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전란을 딛고 패션의 정상에 서다

[VENTURE] HOW I GOT STARTED<br>From the Frontier to Fashion’s Peak

99.7% 직원 500명 미만의 미국 기업 비율. 출처: 미 통계국


전쟁 난민이었던 마리 그레이 Marie Gray는 모델로 시작해 여성드레스 브랜드 세인트존 St. John의 설립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Interview by Dinah Eng


마리 그레이(77)가 절약을 위해 직접 첫 드레스를 만들기로 했을 때만 해도, 그녀의 니트 드레스가 영부인, 기업 이사, 할리우드 연예인의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작고한 남편 로버트 그레이 Robert Gray와 함께 세인트존을 공동 설립한 마리 그레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패션 브랜드-신발, 핸드백, 향수, 목욕용품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를 일궈냈다. 현재 회사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베스타 캐피털 파트너스 Vestar Capital Partners에선 정확한 수치를 밝히기를 거부했지만, 후버스 Hoover’s의 추정에 따르면 2012년 세인트존의 매출은 3억 4,600만 달러에 달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 벨그레이드 Belgrade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시가지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단 마리보로 Maribor 외곽 농장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피난처를 찾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아홉 살 되던 무렵, 어머니는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해 아버지와 재회하길 원했다. 그래서 1945년 어머니는 한 남성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나를 국경 너머 오스트리아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발각되면서 그 남성은 체포되고 나만 풀려났다. 어머니, 여동생과 나는 그 후에도 며칠간 탈출을 시도했으나 우리 셋 모두를 도와줄 사람을 결국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시 한 남성에게 돈을 주고 나의 탈출을 부탁했는데, 그 남성은 나를 중간까지만 데려다 줬다. 그는 내게 산꼭대기에 보이는 집에 도달할 때까지 길을 따라가라고 말했다. 멀리 보이는 집은 단 한 채뿐이었다. 나는 그 쪽으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길이 어두워지자 나는 겁이 났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총성을 여러 번 들었다. 도착한 집 안에선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몇 개월 후에 뒤따라 왔다.

당시 내게는 학교에 입고 갈 드레스가 단 두 벌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장기를 지나면서 옷이 계속 작아졌다. 잘 맞지 않는 옷이 너무 싫어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싶었다. 옷장에 들어 있는 옷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멋진 의상을 꿈꿨다.

몇 년 후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호텔식당에 근무했다. 1955년경 아버지에게 할리우드 브라운 더비 Hollywood Brown Derby를 운영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나는 운 좋게도 ‘하루 동안의 여왕(Queen for a Day)’이라는 TV쇼에 출연하면서 반나 화이트 Vanna White와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일을 하면서 일주일에 300~400달러를 벌었고, 할리우드의 리처드 블랙웰 Richard Blackwell 같은 디자이너의 모델로도 활동할 수 있었다.

결혼 전 내 이름은 원래 마리 허먼 Marie Hermann이었다. 그렇게 매력적인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력은 내가 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귀화하며 시민권을 얻을 때 마리 세인트존 Marie St. John으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는 세인트존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1956년 케네디 크리에이션스 Cannady Creations의 독점 모델 광고를 하기로 했고, 그때 판매부장이던 밥 (그레이)을 만났다. 잘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오만한 인물이어서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가 내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결국 사랑에 빠졌다.

세인트존은 옷에 대한 내 열정 덕분에 탄생했다. 나는 일하러 가면 신발과 옷에 돈을 다 썼다. 패션쇼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면 꼭 그 의상을 사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밥과 약혼하면서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난 바느질을 정말 싫어 했고, 뜨개질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뜨개질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뜨개질을 했고, 1962년에는 직접 니트 드레스를 만들어보자고 마음 먹었다. 첫 드레스를 만드는 데는 한 달이 걸렸다.

그 후 직접 만든 멋진 옷으로 옷장을 채우겠다는 생각에 편물기를 구입했다. ‘하루 동안의 여왕’에서 편물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그 기계를 살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첫 번째 드레스를 완성하자 모델이었던 친구들-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명품 옷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속물’들이었다-이 모두 그 드레스를 입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밥을 귀찮게 하면서까지 내 드레스를 바이어들에게 선보이게 했다. 내 계획은 드레스 몇 벌을 팔아 하와이 신혼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밥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자기 생각에 거절할 것이 분명한 이에게 보여줬는데, 그 사람이 로스앤젤레스 소재 불록 윌셔 Bullocks Wilshire 백화점 소속 여성 바이어였다. 그 바이어는 “이걸 만든 회사 이름이 뭐죠”라고 물었다. 밥은 엉겁결에 내 이름인 세인트존을 내뱉었고, 그렇게 상표가 탄생했다.

나는 드레스 가격을 매우 비싸게 매길 생각이었다. 직접 손으로 만든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밥은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두고 저렴한 가격을 책정했다. 첫날 주문으로 84벌을 받았다는 밥의 말에 난 눈물을 쏟았다.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옷을 만들 수 있을까?

밥은 편물공 구인광고를 내기로 마음 먹었고, 난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의 편물기 다루는 방식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결국 우리는 전문 편물공을 한 명 고용했고,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 밥과 내가 함께 일했다. 두 어머니가 코바느질을 도왔는데,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들은 돈을 받지 않고 일했다.

