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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CEO’ 허민의 울퉁불퉁 ‘너클볼’ 인생

INSIDE CEO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지난 2013년 9월 1일, 미국 독립리그 마운드에 낯선 동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습투구를 마치고 힘차게 실전 피칭을 했다. 괴짜 CEO로 불리는 허민(38) 원더스 대표가 자신의 평생 소원이었던 ‘야구선수’의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사실 허민 대표는 국내 IT 업계에서 김정주 넥슨 창업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더불어 게임시장을 평정한 벤처 1세대다. 하지만 그는 ‘벤처 1세대’보단 ‘괴짜 CEO’로 더 유명하다. 광란의 학생회장부터 음대 진학, 야구단 창단까지 그의 이력은 일반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포춘코리아가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언제나 꿈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허민 대표의 인생 궤적을 추적해 봤다.


허민 대표가 매스컴의 첫 주목을 받게 된 시점은 그가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허민은 서울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뉴스는 주요 언론사 사회면을 장식하며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괴짜 CEO의 시작… 파격 공약으로 총학생회장 선출

그때부터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광란의 10월’이란 이름의 선거본부를 꾸린 허민은 부족한 자금력과 인력을 극복하기 위해 ‘나 홀로 유세’를 꾸려갔다. 경쟁 후보자들과의 공동 선거유세 대신 학생회관 앞에서 혼자 힙합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 또 대자보가 아닌 인터넷 홈페이지를 활용해 선거 공약을 학생들에게 알려나갔다.

그가 당시 내세운 주요 공약 중 하나였던 ‘가을 축제에 그룹 ‘핑클’ 초청’은 지금도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에피소드다. 이후 서울대 축제는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넘어 학생들의 진정한 축제 한마당으로 변신하게 된다. 기존 운동권 방식의 선거판에 뛰어든 이 괴짜 후보에게 학생들은 열광했다. 결국 그는 몇 차례의 재검표 끝에 간발의 차이로 총학생회장에 선출됐다.

그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과정도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허민은 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오디오 장비에 관심이 많아 오디오 회사를 창업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를 공부할 수 있는 전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서울대 공대에 개설된 ‘음향 공학’ 강좌였다. 그는 서울대 진학을 1차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가 지원하고자 했던 서울대 전자공학과의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던 것. 그러자 허민의 부모님은 전자공학과보다 경쟁률이 낮았던 ‘응용화학부’지원을 권유했고 마침내 1995년 허민은 서울대 응용화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괴짜’에서 ‘괴짜 CEO’로 변신한 허민

파란만장한 대학시절을 보낸 허민 대표는 2001년 5명의 친구들과 공동으로 ‘네오플’이라는 벤처 게임회사를 설립한다. 허민은 네오플 설립 당시만 해도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창업 1년 전인 2000년 만든 소개팅 게임 ‘캔디바’가 쏠쏠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당시 캔디바는 출시 10개월여 만에 10억 원에 이르는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수익은 네오플 경영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성공은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네오플 창업 후 만든 게임 18개가 모조리 실패했다. 자연스레 허 대표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28세 청년 허민이 떠안게 된 부채는 무려 30억 원이었다.

수렁에 빠졌던 허민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게임이 바로 그를 지금의 자산가가 되는 길로 이끌어 준 ‘던전앤파이터’였다. 2005년 8월 출시된 던전앤파이터는 당시로선 생소한 부분유료화 방식으로 운영됐다. 게이머들의 막강한 지지를 등에 업은 던전앤파이터는 서비스 6개월여 만에 회원 수 100만 명, 동시접속자 수 5만 명을 기록하며 최고의 게임으로 떠올랐다.

특히 던전앤파이터는 해외시장 개척에 성공한 1세대 게임이었다. 2008년 중국시장에 진출한 던전앤파이터는 서비스 한 달 만에 중국 온라인게임 시장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동시접속자 수 220만 명, 연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한 던전앤파이터는 지금까지도 중국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허민은 던전앤파이터의 성공으로 단숨에 스타 벤처사업가로 떠올랐다. 2008년 넥슨이 네오플을 3,800억 원에 인수하면서 3,000억 원대 부를 거머쥔 청년 자산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회사를 매각한 허 대표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서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였던 ‘음악’에 대한 도전의지가 다시금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허 대표는 “평생 쓰고 남을 돈을 벌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며 “짧은 인생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고 미국 유학 결심의 이유를 소개했다.

