 외에도 때에 따라선 뛰어난 기술을 갖춘 외부 기업을 인수해 부가가치 창출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기업혁신론'이라 할 수 있다.

벤처 인수합병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놓여 있다. 꾸준히 반복적으로 M&A가 이뤼지는 선순환 시장 구조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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