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실리콘밸리의 ‘보이지 않는 손’

SILICON VALLEY'S STEALTH POWER

벤 호로비츠 Ben Horowitz는 IT업계 젊은 기업가를 육성하고 있다.

by Miguel Helft
Photographs by Nigel Parry


벤처 사업가 벤 호로비츠가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 Menlo Park의 사무실에서 벽에 걸린 사진 속 전설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쪽 벽면에 줄지어 걸려 있는 액자 속에서 앨런 튜링 Alan Turing,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과 같은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들이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또 다른 벽면은 복싱의 전설들을 위한 자리다. 알리 Ali, 프레이저 Fraazier, 포먼 Foreman, 제임스 ‘신데렐라 맨’ 브래덕 James ‘Cinderella Man’ Braddock, 슈거 레이 로빈슨 Sugar Ray Robinson 등의 사진이 걸려있다. 호로비츠는 “우리가 기업가로부터 찾으려는 것을 상기시키는 사진들이다”라면서 “엄청난 천재성과 진정한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덧붙인다.

천재성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천재성이 없었다면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은 없었을 것이다. 용기는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호로비츠는 비전, 창의성, 카리스마 등이 기업 성공에 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창업과 복싱이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경쟁자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펀치를 날리며 돌격하는 복싱과 비슷해서가 아니다. 창업도 복싱처럼 어렵고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잘해도 계속 다시 얻어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호로비츠는 “복싱에서 일단 펀치를 맞으면 아프다. 그러고 나서 간이의자에 앉으면 아드레날린이 사라져 그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된다”며 “그런 후 다시 다음 라운드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호로비츠는 복싱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다운 당한 채 카운트 소리를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는 인터넷 신동 마크 앤드리슨 Marc Andreessen, 그리고 넷스케이프 시절 동료 2명과 함께 라우드클라우드 Loudcloud를 창업했지만 한두 번도 아닌 대여섯 번이나 파산위기에 몰렸다. CEO였던 호로비츠는 결국 라우드클라우드를 일으켜 세웠고, 2007년에는 16억 달러에 이를 HP에 매각하며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만들었다. 앨런 앤드 컴퍼니 Allen & Co.의 CEO 허브 앨런 3세 Herb Allen III는 호로비츠가 “사업을 성공시킨 데에는 그의 성격과 의지가 작용했다”고 말한다. 앨런은 “IT업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도이자 완벽한 성공이었다”고 덧붙인다. 2년 후 호로비츠는 다시 한 번 앤드리슨과 함께 벤처투자업체 앤드리슨 호로비츠 Andreessen Horowitz를 설립하여 27억 달러의 자금을 마련한다. 이를 에어비엔비 Airbnb, 핀터레스트 Pinterest, 페이스북, 스카이프, 트위터와 같은 기업에 투자하여 새로운 사업모델을 통해 당시 배타적이던 벤처투자업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업계 최고로 떠오르게 된다.

이 모든 과정 중 호로비츠(47)는 절친 앤드리슨의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았다. 앤드리슨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말하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타입의 인물이다(호로비츠는 재치 있게 “그가 비욘세라면 나는 켈리 롤런드 Kelly Rowland다”라고 비교한다). 하지만 앤드리슨이 비전을 가지고 회사 이미지를 형성해 나가는 동안 실질적 CEO였던 호로비츠는 조용히 뒤에서 일했고, 차세대 기업가들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는 회사라는 명성을 쌓았다. 호로비츠는 라우드클라우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조본 Jawbone의 호세인 라만 Hosain Rahman, 전 스카이프 CEO이면서 현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토니 베이츠 Tony Bates가 도움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포춘 500대 기업에 속해 온 기업 중 여럿이 호로비츠에게서 조언을 얻는다. 호로비츠의 간단명료하고 정제된 태도와 비난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조언은 종종 인튜이트 Intuit의 회장 빌 캠벨 Bill Campbell과 비교된다. 캠벨은 제프 베저스 Jeff Bezos, 스티브 잡스, 에릭 슈미트 등에게 조언하며 실리콘밸리에서 ‘코치’로 알려진 인물이다. 저커버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사업하는 모든 젊은이에게 벤은 경영의 달인과 같은 존재다”라고 말한다.

