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avid A. Kaplan
젊은 시절 랠프 네이더 Ralph Nader는 자동차 안전규정 확립을 시민 운동의 소명으로 여겼고, 그 결과 현대 소비자 권리 운동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식품 안전, 담배 규제, 정치 윤리, 청정 대기 및 수자원 관련 소송을 걸고 시위를 했으며 법정 증언도 했다. 그는 그 후 대선에 5차례나 도전하면서 진보주의자들의 공분을 샀다. 그들은 네이더가 2000년 대선에서 사상 최고의 박빙 승부를 벌인 탓에 결국 앨 고어가 낙선하고 조지 W. 부시가 승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이더는 50년이 넘는 공직 생활 동안-종종 같은 사람들에게-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그러나 현대 안전 규정의 틀을 구축한 ‘공공시민(public citizen)’으로서 그의 상징적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2006년 10명 내외로 구성된 역사학자 집단은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수십 개의 시민 단체를 설립한 네이더는 여러 분야에서 시민운동을 전개한다. 국민 의료보험, 최저 임금, 세제 개혁 및 비만 퇴치를 비롯해 그가 사는 워싱턴 시내에 좌회전 금지 팻말을 설치하기 위한 운동 등 다양한 일을 한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네이더는 포춘의 데이비드 A. 캐플런 David A. Kaplan과 기나긴 공직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네이더는 자신이 ‘다국적 기업의 탐욕’이라고 칭한 문제, 골칫거리 기술 및 진보정치의 실패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생기와 재치가 넘치고,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있고, 때론 고집스럽기도 한 네이더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과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 Ansel Adams를 만난 이야기, 100만 달러 이상의 시스코 주식을 보유했던 이야기를 비롯해 그가 어떤 계기로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어떻게 그가 백악관에서 열린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큰딸 결혼식에 참석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2000년 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은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캐플런: 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자동차는 어머니의 코베어 컨버터블 Corvair convertible이다. 차 안에서 나는 매연 냄새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창문을 약간 열어놓고 운전했다.
네이더: 매연 때문에 결국 그 차가 리콜됐다(웃음).
우리는 이제 안전기준을 당연하게 여긴다. 과거 당신이 보여준 급진주의가 이제는 매우 진기하게 느껴진다.
리콜, 안전벨트 등은 성공사례다. 그런 기준을 다시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안전기준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가장 대중적인 형태의 저항은 아니다. 특히 지난 15~20년 동안 소비자 문제에 있어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차에 대해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모두 그런가?
거의 모든 것이 그렇다. 소비자들은 보험, 신용, 은행, 식품, 에너지, 부동산에서 소외됐다.
엘리자베스 워런 Elizabeth Warren 민주당 상원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데다 거침없다. 워런은 경제 금융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전면에 등장했다. 돈이 돈을 버는 상황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심했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상원과 조화를 이룰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고집이 꺾일 수도 있다.
워런에게도 직접 이야기했나?
지난 7개월 동안 3번 정도 이야기한 것 같다.
워런이 당신의 계승자라고 생각하나?
그녀도 자신이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권리가 따로 있다. 20년 전 함께 레드라이닝 Redlining *역주: 은행들이 지역 및 소득수준에 따라 차별 대출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 운동을 하고, 은행 조사를 했을 때 그녀는 하버드대 교수였다. 거침없는 워런의 모습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로스쿨 교수 중 워런처럼 강력하게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워런을 대선 후보로 지지하는가?
만약 그녀가 대선 출마를 원한다면, 당연히 지지발언을 해줄 생각이다.
힐러리도 지지하나?
절대 안 한다.
그냥 확인 차 묻겠다. 워런이 어떤 대선 후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정서적으로 국민들에게 호감을 살 것이다. 버니 샌더스 Bernie Sanders *역주: 미국의 진보파 무소속 상원의원는 언변이 너무 화려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연설할 때 열변을 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아서 좋다”며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안 좋으면, 무슨 말을 한들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샌더스의 대선 출마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예비선거에는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불만스러운 게 많다.
샌더스를 구시대적이라고 평가한 것이 놀라운데.
