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피터 시엘의 ‘역행 전략’

PETER THIEL;S CONTRARIAN STRATEGY

사람들은 선동적인 지식인이자 IT 투자자인 피터 시엘 Peter Thiel의 아이디어에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상업적 성공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실리콘밸리는 여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BY ROGER PARLOFF


시엘 재단(Thiel Foundation)의 임원 린디 피시번 Lindy Fishburne은 “돼지나 소를 도축하지 않고도 가죽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시엘 재단이 기부한 35만 달러로 사업을 시작한 신생업체 ‘바이오가공(biofabricated)’의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모던 메도우 Modern Meadow라는 이름의 이 업체는 생체조직 검사를 통해 동물의 가죽과 근육 샘플을 얻은 후, 이를 시험관에서 발육시켜 실제 가죽과 고기를 만든다. 시엘 재단은 브레이크아웃 랩 Breakout Labs이라는 범상치 않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 2년간 19개 미래형 신생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왔다. 모던 메도우도 그중 하나다. 전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자선재단이 이윤추구 기업에 비과세 자금을 기부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시엘 재단은 여느 자선재단이 아니다. 수십억 달러 자산을 보유한 투자자 피터 시엘이 지난 2006년 설립한 단체다. 시엘이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슈를 선택하려 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이슈가 광범위한 의미의 다른 문제들이 관심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엘은 2008년부터 에세이, 강연, 토론 등을 통해 ‘기술 부진 이론(tech stagnation thesis)’을 발전시켰는데, 브레이크아웃 랩은 바로 이와 관련한 역행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 과학과 통신 분야에서 인류가 놀라운 성과를 이룬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에너지, 교통, 바이오기술, 질병예방, 우주여행 등 분야의 성과가 불길할 만큼 부진했다는 점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부진 탓에 1973년 이후 실질 수입 및 임금이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렀으며, 부의 불평등도 더 심각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40년간의 기술 업계를 돌아보면, 비트의 세상에선 엄청난 진보를 이뤘지만 원자의 세상에선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시엘의 벤처 투자업체 파운더스 펀드 Founders Fund의 광고 내용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원했지만, 140자라는 글자 수(트위터)를 얻었을 뿐이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엘이 이끄는 브레이크아웃 랩은 ‘실물 기술(hard tech)’ 신생업체-웹사이트, 소셜미디어 또는 IT 기술과는 거리가 먼 벤처업체-뿐만 아니라 엔젤 투자자나 정부도 지원하기 힘든 위험한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업체들이 자사 기술의 효과를 입증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지원하고, 그 후에 일반적인 벤처투자를 유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모던 메도우는 지난 6월 어렵사리 그의 바람을 현실화했다.

수사학적 재능이 뛰어난 선동가이면서 두둑한 자금까지 갖춘 시엘은 철학, 사학, 경제학, 인류학 분야의 광범위하고 기이한 글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 내 현존하는 최고의 사회참여 지식인이 될만한 바탕을 마련했다.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이나 노먼 메일러 Norman Mailer로 대표되는 역할을 이어받고 있다. 물론 베블렌이나 메일러와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시엘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동성애자이자 기독교 신자이며, 예상하기 매우 어려운 시각도 가지고 있다. 문학이나 학문적 성과보단 상업적인 부분에서 대부분의 명성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1998년 전자상거래 결제업체의 선구자 페이팔 PayPal을 창업했다. 2002년 이베이 eBay가 15억 달러에 페이팔을 인수했지만, 경영학도 사이에선 이 성공보다 더 많이 알려진 사실이 있다. 바로 시엘의 설득으로 페이팔 사업에 참여한 인물들이 향후에 성취한 업적이다. 페이팔 마피아 PayPal mafia로 알려진 이들은 페이팔 이후에도 수많은 유명기업들을 설립했다. 그중 기업가치가 10억 달러를 넘는 업체가 최소 7개에 이르는데, 테슬라 Tesla와 스페이스엑스 SpaceX(공동창업자 엘런 머스크 Elon Musk), 링크트인 LinkedIn(리드 호프먼 Reid Hoffman), 유튜브 YouTube(스티브 첸 Steve Chen, 채드 헐리 Chad Hurley, 자웨드 카림 Jawed Karim), 옐프 Yelp(제러미 스토플먼 Jeremy Stoppelman, 러셀 시먼스 Russel Simmons), 야머 Yammer(데이비드 오 삭스 David O. Sacks), 그리고 데이터마이닝 업체 팰런티어 Palantir(2004년 시엘 공동설립) 등이 거기에 속한다.