호로비츠에게 밸리의 문화가 깊숙이 배어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여러 면에서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다. 극단적 보수주의 선동가로 변신했던 마르크스주의자 아버지를 둔 호로비츠는 버클리 Berkeley 주변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때 학교 풋볼팀에서 뛴 경험이 있다. 팀에서 그는 몇 안 되는 백인 학생 중 하나였다. 아내 펠리시아 Felicia와 멋진 애서튼 Atherton에 사는 호로비츠는 레이더스 Raides의 팬이며, 오클랜드 Oakland의 익숙한 장소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호로비츠는 실리콘밸리의 모임에 참석하기보다는 친한 친구들과 집에서 저녁 바비큐 준비하기를 더 좋아한다(당연히 TV를 통해 복싱경기를 보기도 하고 늦은 밤까지 힙합음악에 빠져 있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호로비츠의 블로그에는 나스 Nas나 카니예 웨스트 Kanye West의 노래에서 따온 가사가 있는데, 이를 이용하여 경영에 대한 조언을 올려둔다. 두 가수 모두 호로비츠와 절친이 되었다. 한편, 호로비츠는 CEO에게 IT업계의 경향, 전략, 경영대학원 지식 등을 ‘속삭이며’ 전달하는 전형적 고문이 아니다. CEO들은 친구를 해고하거나 반발이 거센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비로소 호로비츠를 찾는다. 또한 계획이 잘 진행되었음에도 시장에서 실패에 직면하면 호로비츠를 찾는다. 앤드리슨은 “그때가 바로 CEO들이 심각해지는 시기다”라며 “사람들은 그때 벤을 찾는다”고 말한다. 호로비츠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통찰력의 경험을 모아 제목도 적절한 ‘어려운 것에 관한 어려운 점(The Hard Thing About Hard Things)’이란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딕 코스톨로 Dick Costolo는 트위터의 CEO 자리에 오른 직후 어려움에 봉착했다. 트위터의 사용자는 증가하고 있었지만 회사 내에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주요 이슈 중 하나는 경영방침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몇몇 경영진은 구글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글의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했고, 이베이나 페이스북 출신의 경영진도 나름의 방법으로 업무를 추진했다. 몇몇은 직원과 1대1 회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이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불평등이 생기고, 결과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직원들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호로비츠는 코스톨로의 어려움을 잘 이해했다. 호로비츠도 라우드클라우드 시절 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당시 경영진 교육을 통해 문제에 대응했다. 이후 몇 달간 호로비츠와 코스톨로는 또 다른 친한 고문과 함께 ‘트위터 경영(Managing at Twitter)’으로 알려진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코스톨로는 분기별로 2번씩 약 20명의 경영진에게 6시간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코스톨로가 호로비츠로부터 조언을 구했던 이유는 CEO 업무를 낭만적으로 말하는 호로비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코스톨로는 “그는 매우 현실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만병통치약이나 단점이 없는 선택은 없다”고 덧붙인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UCLA 대학원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호로비츠는 사회진출 초기부터 경영에 대한 직관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1995년 제품 매니저로 넷스케이프에 입사한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동료들은 호로비츠가 조직을 이끄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승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전 넷스케이프 경영진이었던 릭 셸 Rick Schell(현 벤처투자자)은 “호로비츠는 경영 경험이 별로 없었지만 업무를 통해 배운 혁신적인 젊은 직원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호로비츠는 넷스케이프 동료였던 데이비드 바이덴 David Weiden과 함께 ‘좋은 제품 매니저, 나쁜 제품 매니저(Good Product Manager, Bad Product Manager)’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신생사업 경영진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호로비츠는 절망 속에서 썼던 글이라고 말하며 앤디 그로브 Andy Grove의 저서 ‘높은 실적을 겨냥한 경영(High Output Management)’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급격하게 인력을 늘리고 있었다”고 회상하며 “그들 모두 똑똑했지만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좋은 제품 매니저는 제품 자체의 CEO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보이지만, 나쁜 제품 매니저는 스스로를 마케팅 인력으로 생각한다’와 같은 문구를 담고 있는 호로비츠의 글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수업에 사용되었으며 바이덴이 파트너로 일하는 코슬라 벤처스 Khosla Ventures의 홈페이지에도 올라 있다. 드롭박스의 CEO 드루 휴스턴 Drew Houston은 최근 자사 직원들에게 이 글을 나눠줬다.