오늘날의 기준에서다. 1912년이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샌더스처럼 그렇게 감정적이지 않다. 수천 명의 학생에게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해도 그들은 그저 무표정이다. 이미 미디어에서 최악의 것들을 봐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좋아, 그럼 너희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뭐지?”라고 묻는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질문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이 뭐라 대답했나?
요즘 대학생들은 민족, 인종, 성별과 관련해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흥분한다. 그러나 빈민가 등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해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다.
왜 그런가?
화면 중독(addiction to screen) 때문이다.
‘아랍의 봄’이 당신에게 큰 인상을 남긴 것 같다.
그렇다. 독재체제를 타파하는 데 시위는 첫 번째 필수요건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봐라.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전혀 조직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광장에 나오지 않았나.
하지만 그것만으론 효과가 없다. 이제는 어떤 주제로 공고를 내든 50명도 의회에 모으기 어려워졌다. 외부 강사를 초청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고 해보자. 학생들에게 공짜 피자를 나눠주지 않으면 애초에 모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 연금, 교육, 기업사기 등의 분야에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민운동가들을 하버드 로스쿨에 초청해 몇 시간 동안 자리를 함께했다. 피자를 나눠 먹으며 그들을 소개해야 했다.
시대가 그렇게 변한 건가? 2000년 대선 이후 사람들이 당신을 보이콧 하려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아니다. 그건 이제 고대 역사가 됐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다. 이제 사람들은 워터게이트나 베트남전을 펠로폰네소스 전쟁만큼이나 옛날 일로 여긴다.
이제 랠프 네이더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닌가?
간접적으로 대답하면, 미디어에서 멀어지면 사람들 눈에서도 멀어진다.
안셀 애덤스와 알버트 아인슈타인
지금의 ‘랠프 네이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 나는 누군가 친구들을 괴롭히면 참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누군가가 학대나 폭행을 당할 때, 실제로 눈물이 났다.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역주: 노예로 팔린 한 흑인 남성이 다시 자유인으로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로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작품상을 수상했다이나 심지어 ‘노마 레이 Norma Rae’ *역주: 방직공장에 다니는 여성 노동자가 노동운동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그린 미국영화 같은 영화를 보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끊임없이 그런 동정심 혹은 분노를 느끼나?
보수주의 운동의 창시자 폴 웨이리치 Paul Weyrich가 이렇게 분노를 달고 사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웃음). 나는 매일 3개의 신문을 읽고, “세상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뭔가 해야겠어”라고 말한다. 매일 스크랩하는 기사만 해도 115개나 된다.
특히 자동차 안전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나?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그런데 나를 태워준 트럭 기사들이 사고현장에 가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항상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또 고등학교, 대학교 때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사망한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후 의학과 법에 관한 세미나를 위해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이 후에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Unsafe at Any Speed)’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교통사고가 날 때마다 사람들은 운전자 탓을 했다. 졸음운전, 음주운전 등 갖가지 이유를 댔다. 그러나 나는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그 후 운전자-고속도로-자동차 상호작용에서 인간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봤다.
어디서 그 문서를 봤나?
그 문서는 자동차 안전 연구 보고서로 50년대 국방부의 자금 지원으로 작성됐다. 당시 미 공군이 한국전쟁이 아니라 고속도로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동차 사고에도 무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화가 나더라.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의 독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나?
모두가 차를 이용하고, 모두 한 번쯤은 사고를 경험했을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나. “뉴욕 양키스에 대한 책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로 만들겠어. 양키스 팬들이 250만 명이나 되니까.” 내 책이 그 정도로 잘되진 않았다.
자동차 업계가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나?
텍사스의 쉐보레 딜러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코베어 신모델 출시 기념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사인을 해주면 보답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코베어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비에 사인하겠다”라고 말했다.
차를 얻어 타고 다닌 이유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재미도 있었다. 여름에는 캘리포니아에 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 급식소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셀 애덤스를 만나게 됐나?
어느 늦은 밤 요세미티에 처음 갔다. 텐트를 가져가지 않아서 그의 집 현관에서 잠을 잤다. 그때는 누구의 집인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나를 깨워 식사를 줬다. 정말 행운이었다.
