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오다·도요토미가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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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았지만 잘 모르는 부분도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표적이다. 조선을 침략한 악인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가 어떤 인물이며 왜 침략을 했는지에 대해선 냉철한 분석을 하지 않고 있다. 대륙침공을 주장한 오다 노부나가와 이를 실천한 히데요시의 생을 알아보고 일본 정권의 특징을 살펴보자.
강의: 박수철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정리: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16세기는 변혁의 시기였다. 일본에선 전국 다이묘(영주)가 할거하며 생존경쟁이 치열했다. 전란이 심해 전통 무사만으론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때 아시가루(足輕)란 신흥세력이 등장했다. 히데요시도 아시가루 출신이었다. 아시가루는 발이 가벼운 사람, 즉 중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주들은 무사가 부족해지자 농민을 끌어들여 병력화했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론 서양의 대항해 시대와 맞물려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이 조총 두 자루를 일본에 전해 전쟁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왜 하필 일본이었을까? 당시 일본에서 채광기술이 발전하며 은이 쏟아져 나왔다. 전 세계 생산량 41만㎏ 중 3분의 1이 일본에서 나왔다. 은을 얻기 위해 포르투갈 상인이 대거 일본에 오면서 총도 함께 전해졌다. 이 같은 대내외적인 변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노부나가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혁명적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 근거 중 하나가 엔랴쿠지 사찰 방화 사건이다. 엔랴쿠지는 중세에 가장 유명한 절 중 하나였는데, 노부나가는 엔랴쿠지를 불 태우고 3,000명에 이르는 이 절의 승려들을 모두 죽였다. 당시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다. 그리고 석불을 가져다가 아즈치 성을 쌓는 자재로 사용했다. 중세엔 용납될 수 없던 일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노부나가를 꼽았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우정국을 민영화할 때 노부나가의 길을 걷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노부나가는 과연 혁명가로 볼 수 있을까? 사실은 이단아에 더 가깝다. 노부나가가 혁명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근황정책이다. 노부나가는 천황을 가까이 하는 근황정책을 펴며 다른 무사 세력을 견제했다. 전통 세력과 타협하며 자기 세력을 넓혀 갔다.

노부나가의 대표적인 혁신 사례로 이야기 되는 ‘다케다 격파(3단 전법)’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다케다 군은 당시 전국 최강으로 손꼽혔는데,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 3,000정을 이용해 다케다 군을 격파했다.

당시 조총에는 한계가 있었다. 부싯돌을 이용한 화승총이다 보니 한 발 쏘는 데 15초가 걸렸고, 유효사거리도 100미터에 불과했다. 한 발만 빗나가도 기마병에게 당하곤 했다. 다케다 군은 여러 차례 조총부대를 이긴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했을까? 노부나가가 3단 전법을 개발해 조총을 혁신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한 문헌은 전하고 있다. 1진이 총을 쏘고 빠지면 2진이 쏘고 빠지고, 다시 3진이 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연속 사격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3단 전법을 전하는 기록은 사료 가치가 떨어진다. 후세에 과장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엔랴쿠지 방화도 그렇다. 악승이라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불가피했을 뿐 신불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후기로 갈수록 실력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초기에 보이던 근황정책도 더 이상 보여주지 않고 무력만 과시했다. 시종일관 이단성을 보였다. 이단아에겐 한계가 있다. 그는 실력 위주 사회를 건설했지만 결국 전통세력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49세에 죽음을 맞았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한국에겐 악인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영웅, 특히 서민들의 영웅이다. 히데요시의 정복자 이미지는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에는 서민성으로 사랑을 받았다. 일본에는 이런 인물이 없었다. 일본은 느슨한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서민이 신분을 뛰어넘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히데요시다.

하지만 서민 이미지도 사실 만들어진 것이다. 살아 생전 히데요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매일 전쟁만 일으키니 사람들이 싫어했다. ‘전쟁 좀 그만하라’는 낙서가 집 앞에 붙을 정도였다. 그의 인기는 역설적으로 그가 죽은 뒤에 높아졌다.

히데요시 정권이 2대째에 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정권을 세웠는데, 민중은 도쿠가와 체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민중은 세금을 걷어가는 정권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은 이에야스를 비판하기 위해 히데요시를 추억했다. 그래서 이에야스와 히데요시를 대비시킨 책이 나왔다. 이 책은 히데요시가 죽기 적전 이에야스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했지만, 이에야스가 결국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민중 사이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 해소와 카타르시스가 인기의 원동력이었다.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에서 벼락출세 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말년에는 어린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희대의 인물로 그려졌다. 히데요시는 근대에 다시 한번 변형됐다. 대외침략을 노리는 군국주의자들이 민중에게 인기 있는 히데요시 상을 가져와 전쟁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노부나가의 특징이 이단성에 있다면 히데요시는 특이성에 있다.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으로 무사 수장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일본은 신분 사회다. 천황은 대물림 되고, 쇼군(무사 일인자) 역시 모두 천황가의 후손이다. 심지어 히데요시조차 쇼군이 되지 못했다. 대신 과거를 속여 관백(관료 일인자)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히데요시의 묵인 아래 나온 어용 자서전에는 히데요시의 외할아버지가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어머니가 천황의 성은을 입었다고 암시되어 있다. 히데요시는 낮은 신분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과 혈연에서 정당성을 찾았다.

노부나가와 달리 히데요시는 종교 권위를 옹호하고 천황도 잘 받들었다. 전쟁을 벌일 때에도 천황의 권위를 이용했다. 자신을 따르면 권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침략했다. 조선을 칠 때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했다. 조선 국왕에게 천황을 알현할 것을 요구했다. 왕이 왔다면 조선을 선봉 삼아 중국을 치려 했던 것이었다.

두 인물은 일본 문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노부나가는 하극상 시대의 인물이다. 가계보다 실력을 중시했다. 그렇지만 결국 전통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히데요시는 실력주의와 전통, 선례의 조화를 모색했고 이는 이에야스에게 계승됐다. 이는 현대 일본인의 장인 정신에도 이어졌다. 꽃꽂이, 다도 등 다양한 기술과 문화예술이 이에모토(家元) 제도로 계승되고 있다. 가문을 중심으로 전통을 이어나가되 우두머리는 반드시 혈연으로 결정짓지 않는다. 실력이 있다면 기꺼이 양자로 받아들인다. 전통과 실력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일본문화의 핵심 키워드다.


박수철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 인문대학 동양사학과에서 석사, 교토대학 문학부 일본사확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寺社)지배와 천황(서울대출판문화원,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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