하지만 호로비츠가 진정한 경영을 배운 곳은 라우드클라우드였다. 1998년 AOL이 넷스케이프를 인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앤드리슨은 호로비츠를 비롯해 넷스케이프에서 오래 일한 팀 하우스 Tim Howes, 이인식 In Sik Rhee과 함께 신생사업에 대해 끊임없이 의논했다. 그들의 결론은 그때 당시로는 상당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바로 기업의 IT와 홈페이지를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설립자들은 회사 이름을 라우드클라우드로 정하고, 넷스케이프에서 최고의 제품 매니저로 잘 알려졌던 호로비츠를 CEO로 앉혔다. 1999년에 설립된 라우드클라우드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선구자로 18개월 만에 직원 600명 규모의 업체로 성장했다. 2001년 초기에 진행된 기업상장은 라우드클라우드 성공의 정점이 되어야 했었지만, 상장은 큰 타격으로 이어졌다. 인터넷 활황세가 무너지면서 라우드클라우드의 고객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회사에 현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기업상장은 호로비츠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루를 더 버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상장 후 첫 분기에 매출 예상치를 크게 밑돌았다. 그 후 구조조정이 여러 번 진행되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호로비츠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9·11테러가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라우드클라우드의 미래도 어두워졌다. 가장 큰 경쟁업체였던 엑소더스 Exodus가 파산했고, 호로비츠는 라우드클라우드도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직원이나 투자자만큼이나 초조해하며 누워있던 호로비츠는 말도 안 되는 회생방안을 생각해냈다. 라우드클라우드 사업 대부분을 매각하고 옵스웨어 Opsware라 불리던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회사를 재건해보는 것이었다. 옵스웨어는 고객의 클라우드 컴퓨팅을 자동화하는 소프트웨어였다.

결국 호로비츠는 라우드클라우드를 6,300만 달러에 매각하기로 EDS와 합의했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직원 중 150명은 EDS로 옮기고, 140명은 정리해고 되며, 80명의 인력만이 남아야 했다. 당시 라우드클라우드 이사였던 ‘코치’ 캠벨의 조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협상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뉴욕 출장을 취소했고 남는 직원들을 한 명씩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산타크루즈 근처에 피서용 모텔 방 40개를 대여한 호로비츠는 옵스웨어 계획을 냉엄하지만 현실적인 말로 설명했다.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날 2명의 직원만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2명을 제외한 78명의 직원은 옵스웨어가 HP에 매각된 5년 후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옵스웨어를 매각하고 14개월이 지난 후 호로비츠는 HP 소프트웨어 부서에서 3,000명 규모의 직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캠벨은 “실리콘 밸리에서 호로비츠만큼 많이 극심한 위기에 직면해 본 인물은 없다”면서 “그때마다 그는 뭘 해야 할지 주의 깊게 계산했는데 이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고 지적한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설립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바로 그 어떤 기업가도 처음부터 좋은 CEO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벤처투자기업들은 신생업체에게 경험이 많은 매니저-실리콘밸리 속어로는 ‘어른 감독(adult supervision)’-를 영입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앤드리슨과 호로비츠는 직접 기업가들을 코치해 CEO가 될 수 있도록 돕기로 했고, 호로비츠가 주된 역할을 맡았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최고지위의 파트너 8명이 근무하는 규모로 성장했고 8명 모두가 운영경험과 네트워크를 갖춘 CEO 출신이거나 창업 경험자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일반적인 벤처투자기업보다 더 빠른 성장세를 기록했고 현재 직원은 100명에 이른다. 그 중 많은 수가 옵스웨어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며 ‘풀 서비스’ 투자기업이 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일반적인 벤처투자기업은 마케팅, 통신 등의 여러 기능적 부분에 대한 지원을 통해 투자대상 기업을 지원하지만,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이러한 지원의 수준을 몇 단계 높였다. 고용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업체가 인하우스 고용담당자를 두고 포트폴리오 업체를 지원하지만, 호로비츠는 기업 스스로가 고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앤드리슨은 “벤이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며 “기업은 스스로 인재를 채용하는 데 능숙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앤드리슨 호로비츠에서 일하는 12명의 고용팀은 자사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이용해 높은 수준의 기술자, 제품 매니저 및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해당 인력이 자격요건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는 인터뷰를 충분히 진행한 후에야 데이터베이스에 인력 정보를 입력한다. 그 결과 신생업체에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고용대상자를 검토하면 성공률이 매우 높다. 현재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6,000명의 인력이 등록되어 있다. 앤드리슨은 이 재능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기업가들이 “2014년에는 이 재능 엔진의 도움 없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벤처투자기업들이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위력과 유명세에 불평을 늘어놓지만, 이미 많은 수가 이 사업 방식을 모방하고 있다. 또한 유명한 통신업계 이사 출신이나 디자이너 또는 기술자를 고용하여 신생업체에 풀코스 서비스를 제공하려 시도하고 있다.