멋지다!
더 멋진 일도 있었다. 프린스턴에 다닐 때다. 4학년을 제외하고 학생들이 차를 몰고 학교에 오는 것이 금지됐다. 다만 예외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학생들은 가구를 들여올 때 차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차를 가져왔다는 말인가?
그렇다. 당시 나는 2학년이었고, 1953년이었다. 기숙사를 떠나 나소 스트리트 Nassau Street에 가고 있었는데, 파자마 차림의 어떤 남자가 옆으로 지나갔다. 순간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옷을 입는 사람인지는 모두 알지 않나.
여전히 차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
당시 어떤 종류의 차를 얻어 탔나?
알다시피 이제 모든 차에 안전벨트가 있다. 하지만 나는 소형차는 타지 않는다. 나를 태우는 사람의 차가 미니 쿠퍼 Mini cooper라면 곤란하다.
자신을 최악의 카풀 멤버라고 생각하나?
당신도 도요타 프리우스 Toyota Prius 등 시계가 나쁜 자동차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무인 운행 자동차(driverless car)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차를 사진 않을 거다. 로봇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프린스턴과 동기들
왜 프린스턴을 선택했나?
도서관과 프리셉트 precept 시스템 *역주: 정규 수업시간 외에 교수와 함께 정규 강의에서 다룬 내용을 실습하는 시간이 좋았다. 강의 외에도 매주 9~10명의 학생과 두 번의 프리셉트를 한다.
프린스턴의 이팅 클럽 eating club *역주: 클럽마다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친분을 쌓는 사교 모임과 계급구조가 불편하진 않았나?
고등학교, 예비학교로 나누는 것도 다 구분 아닌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프로스펙트 클럽 prospect club이라는 반항아들의 모임이 있었다. 동기 중 5% 정도 이 모임에 참석했는데 우리는 정치 토론도 하고 시도 썼다. 인종에 상관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흑인 학생도 한 명 있었고, 라틴계도 두 명 있었다.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라틴계 학생은 보통 남아메리카 국가의 독재자 자녀인 경우가 많다.
프린스턴 동기들과 여전히 연락하나?
그렇다. 우리 기수는 20세기 가장 훌륭한 졸업생들로 평가받는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 덕분이다. 1990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서 나는 “우리 동기들이 모여 뭔가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온갖 인재들이 다 모여 있으니”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프린스턴의 신동55(Princeton Prodigy’55)’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프린스턴 학생에게 인턴십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졸업생들이 연구 장학금을 받고 전국 시민단체-자산단체나 무료급식소가 아니라 체계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한다-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효과가 있었나?
캠퍼스 취업지원센터보다 더 많은 학생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제 이 단체는 ‘프린스턴 졸업생 단체(Prinston Alumni Corps)’라고 불린다. 93년 졸업생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번 돈으로 캠퍼스 내에 본부로 쓸 수 있는 큰 건물을 지어줬다.
스티브 잡스와 리처드 닉슨
스티브 잡스를 만난 적이 있나?
없다.
스티브 잡스가 당신의 지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중국에서만 90만 명의 노동자를 거느리는 사람이라면 나라도 날 안 만날 것 같다.
네이더 돌격대(Nader’s Raiders) *역주: 네이더의 협력자로 일하는 젊은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 그룹는 여전히 존재하나?
이젠 역사에나 존재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너무 내 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 모임은 언제였나?
1973년쯤이다. 누가 그 이름을 처음 만든지 아나? 빌 그라이더 Bill Greider 기자가 워싱턴 포스트에 근무할 때 지었다. 그는 돌격대가 미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 FTC)를 상대로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을 봤다. 돌격대 중 한 명은 닉슨 대통령의 딸 트리시아 닉슨 Tricia Nixon과 결혼한 에드 콕스 Ed Cox였다. 그 당시 그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1971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콕스와 닉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나?
그렇다. 리시빙 라인 Receiving Line *역주: 파티를 주최한 사람이 파티장 입구에 한 줄로 늘어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에서 닉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 네이더 돌격대!”라고 말했다. 그때 “아니다. 닉슨 돌격대다”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런 다음 그는 “아침에 토스터가 고장 났을 때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어색한 사람이었다.