시엘이 직접 공동설립에 참여한 업체 몇몇이 10억 달러 규모에 이르게 된 것과 더불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투자경력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지난 2004년 안정적인 직업도 가져본 적 없는 20세 하버드 2학년생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에게 50만 달러를 투자해 당시 더페이스북 Thefacebook이라 불리던 업체의 지분 10.2%를 인수한 바 있다. 이 투자로 그는 지금까지 현금으로만 총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2억 달러 규모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여전히 페이스북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개인적이거나 파운더스 펀드를 통해 여러 굵직한 투자를 진행했다. 그중에는 링크트인, 스포티파이 Spotify, 1억 2,000만 달러를 투자한 머스크의 로켓우주선 업체 스페이스엑스 등이 있고, 최근에는 에어비엔비 Airbnb에도 투자한 바 있다.

그의 명성이 실리콘밸리 밖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한 건 그의 존재가 2010년 영화 ‘소셜 네트워크 The Social Network’를 통해 그려졌을 때부터였다. 올해 방영된 HBO의 TV시리즈 실리콘밸리 Silicon Valley에는 피터 그레고리 Peter Gregory라는 이름의 천재 괴짜가 등장하는데, 시엘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어떤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 연설을 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엘의 ‘20 언더 20 20 Under 20’이라는 프로젝트와 상당히 비슷했다. 2010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신생기업을 시작하는 유망한 젊은 기술자 20명에게 매년 10만 달러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달 말 그의 저서 ‘0에서 1까지: 신생기업에 대한 메모, 또는 미래를 개척하는 법(Zero to One: Notes on Startups, or How to Build the Future)’이 출판되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지도 모른다. 책 제목에는 시엘이 구분한 두 가지 변화가 묘사되어 있다. 바로 0에서 1로 가는 급격한 ‘수직적’ 변화와 1에서 n으로 가는 점진적인 ‘수평적’ 변화다. 책의 첫 장에서 그는 “한 종류의 타자기를 100개 생산한다면 수평적 발전을 이룬 것”이라며 “한 대의 타자기를 바탕으로 워드프로세서를 만든다면 수직적 발전을 이룬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커버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제목만 보면 이 책은 기업가정신에 관한 책”이라며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가치를 창조하는 방법에 대한 철학을 담은 책”이라고 말했다.

‘0에서 1까지’는 실리콘밸리 전문가들이 모두 ‘CS183’-지난 2012년 봄, 시엘이 스탠퍼드에서 3개월 과정으로 가르친 컴퓨터공학 학부 수업의 강의번호-라고 부르는 강의를 바탕으로 저술됐다. 강의 당시 25세였던 스탠퍼드 법대생 블레이크 마스터스 Blake Masters가 초기에 허락도 없이 자신의 텀블러 Tumblr 블로그에 시엘의 강의를 하나씩 재구성해 올렸고, 그 결과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번째 강의까지 올리자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브룩스 David Brooks가 강의를 주제로 사설을 게재했고, 마스터스는 그때 시엘의 의중을 확인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시엘은 이메일을 통해 ‘계속 강의를 올려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마스터스의 블로그는 그 후 조회 수 240만을 기록했다. 방문자 수만 56만 명에 달했다.