호로비츠는 동료 파트너들과 마찬가지로 업계를 혁신하는 것은 소프트웨어라고 믿는다. 앤드리슨의 말을 빌리자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로비츠는 니시라 Nicira(네트워크 분야 혁신 소프트웨어)나 유저마인드 Usermind(매출, 마케팅, 서비스 통합 소프트웨어)와 같은 기업에 집중한다. 호로비츠는 온라인 화폐인 비트코인 Bitcoin도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으며 카메라 제조업체 라이트로 Lytro, 스피커 및 활동 추적 제품 제조업체 조본 Jawbone, 음악가와 사용자가 랩 가사에 메모를 달 수 있게 해주는 랩지니어스 Rap Genius, SNS서비스 제공업체 포스퀘어 Foursquare 등의 기업에 앞장서 투자한다.

앤드리슨 호로비츠가 성공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이미 블록버스터급 성공을 이룬 사례가 있다. 트위터의 상장, 스카이프와 니시라의 매각 등이 그렇다. 니시라의 경우 호로비츠가 투자한 지 6개월 만에 12억 달러에 인수되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상당 수의 기업가들이 앤드리슨 호로비츠를 자사의 투자업체로 가장 선호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호로비츠는 경영조언을 일종의 원투펀치 방식으로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 먼저 농담조로 자신을 비난하듯 경영실수와 재앙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고는 단순한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곧 미소는 사라지고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눈이 커지며 무서울 만큼 강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이야기한다.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인공지능 및 로봇 신생업체 앙키 Anki의 CEO 보리스 소프먼 Boris Sofman은 “창업은 그렇게 멋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관리해야 할 어려운 세부사항이 있으며 벤은 이를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세부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분명한 사고와 물러서지 않는 의지가 꼭 필요하다. 시애틀의 기업 소프트웨어 신생기업 유저마인드의 CEO 미셸 피스터 Michel Feaster는 이사회에서 호로비츠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한다. 잠재고객 중 75%가 자신의 제품 로드맵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칭찬도 듣지 못했다. 피스터는 “당신은 시장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앞서 있지 않다”며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대답했던 호로비츠의 말을 기억한다. 피스터는 즉시 인재고용 및 제품개발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고 말한다.

겉으로 봤을 때, 호로비츠는 사려 깊고 말수가 적으며 부드러운 매너를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앤드리슨은 호로비츠의 성격이 실리콘밸리를 일궈낸 페어차일드 Fairchild나 인텔에서 칩을 만들어낸 선구자적 인물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앤드리슨은 “그는 못처럼 단단하다”고 평한다. 기업가들은 위기상황이나 어려운 협상을 마주할 때 호로비츠가 도와주길 바란다. 활동 추적기기 조본 업 Jawbone’s UP이 2011년 출시 몇 주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꺼지기 시작했을 때, 호로비츠는 조본의 CEO 호세인 라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라만은 호로비츠가 “만약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을 회상한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라만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대중에게 공개 사과하고 제품에 문제가 없어도 100% 환불해 주겠다고 발표했다. 라만은 조본 제품에 대해 확신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공짜로 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는 선택권을 주겠다”고 썼다. 라만은 “벤이 특별한 조언을 해준 것은 아니다”라면서 “가야 할 방향을 이미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에 이르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어느 토요일 저녁, 호로비츠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긴 팔 레이더스 티셔츠를 입은 채 춤을 추고 있다. 리듬을 탄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카니예 웨스트의 ‘블랙 스킨헤드 Black Skinhead’가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는 IT업계 종사자들이 회의실에서 주로 목격하는 침착하고 언변이 좋은 호로비츠의 모습이 아니다. 또 호로비츠는 자신의 애서튼 저택 뒤편에 지은 큰 체육관에서 친구들과 편하게 지내기도 한다. 체육관 규모는 남자들의 일반적인 아지트보다 두 배 정도 더 크다. 편한 소파와 늘어선 의자가 작은 광고판 크기의 고해상도 텔레비전 스크린 앞에 놓여 있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파트너 중 한 명인 제프 조던 Jeff Jordan은 “오클랜드에서도 들릴 만한” 음향 시스템이라고 평한다. 호로비츠와 그의 처남 카추 조던 Cartheu Jordan이 전날부터 힘들게 준비한 바비큐를 손님들이 깨끗이 먹어 치운다(호로비츠와 조던은 바비큐를 정말 사랑한다. 지난해 세계 최대 바비큐 경연대회인 아메리칸 로열 American Loyal에 참가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캔자스시티에 다녀왔다). 호로비츠와 친구들은 춤을 추며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같이 흥얼거린다. 항상 그렇듯이 모임의 면면이 특이하다. 가까운 친척, 앤드리슨 호로비츠 직원, 고등학교 친구, 랩퍼 한두 명, 호로비츠가 지원하는 기업가들이 모여 있다(자주 참석하는 사람들은 호로비츠 부부와 거의 ‘가족’과 같은 관계이며, 펠리시아가 종종 도시 노숙자를 위해 음식봉사를 하는 샌프란시스코 글라이드 메모리얼 Glide Memorial 교회에 함께 간다).