불쾌하게 듣지 않길 바란다. 2000년 대선 때문에 당신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은 당신과 리처드 닉슨의 이니셜이 같다고 한다.
차라리 정규 간호사 (Registered Nurse)와 같다고 하는 게 낫겠다.
이메일과 전자기기
여전히 이메일이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나?
그렇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메일을 훑어보고 전화받고 하다보면 바로 점심시간이다.
노트북 컴퓨터, PC, iPad는?
만져본 적도 없다. 지금도 타자기를 쓴다. 폭풍우가 쳐서 전기가 다 나가면 일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연락하나?
내 사무실로 전화하면 된다. 24시간 항상 전화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음성메일은 안 된다.
비행기를 기다릴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그보다 상상하고 사색하기 더 좋은 시간은 없다. 나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의 책을 좋아한다. 그가 사교모임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은 누구와 함께 살죠?”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상상력과 함께 산다”고 답했다.
프린스턴 출신이 설립한 아마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고객이 아니지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불행히도 우리 동료들이 거길 이용하더라.
플로리다와 2000년 대선
앨 고어와 2000년 플로리다 선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렇다. 그가 나 때문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뿐이다”라며 사람들의 말을 그냥 무시한다. 그런 걸 보면 그는 정말 대인배다.
선거 결과는 동률인데 ‘사고’에 의해 승패가 갈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민주당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죄책감을 씻으려 했다.
죄책감을 씻으려 했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하느라 줏대 없이 흔들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옹호하는 분위기에서 (소신 있는 선택을 한) 나에 대해 분노하는 것 아닌가.
2000년 대선에 출마한 걸 후회하나?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내가 포함되지 않은 AP 여론 조사에서도 부시가 이겼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선거에서 당신의 표가 대부분 고어에게 갈 표였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미안한 마음이 드나?
연방 대법원이 개표작업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다면? *역주: 플로리다에서 기술적 결함 때문에 개표가 지연되자, 연방 대법원이 수작업으로 개표하되 최종 기한을 정한 후 그때까지 계산된 득표로 당선자를 결정하기로 발표함 과거의 일을 되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 건 쉽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누군가 한 사람을 물고 늘어지면 그건 차별 아닌가? 고어가 고향인 테네시 Tennessee에서 진 이유는 왜 묻지 않나? 나는 이를 정치적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선거에 출마할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서로에게서 표를 빼앗으려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남의 선거를 망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누구도 남의 선거를 망치는 사람이 아니다.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부시의 대선과 고어의 대선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고어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표를 잠식했을 수도 있다는 데에 어떤 후회감이 드나?
내가 어떤 역할이라도 했다면 후회가 된다. 당시 좋아했던 만화에 어떤 남자가 나오는데, 그는 ‘네이더에게 투표하는 것은 부시에게 투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만화에서 부시가 ‘멋진데? 그럼 나는 네이더에게 투표 해야지’라고 하더라.
좀 달리 질문하겠다. 1999년 사람들에게 랠프 네이더에 대해 물어보면, 그들은 당신을 현대 시민운동의 아버지라며 ‘공공 시민’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제 2000년 대선을 거론한다. 섭섭하진 않나?
진보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들은 친구들 아닌가?
그들 사이에서는 ‘가장 덜 최악’을 택하는 것이 바이러스처럼 번졌다. 민주당 후보가 아무리 별로라고 해도 공화당 의원들보다 괜찮으면 그냥 최악 중에 그나마 덜 최악을 택하는 거다. 그러나 이는 유권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약화하는 거나 다름없다.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의원이 어떤 일이 있어도 유권자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가 아니다. 대기 오염, 산업재해로 사망한 수만 명의 국민들,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근근이 살아가다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일해왔다.
그게 미국이 처한 ‘제3당의 역설’ 아닌가.
미국 진보의 역사를 보면 제3당은 ‘추진체’ 역할을 했다. 자유당(Liberty Party), 여성당(Women‘s Party), 포퓰리스트당(Populist Party)이 모두 그랬다.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정책이 곧 채택됐다. 내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진보주의자들이 이를 전술적으로 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
나는 항상 풍력발전을 옹호해왔다. *역주: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이라 생각하여, 산초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공격했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당신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나?