벤처투자자 마크 앤드리슨 Marc Andreessen은 필자에게 “그 강의노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며 “우리가 만난 모든 기업인들이 그것을 계속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앤드리슨은 첫 번째 현대식 웹브라우저의 코드를 공동제작하고, 벤처투자업체 앤드리슨 호로비츠 Andreessen Horowitz를 공동 설립한 인물이다.

시엘은 분량을 줄이고,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을 좀더 우아하게 가다듬고, 내용을 추가해 지금의 책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를 위해 마스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스터스는 이 책의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마스터스도 최근 자신의 신생기업을 설립했다. 소프트웨어를 적용한 법적 분석 도구 제작업체로, 시엘이 주도해 200만 달러 투자를 유치했다.


시엘(46)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자신의 분신보다 좀 더 젊고 에너지가 넘치며 건강하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그는 검은색 브이넥 스웨터에 카키색 바지와 고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필자를 아침식사에 초대해 개인 요리사가 준비한 채소 오믈렛을 권했다. 자신은 신선한 과일만을 먹었다. 식사 장소는 유칼립투스 향이 진한, 공간이 탁 트인 언덕에 있는 본사였다(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Presidio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선 넓은 창을 통해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엔젤 아일랜드 Angel Island, 알카트라즈 Alcatraz 감옥을 배경으로 팰리스 오브 파인 아츠 Palace of Fine Arts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시엘은 실리콘밸리의 상징이지만, 사실 2002년 말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하며 일했던 인물이다. 페이팔을 매각한 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운틴 뷰 Mountain View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는 “성공적인 기업가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그날 바로 수영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라고 강조했다.

평생 경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인물에게서 기대할만한 발언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던 곳에서 채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게임 준비가 된 체스 세트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수집가가 수집을 목적으로 보관하는 세세한 조각 장식용 세트는 아니었다. 옆에 타이머가 갖춰진 전형적인 스톤턴 Staunton 전문가용 세트였다.

그럼에도 그의 새 책은 경쟁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엘은 “자본주의와 경쟁은 서로 상반된다”며 “완벽한 경쟁 하에선 모든 수익이 경쟁 때문에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가에게 독점이 가능한 곳을 찾으라고 권유한다. 결론에서는 “행복한 기업은 모두 서로 다르다. 특별한 문제 하나를 해결해 독점을 이룬다. 실패한 기업은 모두 똑같다. 경쟁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한다”고 주장했다.

시엘의 친구이자 자주 투자에 동참하는 앤드리슨은 그의 말에 대해 “정확하게 반만 동의한다”고 말했다. 경쟁에 대한 시각이 좋은 예라고 덧붙였다. 앤드리슨은 “경쟁상대가 없는 무언가를 시도해야 한다는 점에선 그의 말이 맞다”며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라면 그것을 따라하려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점에선 틀렸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경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앤드리슨은 시엘이 실리콘밸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피터와 함께하면 ‘좀 더 똑똑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철학, 역사, 정치, 인류의 운명 같은 분야에서 피터는 높은 수준의 토론을 많이 한다. 피터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런 주제를 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칩은 어떤 모습일까?’ 같은 생각만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1967년 10월 서독 프랑크프루트에서 태어난 시엘은 재능이 뛰어난 외톨이였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은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그리고 다시 서독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7번이나 옮겨야 했다. 1977년 일가족이 베이 에어리어 Bay Area에 정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6세에 체스를 시작한 시엘은 12세에 미국 내 13세 미만 부문에서 7위에 올랐다(그는 30대에 접어들 때까지 체스 토너먼트에 출전했다. 인터넷을 통해 5분 안에 한 경기를 두는 ‘블리츠 체스 blitz chess’를 여전히 즐기고 있다).