허민은 무작정 뉴욕으로 넘어가 버클리음대 입학 오디션을 치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음악에 대해 관심만 컸을 뿐, 음악에 대한 재능과 지식은 많지 않았다. 합격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도전을 이어갔다. 음악 공부와 함께 6개월간 버클리 음대 입학 담당관들에게 이메일로 자신의 도전의지를 피력했다. 결국 그는 버클리 음대 입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유학생활을 마친 허민은 2010년 한국에 돌아와 투자 지주회사 원더홀딩스(Wonder Holdings)를 설립하고, 자회사인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이크프라이스(현 위메프)’를 창업하면서 현업에 복귀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원더홀딩스’라는 이름이다. 그의 꿈과 도전이 함축된 단어가 바로 ‘원더’이기 때문이다.
허민과 절친인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허 대표는 평소 사석에서 ‘원더’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줄곧 ‘남이 안 하는 원더한 사업, 원더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의 덩치를 키우는 것보단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함축된 단어가 바로 ‘원더’라 할 수 있다.”

사업가에서 야구선수로…허민의 ‘너클볼 인생’

하지만 현업에 복귀한 허 대표는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바로 야구였다. 그의 ‘야구사랑’은 유별나다. 서울대 재학 당시, 허민은 학교 내 아마추어 야구부에 들어가 선수로 활약했다. 또 투수 구질 중 하나인 너클볼을 배우기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에게 수백 통의 이메일을 보냈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 너클볼을 사사하기도 했다.

허민 대표와 친분이 있는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허 대표가 885억 원을 들여 인수한 서울 강남 대형 빌딩에 방문했었을 때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5층은 그냥 지나치더라고요. 알고 보니 이곳에는 허 대표가 꾸민 야구연습장이 있었습니다. 길거리 동전 야구연습장이 아닌 실제와 유사한 야구 연습장 말이죠. 야구에 대한 허 대표의 열정 만큼은 프로야구선수 못지않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허 대표의 야구사랑은 익히 알려진 대로 국내 최초의 독립야구단 ‘고양원더스’ 창단으로 이어졌다. 그는 과거부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프로야구팀 창단은 사업가 한 명의 자산으로 이뤄지기 힘든 게 현실이다. 허민은 순수 사비를 털어 지난 2011년 독립구단 고양원더스를 창단하고 초대 감독으로 ‘야신’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다.

이후 상황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고양원더스는 낙오하고 실패한 야구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찾아주었다. 허민 대표의 지원과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이 더해지면서 ‘공포의 외인 구단’ 선수들은 프로팀 입단이라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고양원더스는 지난 9월 해체됐다. 기업 소유가 아닌 사업가 1인에게 의지하기엔 야구단 운영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허 대표는 매년 30억~40억 원의 개인 사비를 털어 야구단을 운영해왔다.

실제로 고양원더스 해체를 놓고 허민 대표는 고민을 거듭했다. 고양원더스의 감독이자 허민 대표의 멘토였던 김성근 감독 역시 “원더스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원더스 감독으로 남겠다”며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국 허민 구단주는 고양원더스 해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꿈만을 좇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의 결정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허민 대표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야구에 대한 사랑과 도전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허민 대표는 지난 2013년 위메프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홀연 미국 프로야구 독립리그인 캔암리그 소속 락랜드 볼더스에 입단했다. 올해 그의 성적은 1승이다. 지난 5월 독립리그 소속의 퀘백 캐피털스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6이닝 10피안타 4볼넷 1탈삼진 6실점을 기록하며 팀의 12대 9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해 9월 공식 데뷔전 이후 8개월 만에 거둔 값진 1승이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 탓에 허민 대표의 첫 승은 국내뿐 아니라, 현지 언론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허민 대표는 미국에 머물며 야구선수로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주무기는 필 니크로에게 전수받은 ‘너클볼’이다. 사실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허민에게 야구선수로서 불같은 강속구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너클볼은 꽤 유용한 구질이다. 공의 회전이 없기 때문에 바람과 기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타자뿐만 아니라 공을 던지는 투수와 포수 모두 공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렵다. 원하는 곳에 꽂히면 ‘마구’지만 엉성하게 날아가면 말 그대로 ‘배팅 볼’ 수준에 머물게 된다.

어쩌면 그의 삶도 너클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는 너클볼처럼 열정으로 항상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허민 대표의 삶은 ‘너클볼 인생’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그의 삶이 앞으로도 성공적일 것이라 확언하긴 어렵다. 도전에는 그만큼 위험요소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 찬 그의 삶은 세인들이 부러워 할만한 것임엔 틀림없다.

‘괴짜 CEO’ 허민은…
1976년생
1995년 :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 입학
2001년 4월~2008년 8월 : 네오플 대표이사
2009년 : 버클리음대 입학
2010년 5월 : 위메이크프라이스(현 위메프) 설립
2011년 9월~2014년 9월 : 최초 독립구단 고양원더스 구단주
2013년 8월~ : 미국 독립리그 락랜드 볼더스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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