우리가 통과시킨 모든 법안, 우리가 출범한 모든 기관, 우리가 이긴 수백 개의 소송을 통해 단 한 사람의 힘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 유산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의 단 1%를 달성했을 뿐이다.
그런 실망감에도 집요하게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이 싫증 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나는 이를 ‘시민적 성격(civic personality)’이라고 부른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다. 우리는 계속 발전해간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자기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서 더 잘하게 되는 것이다.
80세가 되면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누굴 닮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성격이 매우 가치 있는 시민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 영웅에게 주는 아카데미상 같은 건 없지만, 언젠가 있었으면 좋겠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실리콘 밸리는 당신 세대 때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미국의 조합주의(corporatism) *역주: 사회 전체를 국가에 종속되는 산업별, 직업별 조합들로 구성하려는 이론를 잠시 비판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
물론이다. 실리콘 밸리는 비구조적이다. 겉치레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모여 위계질서를 세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실수가 허용된다. 그러나 점차 기술을 시시콜콜한 것으로 만드는 게 문제다. 시시콜콜한 앱이 끊임없이 나온다. 30억 달러짜리 인수제안을 거절한 그 회사를 비롯해서 말이다.
스냅챗 Snapchat 말인가?
스냅챗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몇 초안에 사라진다. 그러는 와중에 500만 명의 사람들이 설사와 더러운 물 때문에 죽어가고, 전 세계 80%의 사람들은 경제난에 허덕인다.
좋다. 그래도 실리콘 밸리의 기업가 정신은 맘에 든다는 건가?
그건 좋지만, 실리콘 밸리가 추구하는 우선순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실리콘 밸리는 필수품이 아닌 너무 즉흥적인 물건을 만드는 데 경제적 혜택을 소모해버린다.
앱은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아이들에게 영양분 대신 설탕, 소금, 지방을 주는 것과 같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난 후 전 세계 보건을 위해 힘쓰는 것에 감명받았나?
물론이다.
그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기업에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공익사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나?
불법 독점기업으로서의 성공 말인가?
기업계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게이츠의 아버지를 존경한다. 기업 변호사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정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워런 버핏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몇 년 전 오마하 Omaha에서 열린 대규모 주주회의에 나를 초대한 적이 있다. 그때 내 책을 한 권 팔았다.
워런 버핏은 사악한 기업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그의 팬인가?
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다.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가 책임자였다면 월가는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특히 동경하는 국가가 있다면?
스칸디나비아와 캐나다를 동경하며 자랐다. 요란하게 내세우지 않고 사회 안전망을 튼튼하게 잘 갖췄다는 점이 좋았다. 미국 사람들은 월급이나 주식 배당금 외에 무언가를 받으면, 무임승차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3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주요 산업이 정부 지원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항공우주, 인터넷, 바이오 기술을 비롯해 수조 달러가 넘는 R&D 지원금이 인텔, 시스코 같은 회사에 흘러 들어간다.
돈과 투자에 대한 생각
시스코에 투자하지 않았나?
이젠 아니다. 1년 전쯤 주식을 모두 팔았다. 하지만 주식을 매도하기 전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을 주라고 회사에 압력을 넣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시스코는 45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주주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TV에서 그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시스코의 반응은?
그들은 먼저 “회사 돈이 대부분 해외에 있다”며 해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 자금을 국내에 들여올 때 내야 하는 세금을 없애주면 배당금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부탁할 거 없다. 수십억 달러의 주식을 환매한 걸로 아는데 그런 돈은 다 어디서 왔나?”라고 반격했다. 이제 시스코는 3.6%의 배당금을 지급한다.
얼마나 많은 주식을 보유했나?
1만주가 넘은 적은 없다.
왜 시스코에 투자했나? 네트워크장비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면.
성장주를 원했고, 시스코가 가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회사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하고 싶진 않았다. 독점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기술회사로는 시스코에 유일하게 투자했나?