샌 페르난도 밸리 San Fernando Valley에서 살던 우리는 할리우드 북쪽에 작은 상점을 빌렸다. 부모님에게 5,000달러를 빌리고, 친구들한테서도 조금씩 자금을 모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백화점과 자영업 상점에서 주문받은 상품을 출하하는 데 3,000달러가 들어갔다. 첫해 8만6,000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처음 10년은 매우 힘든 시기였다. 우리는 성장했고 모든 것을 사업에 쏟아부었다. 숫자는 밥이 맡았다. 사업관련 협상과 판매, 마케팅은 모두 그가 맡았다. 나는 디자인을 맡고 제품 품질을 책임졌다. 나는 우리가 200달러를 벌고 있는지, 2억 달러를 벌고 있는지 항상 걱정했다. 사업은 항상 두렵고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었다. 새 제품 라인을 선보이기 직전에는 더 심했다. 1964년 들어 연 매출은 45만 달러까지 증가했다.

수제 편물 의류를 만드는 일에는 많은 실수가 뒤따랐다. 품질을 유지하면서 전반적인 사이즈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아무도 편물로 사업을 하진 않았다. 나는 돋보이는 옷을 만들어 여성이 강인한 힘과 여성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우리 제품은 구겨지지 않아서 포장하기에도 용이했다. 1967년 딸 켈리가 태어났다. 임신 중에는 사이즈를 맞추기 위해 옷을 입어볼 수도 없었고, 입덧도 심해 사업에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난 건 내 삶에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전국 유통망 규모가 확대돼 삭스 피프스 애비뉴 Saks Fifth Avenue, 니먼 마커스 Neiman Marcus, 노드스트롬 Nordstrom 등의 매장에도 진출했다. 1973년이 되면서 매출이 260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그때 겨우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10번째 결혼기념일에 우리는 하와이로 떠났다. 컬렉션을 하면서 목표 고객을 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떠올린 이미지 속에는 따로 정해진 나이가 없었다. 직장인일 수도 있고, 전업주부이면서 자선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한 해에만 3명의 영부인이 내 옷을 입었는데, 힐러리 로댐 클린턴 Hillary Rodham Clinton, 셰리 블레어 Cherie Blair(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의 아내), 사치 스즈키 Sachi Suzuki(전 일본 총리 젠코 스즈키 Zeonko Suzuki의 아내)가 그들이었다. 공무원, 아나운서 등은 물론 레바 매킨타이어 Reba McEntire나 패리스 힐튼 Paris Hilton 같은 연예인도 우리 고객이다. 문제가 좀 있는 제품을 내놓는 대중 창고 세일에는 매년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 여러 도시에 세인트존 부티크를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회사 지분 80%를 에스까다 Escada에 매각했다. 당시 남편의 건강이 약간 불안한 상태였다. 그는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회사를 부분 매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급브랜드였던 에스까다는 유럽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브랜드의 해외확장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1993년 드디어 연 매출 1억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당시 에스까다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원치 않는 파트너에게 세인트존이 매각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밥은 에스까다에 우리 회사의 상장을 제안했고,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그 후 베스타 캐피털 파트너스의 도움으로 1999년 5억 2,000만 달러에 다시 회사를 매입해 사기업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우리는 주식 일부를 베스타에 매각했지만 상당 부분 보유했다. 그 이후 남아 있는 주식 대부분을 팔았다.

남편은 오랜 병마 끝에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난 여전히 세인트존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회사 주식도 보유하고 있다. 나는 2005년 은퇴 후 딸과 함께 흥미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수년간 켈리는 세인트존의 얼굴 노릇을 했는데, 뒤이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일을 맡더니 컬렉션을 판매했다. 딸과 함께 그레이스Grayse를 설립해 세퍼레이츠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나는 항상 옷을 볼 때마다, ‘음…… 내가 이렇게 손보면 입기 더 쉬워질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세인트존과 함께 했던 시간만큼 우여곡절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50년 이상 가는 고급브랜드는 드물다. 사람들이 당신 제품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절로 겸손해질 것이다.

나의 조언
마리 그레이
세인트존 니트 공동 설립자

절대 고객을 실망시키지 말라.
사업 초창기 때 고객이 특별하게 여기는 세인트존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수선을 해주곤 했다. 흰색 제품에 와인을 엎지른 고객이 편지를 통해 “제 세인트존을 고쳐줄 수 있나요?”라고 문의했고, 나는 제품을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최고 품질을 유지하라.
고객은 제품의 불완전한 부분을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래서 종종 드레스를 다시 만들곤 했다. 비용이 많이 들지만, 완벽한 옷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고객을 속였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직원을 인정하고 존중하라.
멕시코 공장 직원들을 위해 의사가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오는 의료복지 제도를 시행했다. 토요일에는 아이들을 데려와 진찰받을 수 있게 했다. 이런 작은 부분이 직원들의 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게는 학교에 입고 갈 드레스가 단 두 벌밖에 없었다. 잘 맞지 않는 옷이 너무 싫어서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싶었다. 나는 항상 멋진 의상을 꿈꿨다.” -마리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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