수학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산 마테오 San Mateo의 공립학교 재학 시절 캘리포니아 수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고교 진학 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의 낙관주의와 반공주의를 존경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으로부터 ‘결국에는 옳은 답을 모두 찾아내게 된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시엘이 스탠퍼드에 입학하던 1985년 당시 학교는 레이건 도서관(Reagan Library)의 유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또 전통적인 그레이트 북스 교과과정(Great Books curriculum) *역주: 서양문화의 기반이 되는 주요 저서를 교재로 활용한다을 수정, 당시 우위를 보이던 다문화 비평을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에 반대한 그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스탠퍼드 리뷰 Stanford Review를 공동창간하고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스탠퍼드 교수였던 프랑스 인류철학자 르네 지라르 Ren Girard의 가르침에 매료되었다. 지라르는 자신이 ‘모방 욕망(mimetic desire)’라 지칭한 개념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을 내놓았다. 모방 욕망이란 주변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향을 의미한다. 지라르의 개념에 따르면 모방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모방을 낳는다.

시엘은 태생적으로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었다. 그는 후에 집단적 생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시장 거품을 피하고, 간과했던 기회를 포착하는 일-헤지펀드 매니저, 창업가, 벤처투자자 등-을 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모방하려고 한다는 지라르의 분석은 매우 흥미로웠다. 시엘은 “수년 동안 스스로 겪었던 다양한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아주 강력한 접근법이었다”고 말했다.

시엘은 대학 때 지라르의 가르침에 매료되었던 좀 더 개인적인 이유도 발견해냈다. 스스로도 주변을 모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 탄 것처럼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스탠퍼드 로스쿨로 진학했고, 그 후에는 최고의 변호사 위치라 할 수 있는 뉴욕 로펌 설리번 앤드 크롭웰 Sullivan & Cromwell의 법인변호사가 되었다.

시엘은 설리번에서 근무했던 시기에 대해 “내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다며 “7개월 하고도 3일 동안 그 일을 계속했다”고 회상했다.

시엘은 ‘청년기의 위기’를 버티던 이 시기에 고등교육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는 로스쿨이 좋았다”며 “하지만 왜 로스쿨을 다녀야 하느냐에 대해선 충분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경쟁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로펌을 떠난 그는 곧이어 크레디트 스위스 Credit Suisse의 시에스 파이낸셜 프로덕트 CS Financial Products에서 파생상품 중개인으로 일했다. 시엘은 좀 더 마음에 드는 직업이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 “틀에 박힌 일”이라는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4년 크리스마스 무렵,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웨스트 코스트 West Coast에 머물던 그는 대학시절 친구인 리드 호프먼과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호프먼은 스탠퍼드 시절 시엘을 ‘극단적인 우파’라고 여겼고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둘 사이는 급격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 모두 철학, 도덕, 정치에 대해 지성적인 논쟁을 벌이는 데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호프먼은 원래 철학과 교수가 돼 책과 에세이를 저술하고, 사회참여 지식인이 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조금 바꾸게 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회참여 지식인이 (책이나 에세이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일반화시켜 보면서, 소프트웨어 업체를 설립해 대중에게 지적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것들은 상업적 모델의 힘을 갖고 있다”며 “그렇게 하면 경제적인 것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쉽게 말하면 이윤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엘은 호프먼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우리는 설립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술업체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곳에서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그 곳이란 실리콘밸리를 의미한다.

시엘은 1996년 초 사업 결정을 내리고 뉴욕을 떠나 멘로 파크 Menlo Park로 이주했다. 그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모아 헤지펀드업체 시엘 캐피털 Thiel Capital을 설립했다.

