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단기 임대주택의 아버지

[VENTURE] How I Got Started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br>The Father of Corporate Housing

건설업계에 새로운 거주 카테고리를 만든 오크우드 월드와이드의 창업주 하워드 루비 Howard Ruby 이야기.
Interview by Dinah Eng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독신 전용 아파트의 인기가 식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하워드 루비는 완전히 새로운 거주 개념을 고안했다. 기업이 전근을 가거나 프로젝트를 맡게 된 직원들에게 일정 기간 아파트를 임대해주는 ‘단기임대주택(Corporate Housing)’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루비의 사업 경력은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운영하던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됐다. 올해 79세인 그는 현재 미국 내 50개주, 전 세계 86개국에 진출한 오크우드 월드와이드 Oakwood Worldwide라는 세최대 단기임대주택 회사에서 최고경영자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눈에 질병이 있음에도 여배우인 아내 이베트 미미오 Yvette Mimieux와 여행을 즐기며,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그들의 서식지를 사진에 담고 있다. 그가 둘러본 서식지들은 아이들에게 기후변화를 가르치는 곳으로 종종 활용되고 있다. 대공황시대에 태어나 현재 연 매출 6억 달러의 기업을 운영하는 인물에게 그렇게 나쁜 삶은 아니다.

산업 호황의 막바지,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나 자신의 꿈을 꾸곤 했다. 다섯 살 때부터 나는 기업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레모네이드 가판대 운영, 신문 배달, 잔디 깎기 같은 일을 했다. 이후 열심히 공부한 끝에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징병제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곧바로 해군에 입대했다. 구축함에서 군물품 공급 장교로 활동하며 극동지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경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군 전역 두 달 만에 캘리포니아에서 밥 프랭크스 Bob Franks와 알앤비 엔터프라이즈 R&B Enterprises라는 부동산 회사를 공동 설립했다. 1960년 우리는 내 동생 켄 Ken과 에드 브로이다 Ed Broida가 설립한 부동산 개발 회사를 합병해 알앤비 리얼티그룹 R&B Realty Group을 만들었다. 우리 네 명은 각각 500달러씩 출자했고, 배고픈 보릿고개를 근근이 버텨야 했다. 부동산 거래가 한 건이라도 생기길 기도했다. 그러다가 회사 설립 45일 만에 첫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주프로그램 참여와 군 입대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던 60년대에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1965년 토런스 Torrance에 사우스베이클럽 South Bay Club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건설했다. 우리는 ‘재미있는 곳에서 살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최초로 가구가 완비된 독신 전용 아파트를 지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에 힘입어, 다른 지역에서도 수천 세대를 추가로 세울 수 있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했던 우리는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150~250세대 규모의 아파트 건설은 상당한 자본을 필요로 했다. 현재는 체계적인 벤처자본 산업이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투자 자본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도록 콧수염을 길렀던 나와 파트너들은 카드놀이 클럽(Bridge and Canasta Club)을 돌며 사업 설명회를 갖기 시작했다. 당시 5,000달러에서 1만 달러까지 투자를 한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5년 후 사업이 정착되면서, 우리는 은행과 보험회사로부터 대규모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1970년 무렵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더욱 휘말리고 있었다. 우주 프로그램을 위해 캘리포니아를 찾는 엔지니어들이 예전만큼 많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구를 갖춘 아파트를 판매하기 위해 또 다른 수요자를 찾아야 했다.

