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라드 페리고는 유달리 굴곡이 많았던 브랜드이다. 거쳐 간 오너만 4개 가문으로 뛰어난 워치메이커와 경영진을 만났을 때는 하늘 끝까지 가치가 치솟았다가 그렇지 못했을 땐 꽤 오랫동안 침체를 겪기도 했다. 2011년 케어링그룹으로 편입된 제라드 페리고는 2013년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 Constant Force Escapement의 개발로 또다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하늘 끝까지 쏘아 올렸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이름들이 있다. ‘보테 Bautte’라는 시계 브랜드 이름도 그중 하나다. 1791년부터 1906년까지 115년 동안 쓰였던 이 이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워치메이커의 성이기도 했다. 제라드 페리고의 시작은 보테의 역사와 함께 17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무나 화려했지만 너무나 짧았던 탓에, 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기에 더 가치가 커 보이는 보테는 1791년 제네바 출신의 워치메이커 장 프랑소와 보테 Jean-Francois Bautte(1772~1837)가 창립했다. 장 프랑소와 보테는 다른 시계 브랜드 창립자들과는 달리 조금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워치메이커였다.
다른 시계 브랜드 창립자들이 주로 워치메이커 집안에서 유복하게 태어났던 것과는 달리 보테는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아주 이른 나이에 고아가 됐던 탓에 생활이 매우 곤궁했다. 다른 시계 브랜드 창립자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작업용 공구를 가지고 놀며 고급 세공기술을 익히거나 또는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며 심미안을 길렀던 것과는 대조되는 삶이었다.
보테가 처음으로 시계 기술을 익히게 된 건 그가 12살이 되던 1784년, 견습생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각종 지식과 기술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특정 컴플리케이션 기술 하나만 익히는 데에도 십여 년 이상이 걸린다는 악명 높은 스위스 도제 시스템이었지만, 보테는 7년 만에 모든 과정을 끝내 제네바의 슈퍼스타가 된다.
보테는 1791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계를 만들었는데 이 시계를 두고 업계의 호평이 대단했다. 이 시계의 출시는 보테의 재능에 관심을 보이던 몇몇 재력가들이 그를 후원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돼 보테는 1793년 자신의 개인 워크숍까지 열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1세였다.
보테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지역 유지들로부터 입소문을 탄 그의 명성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을 거쳐 이집트, 인도,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1837년 65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보테는 초박형 시계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브랜드로 유명세를 탔다.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도 공주 시절 보테의 워크숍을 찾은 바 있다.
당시 보테 브랜드의 명성은 보테의 장례식 당시 그를 추모했던 인사 면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부터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등 유럽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창립자였던 장 프랑소와 보테가 타계하자 보테 브랜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 프랑소와 보테 사후 그의 아들과 사위인 자크 보테 Jacques Bautte와 장-사무엘 러셀 Jean-Samuel Rossel이 보테 브랜드를 물려받았지만 곳곳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이후 아들인 자크 보테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사위인 장-사무엘 러셀이 그의 아들 자크 러셀 Jacques Rossel과 함께 보테를 이끌었다. 경영상의 혼란과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며 각종 전시회 등에서 수상의 기록을 이어나갔다.
한편 1852년 스위스 라쇼드퐁 La Chauxde-Fonds에서는 27세의 야심 찬 청년 콘스탄트 제라드 Constant Girard(1825~1903)가 제라드 앤 씨 Girard & Cie 시계회사를 설립했다. 콘스탄트 제라드는 다양한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사업을 확장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평생의 사업 동반자이자 아내인 마리 페리고 Marie Perregaux(1831~1912)를 만나게 된다.
콘스탄트 제라드가 마리 페리고를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르로클 Le Locle 지방의 부유한 시계 가문에서 태어난 마리 페리고는 타고난 경영인이었다. 콘스탄트 제라드와 마리 페리고는 1854년 결혼, 회사를 공동 운영하게 된다. 페리고 가문의 인지도가 워낙에 컸던 까닭에 브랜드 이름도 제라드 앤 씨에서 제라드 페리고 Girard-Perregaux(1856)로 바뀌었다.
페리고 집안은 H. 페리고 H. Perregaux 기업을 운영하며 시계제조와 무역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 페리고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경영에 위기가 찾아왔다. 장남인 헨리 페리고 Henri Perregaux가 어린 나이에 기업을 인수했지만 경영 정상화는 요원했고 결국 H. 페리고를 청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제라드 페리고 브랜드에는 엄청난 호재로 작용했다. 마리 페리고에게는 헨리 페리고를 비롯해 세 명의 남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셋 모두 사업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까닭에 이들은 사막의 선인장과 같은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아시아로 뛰어다니며 시계 무역을 했고 이는 제라드 페리고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이 됐다. 이들은 후에 스위스 대부호로 성장했다. 마리 페리고와 그의 세 형제가 제라드 페리고의 경영을 이끌었다면 콘스탄트 제라드는 시계의 품질과 기술 혁신에 치중했다. 그는 1860년에 3개의 평행 브리지를 사용해 만든 투르비용 무브먼트를 선보여 시계 업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투르비용은 중력에 따른 시간 오차를 줄이기 위해 밸런스 스프링 휠을 케이지 안에 넣어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 회전시켜 주는 장치다.