호로비츠는 어릴 때부터 흑인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자란 곳은 버클리였다. 어머니 엘리사 Elissa는 간호사였고, 아버지 데이비드 호로비츠 David Horowitz는 소위 뉴레프트 New Left라고 불리던 단체의 주도적 회원으로 활동하다 후에 극단적인 보수활동가로 변신한 인사였다. 호로비츠의 아버지는 학문적 자유를 추구하는 학생회(Students for Academic Freedom)를 설립했는데, 그 목표는 학문의 ‘좌편향’을 막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보수적 싱크탱크인 데이비드 호로비츠 프리덤 센터 David Horowitz Freedom Center도 운영했다. 호로비츠의 아버지는 이념적 변신 전까지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을 설립한 휴이 뉴턴 Huey Newton과 매우 친했으며, 1970년대에 호로비츠의 집에서 자주 만났다. 벤 호로비츠는 집에서의 시간과 세 집 건너 살던 가장 친한 흑인 친구와의 시간을 구분하며 자라게 되었다. 호로비츠는 “친구네 가족의 일원과 같았다”고 말한다. 호로비츠는 버클리 고등학교 풋볼선수 중 유일하게 최고난도 수학 수업을 수강했다. 호로비츠는 자신의 책에서 “나는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상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책의 수익금은 미국 유대인 월드 서비스(American Jewish World Service)를 통해 여성들을 돕는 데 쓰일 것이다. 이곳은 호로비츠 가족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자선단체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다른 파트너처럼 호로비츠도 최소한 재산의 절반을 생전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호로비츠는 순자산을 공개하진 않을 것이지만, 수천억 달러를 모았을 것이다. 옵스웨어를 HP에 매각할 당시 호로비츠의 몫은 8,800만 달러였다).

호로비츠는 대학 시절 어느 여름 날, 고등학교 시절 풋볼팀 동료와 함께 더블 데이트에 나섰다. 그 자리에서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학생이던 콤프턴 Compton 출신 펠리시아 와일리 Felicia Wiley 를 만났고 이제 결혼한 지 거의 25년이 되었다. 컴퓨터 과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호로비츠는 당시 가장 각광 받는 회사 중 하나였던 실리콘 그래픽스 Silicon Graphics에서 일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입성한다.

그곳에서 멘토가 되어준 케네스 콜먼 Kenneth Coleman을 만났다. 콜먼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경영자 중 한 명이며 현재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고문을 맡고 있다. 성공에 실패한 신생업체에서 잠시 일한 호로비츠는 로터스 개발(Lotus Development)에 입사했고 1995년 넷스케이프로 옮긴다.