그때 우리는 기업과 협력하는 방안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가구를 갖춘 아파트에서 벗어나 생활용품과 시설관리를 포함한 풀옵션 아파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단기임대주택은 새로운 개념이었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를 넘어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텍사스와 컬럼비아 특별구(the District of Columbia) 같은 비즈니스 중심지로까지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성공적인 성과를 낸 셈이었다. 많은 포춘 500대 기업들이 곧바로 우리에게 일감을 가져다 주었다. 일부 기업들은 대학 기숙사 같은 외관을 지닌 인턴 사원용 임시 거주 주택을 원했다. 다른 기업들은 전근 가는 부사장들을 위한 고급 주택을 찾았다. 우리는 이 모든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부동산 회사들로부터 추가로 아파트를 임대하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다양한 기업의 니즈에 맞춤식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더 많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 전 세계 기업들은 각자의 니즈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대량으로 임시 거주 주택을 매입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들 기업 고객사와 장기 계약을 많이 맺게 된다. 대략 우리 사업의 75~80%는 대기업과 이뤄지며, 20~25%는 개인 고객이다. 이들은 가족을 방문하거나 새로운 도시로 이사할 때, 비싼 호텔보다 더 저렴하게 한 달가량 머물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1980년대 말 오크우드 코퍼레이트 하우징 Oakwood Corporate Housing 이라는 신규 회사를 차려 단기임대주택 운영을 맡겼다. 부동산 관리 사업은 알앤비 리얼티그룹 이름으로 지속했지만, 건물은 오크우드라는 브랜드를 사용했다. 나는 12~13세 때 오크우드 컨트리클럽 Oakwood Country Club에서 캐디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내가 살면서 봤던 가장 고급스러운 곳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크우드라는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미국 전역에 58개의 사무소를 내게 됐다. 그때 소규모 아파트를 보유한 부동산 회사를 우리 회사의 주택공급망에 추가했다. 1994년 오크우드 월드와이드는 제3자 *역주: 생산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업체 단기임대주택 전국망을 가진 첫 번째 회사가 됐다. 현재 우리는 미국 내 970개 이상의 업체와 해외 1,100개 이상의 업체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해외의 경우 런던과 브뤼셀, 프랑크프루트에서 시작했고, 아시아에선 일본이 처음이었다.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파산하면서 우리는 인력을 감축했고, 가구를 창고에 보관했으며, 가구가 없는 아파트를 임대하기도 했다. 지난 15년간 우리 사업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사건은 IT기술과 세계화다. 우리는 잭 웰치 Jack Welch가 미국의 첫 번째 대규모 콜센터를 인도에 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해외 진출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받은 우리는 한국, 중국, 인도, 그리고 필리핀으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골드만 삭스 Goldman Sachs에게 ‘주택관리는 우리가 맡는 조건으로 주택건설을 함께할 합작 투자 파트너사를 찾아달라’고 의뢰 했다. 올해 우리는 메이플트리 그룹 Mapletree Group을 선택했다. 이 회사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업체 중 한 곳이다. 합작 투자를 통해 우리는 아시아, 유럽 및 북미에서 40억 달러 가치를 지닌 서비스 단기 동산 관리 사업은 알앤비 리얼티그룹 이름으로 지속했지만, 건물은 오크우드라는 브랜드를 사용했다. 나는 12~13세 때 오크우드 컨트리클럽 Oakwood Country Club에서 캐디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내가 살면서 봤던 가장 고급스러운 곳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크우드라는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미국 전역에 58개의 사무소를 내게 됐다. 그때 소규모 아파트를 보유한 부동산 회사를 우리 회사의 주택공급망에 추가했다. 1994년 오크우드 월드와이드는 제3자 *역주: 생산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업체 단기임대주택 전국망을 가진 첫 번째 회사가 됐다. 현재 우리는 미국 내 970개 이상의 업체와 해외 1,100개 이상의 업체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해외의 경우 런던과 브뤼셀, 프랑크프루트에서 시작했고, 아시아에선 일본이 처음이었다.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파산하면서 우리는 인력을 감축했고, 가구를 창고에 보관했으며, 가구가 없는 아파트를 임대하기도 했다. 지난 15년간 우리 사업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사건은 IT기술과 세계화다. 우리는 잭 웰치 Jack Welch가 미국의 첫 번째 대규모 콜센터를 인도에 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해외 진출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받은 우리는 한국, 중국, 인도, 그리고 필리핀으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골드만 삭스 Goldman Sachs에게 ‘주택관리는 우리가 맡는 조건으로 주택건설을 함께할 합작 투자 파트너사를 찾아달라’고 의뢰 했다. 올해 우리는 메이플트리 그룹 Mapletree Group을 선택했다. 이 회사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업체 중 한 곳이다. 합작 투자를 통해 우리는 아시아, 유럽 및 북미에서 40억 달러 가치를 지닌 서비스 단기임대주택을 개발할 계획이다.

오크우드 브랜드는 거의 5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왔다. 우리는 단기임대주택 분야의 최대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호텔 체인과 연결된 장기투숙호텔(Extended-Stay)의 경우, 평균 투숙일이 6일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평균 60일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리는 운영보고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임시거주주택을 이용하는 회사의 재무제표도 같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고객들이 특히 해외에서 주택을 안심하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기업 고객사에게 해외 직원들의 위치, 태풍 및 전쟁 발발 여부도 알려줄 수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고품격 서비스의 일부이다. 아파트를 깨끗하게 청소하느냐의 차원은 이미 넘어섰다.

오크우드뿐만 아니라, 사진은 내가 지닌 열정 중의 하나다. 나는 몇 년 전 색소성 망막염 (Retinitis Pigmentosa) 진단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터널시야(Tunnel Vision)’로 알고 있는 병이다. 65세가 돼서야 병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카메라 렌즈를 통해 가능하면 세상의 많은 곳을 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 가볍게 여겼던 병은 점차 악화됐다. 스키, 골프 또는 낚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서류를 읽을 수 있도록 확대하는 기계가 필요했다. 매일 내 눈은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그 확대기를 상황에 맞게 조절해야 보고 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물이 연두색으로 보이다가, 어떤 날은 보라색으로 보인다. 때문에 출장에 동행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12년 전 캐나다 북부를 방문했을 때, 북극곰의 고통을 본 적이 있다. 얼음이 있는 곳에서 먹이를 찾지 못해 북극곰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국립야생연합(National Wildlife Federation)과 협력해 Climateclassroomkids.org라는 사이트를 개설했다. 거기에 세계 환경 변화에 대한 학습 계획안도 올려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찍은 야생동물들의 사진들이 오크우드 아파트에 걸려 있다. 이 사진들은 고객사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업들은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또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중대한 방식으로 환경에 기여할 수 있는 자금도 갖추고 있다.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나는 대공황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다. 일을 한다는 것이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은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건강문제를 겪게 된다. 일부는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65세 이후에도 계속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My Advice] 나의 충고
하워드 루비
오크우드 월드와이드 창업주, 회장 겸 최고경영자

머리 주변에 4개의 눈을 가져라
경쟁 환경을 잘 살펴 당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해라. 변화와 시장의 방향성에 민감해야 한다.

단순히 고객이 원하는 것을 묻지 마라
고객이 왜 원하는지를 물어라.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한다면, 사업에 대한 비전을 갖고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산업의 활황에만 의존하지 마라
80년대 초반 우리는 휴스턴에 3,000세대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석유 가격이 배럴당 40달러에서 8.5달러로 추락했다. 석유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탓에 지역 경제도 붕괴됐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망했다. 위험은 반드시 분산시켜야 한다.



관련기사



FORTUNE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