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일방적 회식자리가 갖는 역기능

[FORTUNE'S EXPERT] 송길영의 ‘기업문화 이야기’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을 관찰하고 또 관찰해 알맞은 회식 일정을 잡는 것도 직장 상사의 업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회식’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포털사이트의 연관 검색어에는 ‘노래’ ‘건배사’ ‘메뉴’ ‘장기자랑’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회식을 준비해야 하는 조직의 막내들이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들의 애환을 알 수 있겠지요. 소셜 빅데이터 속 연관어로 ‘술집’ ‘횟집’ ‘고기’ ‘맛집’ ‘취하다’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단가가 좀 있는 식당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것이 회식의 전형적인 장면으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의 회식은 어땠을까요? 춘추전국시대의 사료를 보면, 군왕과의 혈연이 기반이었던 봉건제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가장 힘 센 제후가 주도해서 다른 제후들을 한곳에 모았던 회맹(會盟)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때 회맹을 주최한 자는 ‘맹주(盟主)’라 하였고 체결된 조약은 ‘맹약(盟約)’이라 했습니다.

제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충성 맹약을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머리에 넥타이를 질끈 매고 “부장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부르는 박 과장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군요. 그 시대 회맹에 참석했던 제후들은 모두 언젠가 자신도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꿈꿨다고 하니, 박 과장의 현재 야망도 가슴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듯합니다.

회식의 옛 풍경을 엿보고 싶으신가요? 1604년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모아 개최한 공신회맹제의 모습은 지금도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현재로 치면 조선 시대 공식 회식 사진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모임은 선조가 63명의 생존 공신을 불러 공신교서를 주고 공로를 치하한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림에 참석자의 관직명과 생년월일까지 함께 기록돼 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직급과 주민 번호 앞자리가 사진에 태깅되었던 셈이지요. 이날 회맹은 10월 27일 밤 11시부터 28일 새벽 4시까지 5시간 동안 이뤄졌는데 요즘으로 치면 3차나 4차쯤은 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은 회맹이 있고 나서 한참 후인 1607년 2월에 모든 참석자에게 한 점씩 보내졌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회식 사진을 인화해서 모든 사람에게 보내 준 것인데, 요즘 같았으면 이를 실시간으로 카톡 ‘단톡창’에 올렸을 겁니다. 아니면 (정말 싫겠지만) 회사 사람들이 나의 페이스북에 태깅되어 보이는 것이겠지요. 페이스북은 친절하게도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서 자동 태깅해주기까지 하니까 조선 시대보다 수고로움을 많이 덜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63명 가운데 5명이 불참했다는 것이 증거로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를 기록한 그림에는 정확히 58명만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그 유명한 서애 류성룡을 비롯한 5명이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림 설명에는 병이 들었거나 상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류성룡의 ‘서애 문집’에는 녹훈 취소를 요구하고 나서 병을 핑계로 참석을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류성룡이 선조의 회식 참석 명령에 항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식을 주최한 선조로선 아마도 왕권의 실추를 확인한 자리였을 겁니다.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직원에게 부장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장님이 당일 오후 5시에 회식을 하자고 갑자기 말하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소셜 빅데이터에 따르면 직장인에게 기분 좋은 시각은 점심 직전이고 가장 격하게(!) 기분 좋은 시각은 오후 5시 퇴근 직전이라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퇴근 직전에 부장님으로부터 회식 소집을 당하는 건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급행열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후 6시가 다 돼서 회의를 소집하는 것도 매너 없는 행동이기는 매한가지겠지요.

부서 직원들과 부장님이 함께 회삿돈으로-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맛있는 회식을 하는 건 때론 조직의 단합에 순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갈수록 개인 생활이 중시되는 21세기에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내 삶이 좌우되는 건 참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요. 회사와 개인의 계약관계는 근무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수시로 회식을 하는 건 근무의 연장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고요? 부서 회식 때 생긴 부상이 업무상 재해로 판정받은 수 많은 판례가 있다는 걸 아신다면 그런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얼마 전 ‘회사’라는 곳엔 단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연예인들이 기업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며 회사생활을 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회식 장면도 나왔었는데, 회식자리에서 가장 높으신 ‘팀장’님을 향한 구애를 건배사와 삼행시로 풀어내던 팀원들의 재미있는 모습도 연출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다가 한때 대기업 부사장을 지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한 교수님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교수님 휘하에 200여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중 본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만 도맡아 하던 직원도 있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씀이었죠. 이 같은 퍼포먼스는 각자의 피를 술에 섞어 함께 마셨다는 고대 의식이 부활한 제의(ritual)와도 진배없습니다. 외국 문화인류학자들이 보면 한국인의 기이한 라이프 스타일 사례로 꼽을만한 일이지요. 그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부끄러워서 다 못 보고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으니, 다시보기 같은 건 하지 않으셨
으면 합니다.

시내에 있는 직장을 다니면 오후 2시 무렵부터 근처에 있는 학교 동기나 친구들로부터 번개 카톡이 오곤 합니다. ‘오늘 저녁 명동, 우리 동기들 7시’ 같은 번개 모임들이 3시쯤이면 정해지기도 하죠. 그런 날 퇴근을 앞두고 ‘오늘 맥주 한잔 어때?’라는 부장님의 명령 같은 질문이 날아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부장님은 일순간 내가 다니는 회사가 얼마나 전근대적인지 자백하게 만드는, 치욕스런 불참 메시지를 보내게 만드는 원흉이 됩니다. 친구들은 나에 대한 연민을 안주 삼아,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대한 위안을 느끼며 거나한 술자리를 가질 테지요.

회식을 하고 싶으면 부장님은 아무리 늦어도 전날 직원들에게 의사를 물어야 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일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최소한 오전에라도 얘기를 해줘야 위에서 언급한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부장님이 이를 모르고 말한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알고 말한다면 사악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두 경우 모두 나쁘다는 얘기입니다.

자신의 저녁 스케줄이 갑자기 사라져서, 혹은 수험생인 자녀를 챙기느라 신경이 곤두선 아내에게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서, 함께 저녁을 먹을 대상을 물색하다가 부서원들을 제물로 삼는 부장님이 계신다면 영화 제목 ‘나는 악마를 보았다’라는 말도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이제는 나쁜 대물림을 끊어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4직급 2호봉 김 대리의 능력이 진심으로 발휘되어 빛을 발한다면 전 세계 어떤 나라와도 경쟁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성과만을 탐해선 안 되죠. 김 대리는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그리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기에, 부장님은 오늘 한마디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김 대리의 마음을 관찰하고, 관찰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송길영 부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캐는 Mind Miner이다. 소셜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얻은 다양한 이해를 여러 영역에 전달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활자를 끊임없이 읽는 잡식성 독자이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저서로 ‘상상하지 말라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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