호로비츠는 데드헤드 Deadhead *역주: 미국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의 팬클럽가 그레이트풀 데드 Grateful Dead에 대해 아는 것만큼 힙합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거의 모든 노래의 가사를 외우고 그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호로비츠는 대학 시절 어느 여름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블라인드 데프 크루 Blind-Def Crew로서 랩 앨범을 녹음했는데, 이 노래를 들으려면 카세트가 반드시 필요하다(놀랍게도 호로비츠의 집에는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가 없다). 앨범 설명으로는 가수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왁자지껄한 파티에 하룻밤 참석해보면 자신이 틱톡 Tic-Toc 의 멤버였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하지만 라우드클라우드의 고난이 오기 전까지 랩은 호로비츠의 사업 레퍼토리에 들어 있지 않았다. 어느 날 회사 소속 변호사가 호로비츠를 찾아와서는 모건 스탠리와 골드먼 삭스가 라우드클라우드를 커버리지에서 제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두 은행은 라우드클라우드를 상장시키고는 커버리지에서 제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호로비츠는 “나랑 당신이 다른 것이 무언가 / 좋은 말만 하더니 / 할 일은 하지 않았군(What‘s the difference between me and you / You talk a good one / But you don’t do what you supposed to do)”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해를 돕자면 이는 래퍼 닥터드레 Dr. Dre 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이다(참고로 변호사가 아니라 은행을 비난한 것이다). 그때 이후로 힙합 음악의 제목이 그의 블로그에서 한 부분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1,000만 명이 방문했다. 라킴 Rakim , 제이지 Jay Z, 드레이크 Drake로부터 인용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창업자가 실패하는 이유’ ‘판매원 고용하기’ ‘친한 친구 지위 낮추기’ ‘내부에서 승진시키기’ 등의 제목과 함께 많은 포스트가 올라와 있다. 나스로 알려진 나시르 빈 올루 다라 존스 Nasir bin Olu Dara Jones 는 “벤이 내게 힙합에 대해 알려주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난 수년간, 호로비츠는 실리콘밸리에서 소외받던 흑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흑인 및 라틴계가 IT업계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코드2040 Code:2040과 흑인 기업가를 돕는 뉴미 NewMe’를 지원하고 있다. 호로비츠는 카이저 퍼머넌트 Kaiser Permanente의 CEO 버나드 타이슨 Bernard Tyson 과 함께 더 많은 흑인이 기업 이 사진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최고 리더십 위원회(Executive Leadership Council) 법안에 힘을 쏟고 있다. W.E.B. 듀보이스 연구소(W.E.B. Du Bois Institute)의 소장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 Henry Louis Gates Jr.는 “다양성 면에서 그는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인물이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호로비츠는 모든 인종의 기업가들을 주요 경영자들과 이어주고 친한 래퍼들을 IT 전문가들에게 소개하는 다리의 역할을 해왔다. 타이슨은 “바비큐를 기다리다가 카이저 퍼머넌트의 회장과 CEO가 래퍼 옆에 앉아 심각한 얘기를 나눈 것을 목격할 수도 있고 스스로 실리콘밸리의 아이콘과 함께 앉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게 바로 호로비츠다”라고 덧붙인다.

호로비츠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자신이 칭찬받을 때 어색하다고 말한다. 그는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그러는 것이다”며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아는 지인이 많아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호로비츠는 유능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앤드리슨 호로비츠 사업이 잘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흑인은 “많이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가치 있는 인재 풀”이라고 말한다. 앤드리슨 호로비츠 내 고위인사의 모습은 다른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백인이며 남성이다. 하지만, 이 업체는 자금과 조언을 통해 여러 흑인 기업가를 지원했고, 지원을 받은 기업가들은 호로비츠가 매우 헌신적이라고 말한다. 기업가 네이트 존스 Nait Jones에 따르면, 호로비츠가 존스 자신의 업체이며 식당과 농장을 연결해주는 애그로컬 AgLocal에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해주면서 명함첩까지 공개했다고 한다. 존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벤의 일과 그가 관련된 일은 진정한 다양성을 보장하며 과학 및 기술에 연관된 분야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준다”고 기술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존스는 물론 다른 업계에 종사하는 기업가에게도 호로비츠는 단순히 앤드리슨 호로비츠를 창업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다. 호로비츠가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 창업 회의에서 호로비츠가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수백 명의 젊은 기업가들에게 스타 같은 환영을 받았다. 호로비츠의 미소는 진심임에 분명하다. 호로비츠가 투자자이자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를 즐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자신이 지원하는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호로비츠는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겠지만, 링 안에서 펀치를 맞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련기사



FORTUNE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