그는 1년 후 당시 21세였던 루크 노섹 Luke Nosek을 만난다. 노섹은 마크 앤드리슨을 따라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UIUC)를 떠나 실리콘밸리로 온 지 얼마 안된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 웹 기반 달력을 만들 생각이었던 그는 시엘에게 자금유치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시엘은 자신의 펀드에서 1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노섹은 사업에 실패했고, 시엘의 투자금을 날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맙소사, 그가 투자하겠다고 제안하다니’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다른 UIUC 프로그래머 맥스 레브친 Max Levchin은 친구인 노섹에게 시엘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필드링크 Fieldlink라 부르던 암호화 사업과 관련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노섹은 여전히 시엘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레브친을 대동하고 그를 방문했다. 그리고 스탠퍼드에서 시엘이 했던 말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엘은 레브친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고, 공동창업을 제안했다. 시엘과 레브친은 후에 노섹에게 사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노섹은 “이것이 피터의 훌륭한 점”이라며 “그는 친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친분이란 사실상 영원한 것이다. 그때 나는 그에게 ‘내가 모든 걸 망쳤다’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망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화도 냈지만, 망쳤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필드링크는 몇 번 그 사업방향과 사업 명을 바꿨지만 결국 페이팔이 되었다. 시엘과 레브친은 팀을 구성할 때, 최소 자신들 중 한 명이라도 매우 잘 알고 있는 인물을 영입했다. 시엘은 리드 호프먼에게 이사를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또 자신에 이어 스탠퍼드 리뷰 편집장을 지낸 데이비드 삭스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영입했다.

삭스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피터는 절대로 전형적인 경영자가 아니었다”며 “하지만 큰 전략적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올바르게 이끄는 재능이 있었다”고 말했다. 삭스는 2000년 3월 페이팔이 1억 달러 투자금 유치를 진행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닷컴 버블 분위기에 휩쓸린 다수의 직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원하고 있었다. 삭스는 “피터가 모든 이를 설득해 단호하게 투자금 유치를 마감했다”며 “그 며칠 후 시장 거품이 터졌다. 일주일만 더 기다렸다면, 회사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2002년에 이베이가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를 통해 약 5,500만 달러를 챙긴 시엘은 두 번째 도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세부적으로는 헤지펀드 재출범과 벤처투자, 그리고 새로운 10억 달러 규모 업체 설립을 목표로 했다.


2003년 두 번째 도전이 실체화되는 과정에서 시엘은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친구와 동료 몇몇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것이었다. 소문은 급격하게 퍼졌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남을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두는 사안”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몇몇 평론가는 시엘의 커밍아웃이 예전 자신의 글 일부가 위선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스탠퍼드 리뷰 시절, 그는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삭스와 공동으로 ‘다양성이라는 환상(Diversity Myth)’을 저술한 바 있다. 이 책에서 둘은 캠퍼스라는 환경을 다루면서 ‘억압에 대해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억압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992년 한 법학도가 캠퍼스 내 언행 규칙에 대한 항의로 동성애자가 살던 집 밖에서 반대를 불분명하게 외친 적이 있었는데, 책의 한 부분에서 이 법학도를 옹호하는 내용이 논란이 됐다. 시엘과 삭스는 이 책에서 ‘이 법학도의 말 끝에 나온 분노 표출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이런 분노는 공식입장 여부를 떠나 그의 동성애 비난 혐의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1년 뉴요커 The New Yorker가 이 사건에 대해 질문을 했다. 시엘은 자신의 글에 대해 후회 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당시엔 “정체성에 연관된 모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미묘했다”며 “동성애자 경험, 흑인의 경험, 여성의 경험 모두가 다 서로 의미 있게 다르다. 또 이를 과장해 이념적인 문제로 만드는 경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책을 썼던 때에는 스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며 “하지만 뭔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시엘은 몇 년째 안정적으로 만나고 있는 동반자가 있지만, 더 이상의 내용이 지면에 실리는 걸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고통의 악순환을 끊으려고 동성애 반대를 외쳤던 전 법학도도 동성애 경험이 있음을 최근 인정했다. 1992년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그는 필자에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22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시엘은 페이팔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 중 1,000만 달러를 헤지펀드 사업에 투자해 클래리엄 캐피털 Clarium Capital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는 “클래리엄에서 우리가 생각한 크고 거시경제학적 아이디어-혹은 고정관념(idee fixe)-는 피크 오일 이론(peak-oil theory)이었다”며 “기본적으로 전 세계 석유가 사라져가고 있고, 그에 대한 손쉬운 대책-더 많은 석유나 절약, 또는 대체 에너지 그 무엇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고 설명했다. 시엘이 처음으로 기술 부진 가설(tech stagnation thesis)의 일부분을 드러낸 것이었다.