그렇다. 투자를 상당히 잘했다. 하지만 주당 80달러에서 폭락해 20달러에 팔았다. 나는 그 주식을 (액면분할주식인 것을 고려하면) 주당 7달러 정도에 매입한 셈이다. 그 당시는 주식을 분할하고 분할해서 팔지 않았나.
한때는 시스코가 1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기업이었나?
그렇다. 시스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시스코의 다른 주주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떠났다.
랠프 네이더는 상징적인 인물 아닌가? 미국 기업의 감시관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시스코에 투자한다?
합법적으로 돈을 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스코에 투자한 이유?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돈은 어떻게 쓰나? 알려진 것처럼 여전히 5,000달러로 1년을 사나?
이제는 3만 달러 정도로 산다. 번 것은 거의 다 일에 필요한 데 쓴다.
TV 크기는?
TV가 없다. 사람들이 이제 디지털로 전환하라고 하면 관두라고 말한다. 저녁 뉴스는 해롭고, 하찮은 소식이 넘쳐나며 너무 흥미 위주다.
NBC의 헌틀리와 브링클리 Huntley-Brinkley *역주: 1956년 서로 팀을 이뤄 심야 텔레비전 뉴스의 앵커로 활약함나 CBS의 월터 크롱카이트 Walter Cronkite *역주: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공인으로 불리는 전설적 앵커는 그렇게 하지 않았나?
과거에는 여러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 큰 차이다. 이제는 홍수나 쓰나미 같은 큰 재난에 10분, 로키 산맥에 눈보라가 와도 2분은 떠들어 댄다.
전에 갖고 있던 TV 크기는?
한 이 정도(손을 19인치 정도의 폭으로 벌리며). 흑백 TV였다.
어린 시절과 뉴욕 양키스
야구팬으로 알고 있는데, 경기는 어떻게 보나?
라디오로 듣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듣지는 않는다.
1년에 야구장은 얼마나 자주 가나?
안 간다. 특히 워싱턴에 있는 메이저리그 스타디움엔 가지 않는다. 그 구장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다. 그걸 짓는 데 혈세를 낭비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양키 스타디움은?
그 구장을 상대로도 싸웠다.
여전히 양키스 팬인가?
불행히도 그렇다. 루 게릭 Lou Gehrig과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의 기억은 절대 떠나지 않을 거다. 사무실 벽에 사진이 딱 하나 걸려 있다. 게릭이 야구 방망이를 짚고 서 있는 사진이다.
왜 그인가?
그는 열정을 가르쳐줬다. 또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1941년) 월드 시리즈 World Series에서 다저스가 그 유명한 패스트볼 passed ball *역주: 투수가 던진 공을 포수가 뒤로 놓쳐 빠뜨리는 것 실책을 범했을 때 양키스의 팬이 됐다. 그때 양키스가 거의 지려던 찰나 포수 미키 오언 Mickey Owen이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놓쳐버렸다. 양키스는 다시 살아났고, 게임에 이겼다.
양키스를 응원하는 것은 곧 GM을 응원하는 것과 같지 않나?
나는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지만, 여전히 양키스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내가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응원 팀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웃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5번이나 SNL (Saturday Night Live) *역주: 미국의 대표적인 풍자 프로그램 에 나왔다는 사실을 잊는다(네이더는 한때 SNL 진행자였다). 나는 ‘세서미 스트리트 Sesame Street’에도 출연했다. 요즘도 30~35세 젊은이들은 내게 “어릴 때 TV에서 본 적이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심지어 ‘슈퍼맨’에도 출연했다(1988년 론 마이클스 Lorne Michaels가 제작한 슈퍼맨 50주년 기념 쇼에 나왔다).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
슈퍼맨을 해치려는 악당들에게 가짜 크립토나이트 Kryptonite *역주: 슈퍼맨에 나오는 가상의 광물질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안전 전문가로 나온다.
그렇게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다.
당신 부모님은 랠프 네이더가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셨나?
부모님이 적극적인 표현을 하신 건 아니지만, 내가 한 모든 일에 기뻐하셨을 거다.
자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 있나?
있다. 하지만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느냐, 기업 우월주의 문제를 해결하느냐의 선택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