투르비용은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Abraham-Louis Breguet가 이미 1800년대 초(특허 취득은 1801년 6월 26일)에 고안해낸 장치였으나 60여 년이 흐르도록 제대로 제작하는 곳조차 드물었다. 그런 시대에 콘스탄트 제라드는 투르비용 기술을 온전히 구사하는 것을 넘어 응용까지 한 시계를 내놨으니 업계에서 화제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투르비용 기술은 현재에도 시계업계에서 가장 고난이도 기술로 꼽힌다.
콘스탄트 제라드는 이 무브먼트를 장착한 핑크 골드 케이스 회중시계인 스리 브릿지 Three Bridges로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860년에 내놓은 기술로 1867년에 수상한 이유는 파리만국박람회가 매년 열리는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67년 바로 이전 파리만국박람회는 1955년에 개최됐었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제라드 페리고는 스위스 시계업계 대표 브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1880년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Wilhelm I세의 부탁으로 2,000여 해군 장교에게 선물할 손목시계를 제작하면서 또다시 유명세를 탔다. 1889년에는 1860년에 만든 스리 브릿지의 니켈 브리지를 골드 브리지로 대체한 라 에스메랄다 La Esmeralda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또다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승승장구하던 제라드 페리고 역시 1903년 창업자인 콘스탄트 제라드가 타계하면서 하락세로 접어든다. 콘스탄트 제라드 사후 제라드 페리고는 그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트 제라드-갈레 Constant Girard-Gallet가 인수했다.
‘거목 아래에선 큰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표현은 콘스탄트 제라드-갈레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뛰어난 워치메이커 아버지와 타고난 장사꾼이었던 외삼촌들 아래에서 자라난 콘스탄트 제라드-갈레는 회사를 인수할 때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상황이 별로 없었다. 제라드 페리고를 인수한 1903년 그는 이미 47세의 나이였으나 조직의 책임자로서는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는 아버지와 외삼촌 셋이 모두 타계한 뒤였기에 상황은 더욱 안 좋게 흘러갔다.
콘스탄트 제라드-갈레는 제라드 페리고 인수와 동시에 회사에 쌓아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외형을 크게 늘리는 데 주력했다. 이때 그의 눈에 띈 것이 보테였다. 당시 제라드 페리고는 투르비용 부문에서, 보테는 초박형 시계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에 둘의 결합은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보테는 자크 러셀(창립자인 장 프랑소와 보테의 외손자)이 1881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이미 경영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간 뒤였다. 콘스탄트 제라드-갈레는 1906년 보테를 인수해 제라드 페리고로 흡수한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에도 시계 브랜드 간 인수·합병이 많았지만 대부분의 인수 기업들은 피인수 브랜드의 상호를 살려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또 그간 쌓아온 브랜드 가치를 아예 없애는 것보다 여러 브랜드를 체계적으로 구성해 주력 제품군을 나누거나 가격대별 포트폴리오를 짜는 편이 기업 이익에도 훨씬 이득이었다.
실제로 이후 스위스 시계 산업을 장악한 SSIH(Societe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ere)는 인수한 브랜드들을 통폐합시키는 대신 부품사 공유 등의 경영 효율화만 꾀하고 각 브랜드별로 적당한 포지션을 구축·활용해 크게 성장했다. 이는 SSIH와 경쟁 관계에 있던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도 마찬가지였다.
콘스탄트 제라드-갈레는 결국 무리한 외형 확장과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사세가 급격히 기울자 1928년 오토 그라프 Otto Graef(1862~1948)에게 제라드 페리고의 경영권을 팔아버린다.
오토 그라프는 독일 출신의 워치메이커로 어렸을 적부터 스위스를 동경해왔다. 그는 항상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에서 자신의 운이 얼마나 통할지 시험해보고 싶어 했다. 오토 그라프가 그토록 바라던 스위스 땅을 밟은 건 1882년,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그는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최신 시계 트렌드와 기술을 익히며 워치메이커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오토 그라프가 라쇼드퐁에서 자신의 회사를 창립한 건 1893년의 일이다. 당시 그가 세운 회사 이름은 MIMO(Manufacture Internationale de Montres Or)였다. 그는 1928년 제라드 페리고를 인수한 후에는 MIMO와 제라드 페리고의 시장을 나눠 독자적인 브랜드로 관리했다.