시엘은 벤처투자 부문에서는 친구 호프먼과 함께 엔젤투자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사회관계망 신생기업에 투자했는데, 2003년 호프먼 자신의 링크트인을 시작으로 2004년 페이스북에 투자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한편으로 시엘은 2004년 새로운 신생기업을 시작했다. 사업모델이 너무 극단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실리콘밸리에서 자금을 전혀 유치하지 못했다. 시엘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이를 지원했던 곳은 인큐텔 In-Q-Tel(미국 CIA의 벤처투자조직)이라 불리던 비영리단체뿐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페이팔이 사기범죄-한 때 회사를 존폐위기로까지 몰고 갔다-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했던 접근법 중 일부를 테러방지와 같은 다른 분야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9·11 테러는 이후 결국 체니 부통령과 미국자유인권협회(ACLU) 사이의 논쟁과 같은 이념다툼으로 귀결됐다. 안보를 튼튼히 하되 사생활 침해를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안보를 느슨히 하되 사생활 보호를 강화할 것인가? 내가 걱정하는 건 테러공격이 발생할 때마다 미국자유인권협회가 패배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시엘은 기술적 진보를 통해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도 사생활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이러한 논쟁에서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팰런티어를 설립했다(많은 사람들은 시엘 같은 자유주의자가 시작하기에는 충격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팰런티어는 국가정보기관에 데이터마이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지만, 시엘은 이 서비스의 사생활 침해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고 추적가능성을 높였다고 주장한다. 10년이 지난 후, 팰런티어 서비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그 대상범위가 더 방대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난해 매출의 60% 이상을 민간분야 고객으로부터 창출했다. 최근 투자유치에서 팰런티어의 가치는 90억 달러로 평가됐다.


2005년 벤처투자업체 파운더스 펀드를 설립한 그는 2006년에 시엘 재단 설립 준비를 마쳤다. 재단을 통해 그는 실험적인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단은 1년에 1,300만~1,500만 달러를 기부하고 있다.

초기의 수혜자는 센스 SENSE(Strategies for Engineered Negligible Senescence, 노화방지전략) 연구재단을 설립해 큰 논란을 일으킨 생물노화학자 오브리 드 그레이 Aubrey de Grey였다. 그는 노화를 늦출 수 있는-가능하다면 영원히 늦출 수 있는-재생 치료법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드 그레이는 이메일을 통해 필자에게 ‘1,000세까지 생존할 첫 번째 인간이 지금 살아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고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했다(그는 과거에도 이런 주장을 펼쳤다).

시엘이 노화방지 연구를 지원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가 ‘제한적 낙천주의자(definite optimist)’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일지도 모른다(자신의 저서 ‘0에서 1까지’에서 정의하는 인간형으로, ‘계획과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면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을 의미한다). 시엘은 제한적 낙천주의자를 무제한적 낙천주의자, 즉 ‘미래는 더 나을 것이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는’ 인간형과 대비시킨다. 시엘은 자신이 보기에 미국에 팽배해 있는 후자의 시각을 혐오한다.

논란이 된 두 번째 자선사업은 2008년 시엘이 공동 설립한 시스테딩 인스티튜트 Seasteading Institutue다. 현존하는 정부의 어떤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해상도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뷰 도중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거의 과거형으로 설명하며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실현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시엘의 자선 프로젝트 중 가장 큰 비난을 받은 건 바로 ‘20 언더 20 프로그램’일 것이다. 18세에서 20세 사이의 재능 있는 학생이 신생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10만 달러를 지원하는 이 프로그램은 ‘제한적 낙천주의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면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교육 거품’에 빠져 있다는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대학이 학생을 속여 학위가 실제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 학부생들이 불필요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다. 테크크런치 TechCrunch에 따르면, 전 하버드 학장 래리 서머스 Larry Summers는 이 프로그램을 “최근 10년 동안 가장 잘못된 방향을 잡은 자선사업”이라 혹평했다. 슬레이트 그룹 Slate Group의 회장 제이콥 와이스버그 Jacob Weisberg도 뉴스위크 Newsweek 기고에서 ‘시엘의 추종자는 성인이 되는 시기에 지식 확장을 멈추고 가능한 한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편협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후원자를 모방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남을 돕거나 순수한 지식을 추구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실 이는 소규모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앤드리슨은 “피터가 생각할만한 전형적인 프로그램”이라며 “마치 기존 교육의 종말인 것처럼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들이 있는데, 연간 대상이 겨우 20명뿐이다. 2만 명이 된다면 그때 비판하라”고 반박했다.

부분적으론 재정적 성공을 통한 간접 검증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참여 지식인으로서의 시엘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는 그가 이룬 모든 것을 위협했다. 시엘은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잘 견뎌냈다.

우선 그의 헤지펀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시엘의 피크오일 이론은 클래리엄을 통해 2008년 중반까지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2002년 40달러 전후였던 유가는 거의 140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주식 가치가 급등하고, 새로운 투자자들이 몰려들면서 펀드 가치가 1,000만 달러 정도에서 6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2009년 2월 무렵, 유가는 일시적으로 다시 4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시엘은 부동산거품이 꺼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여전히 과소평가했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 우리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상황이 반전됐을 때도 과민 반응을 하거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때문에 2009년과 2010년 클래리엄의 실적은 형편 없었다. 대부분의 기관투자자들이 떠나갔다. 현재 클래리엄은 약 2억 달러 정도를 관리하고 있으며, 시엘과 지인 및 가족을 비롯한 몇몇 투자자들의 자금만을 운용하고 있다.

반면, 그의 대표 벤처투자기업 파운더스 펀드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처음 자금유치를 마감했던 2005년 5,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운용자금이 지난 3월 5번째 자금유치 이후 20억 달러까지 급증했다. 2007년 이후 파운더스 펀드의 모든 자금유치에 참여한 한 유한책임 투자자는 “연간 수익률이 35~45% 사이를 오가고 있다”며 “같은 시기 벤처펀드(투자유치 마감시기 기준) 가운데 상위 10%까지는 아니더라도 25% 안에는 든다”고 밝혔다.

2008년 금융위기로 ‘시엘의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의 ‘기술 부진 이론’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시엘의 가설은 아직 문자 그대로 가설일 뿐이다. 옥스퍼드에서 이 가설을 두고 시엘과 논쟁을 벌인 케네스 로고프 Kenneth Rogoff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고를 통해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근무하는 다수의 과학분야 동료들은 여러 최신기술 중에서도 나노기술, 신경과학, 에너지 등에 관련된 프로젝트에 진심으로 애정을 쏟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목격해온 만큼 빠른 속도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0에서 1까지’를 통해 기업가들에게 창조의 전환적 행동을 요구하는 시엘의 낙천주의와 그의 기술 침체 이론에서 나타나는 비관주의는 언뜻 보면 상충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후자는 전자의 동기를 유발하는 배경이 된다.

시엘은 필자에게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개도국이 점점 선진국과 유사해질 것이며, 세계화는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는 공통된 시각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주요한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맬서스 Malthus가 예상한 어두운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인 모두가 저연비 자동차를 타면 유가는 1갤런당 10달러에 이르고 환경오염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성장이 멈출 경우 정치불안도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정성은 국가간 갈등을 낳을 것이고, 이는 시엘이 2007년 언급한 ‘세속적 종말(secular apocalypse)’-핵전쟁, 전염병, 기후변화 등 지구 최후의 전쟁 시나리오를 통한 인류의 멸망-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엘은 특유의 침착함과 절제된 목소리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안이 단지 ‘어떤 새로운 기기가 등장할 것인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관련기사



FORTUNE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