보테나 제라드 가문과는 달리 그라프 패밀리는 자손들이 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오토 그라프의 손자였던 장-피에르 그라프 Jean-Pierre Graef나 찰스-에두와르 비르쇼 Charles-Edouard Virchaux는 제라드 페리고의 기술적인 발전을 이끈 것은 물론 제라드 페리고 박물관을 세워 그간의 제라드 페리고 역사와 유물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이들이 주목받는 건 제라드 페리고의 기술적인 발전을 넘어서 기계식 시계의 정확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기계식 시계의 진동수는 1만8,000번에서 2만1,600번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진동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시계의 정확도도 높아진다.
1965년 제라드 페리고는 세계 최초로 시간당 3만6,000번 진동하는 밸런스 휠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이 같은 공로로 제라드 페리고는 스위스 뇌샤텔 Neuchatel 천문연구소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간의 정확도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받았다. 당시 제라드 페리고의 Caliber 32A 무브먼트는 당대 최고의 무브먼트로 평가됐다.
이 뿐 아니다. 1970년에는 스위스 시계 업계 최초로 쿼츠 무브먼트를 산업 생산해 주목을 받았다. 다른 브랜드들이 과거에 안주해 있을 때 제라드 페리고는 세상의 기술 변화를 발 빠르게 포착, 선제 대응한 것이다. 제라드 페리고가 개발한 3만2,768Hz 쿼츠는 현재에도 쿼츠시계 국제 표준으로 쓰인다.
20세기 들어 제라드 페리고 브랜드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라프 가문이었지만, 이들은 1992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사업가 루이지 마카루소 Luigi Macaluso(1948~2010)에게 제라드 페리고 경영권을 매각한다.
당시 브랜드 매각과 관련해 세간에서는 여러 말이 떠돌았다. 제라드 페리고는 쿼츠파동도 비교적 순탄히 넘어갔던 데다가 바로 직전 년인 1991년 브랜드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라 에스메랄다 포켓워치의 손목시계 버전을 내놓아 큰 찬사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재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마땅한 매각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당시 스와치그룹이나 리치몬드그룹의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를 제라드 페리고 경영진이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란 의견도 있었다. 큰 그룹에 속하지 않고서는 브랜드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경영진을 자극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제라드 페리고의 새 주인이 된 루이지 마카루소는 건축학도이자 카레이서를 꿈꾸는 청년이었다. 그가 시계 사업에 뛰어든 건 1975년, 27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시계 관련 첫 직장으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스위스 시계 회사 자회사에 입사하게 됐는데 이때 그는 시계사업에 관련된 많은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다.
회사 입사 7년 만인 1982년 그는 아예 독립된 시계 유통회사를 창립한다. 이때 그는 많은 스위스 브랜드 시계들을 이탈리아에 유통했는데, 그 시계 브랜드 중 하나가 제라드 페리고였다. 급격히 사세를 확장하던 루이지 마카루소는 1992년 제라드 페리고를 인수, 시계산업계에 입문한 지 17년 만에 시계 제조사까지 손안에 넣는다. 이후 그는 여러 시계 부품 회사와 다른 시계 브랜드를 더 인수해 소윈드 Sowind 그룹을 형성, 세계 시계산업계를 형성하는 한 축을 만들었다.
이후 소윈드그룹은 2011년 구찌 브랜드로 유명한 프랑스의 명품회사 PPR(Pinault Printemps Redoute)그룹 자회사로 흡수된다. 루이지 마카루소는 이보다 1년 전인 2010년 별세했다.
PPR그룹의 소윈드 인수가 경영공백을 틈탄 적대적 인수합병은 아니었다. 루이지 마카루소는 이미 2008년에 인지도 높은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 필요성을 느끼고 PPR그룹과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현재 소윈드그룹의 실질적인 경영권은 루이지 마카루소의 부인인 모니카 메랑더 마카루소 Monica Mailander Macaluso가 가지고 있다. PPR그룹은 2013년 회사명을 케어링 Kering그룹으로 변경했다.
PPR그룹에 흡수되면서 제품 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제라드 페리고는 혁신적인 결과물들로 세계 시계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 특히 화제가 된 건 2013년 바젤월드를 통해 선보인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 Constant Force Escapement다.
현재 여러 시계 브랜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탈진기는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를 바탕으로 한다.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는 영국의 워치메이커 토마스 머지 Thomas Mudge가 18세기에 고안해냈다.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너지가 고루 전달되지 않는다는 단점이있다. 때문에 비교적 자주 시계를 열어 탈진기의 이상 유무를 점검해야 했다.
하지만 제라드 페리고에서 선보인 콘스탄트포스 이스케이프먼트는 머리카락 4분의 1 굵기의 실리콘 소재 블레이드를 첨가해 밸런스에 직접 동력을 전달, 시간이 지나도 에너지를 고루 전달할 수 있는 혁신적인 메커니즘을 적용했다. 이론은 2008년 프로토타입 시계로 선보인 적이 있으나 실제 제작에 적용되기까지는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콘스탄트 포스이스케이프먼트는 제작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다.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는 같은 해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rand Prix d’Horlogerie de Geneve) 최고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해 제라드 페리고의 기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