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협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포춘코리아가 역대 회장 4인과 좌담회를 열었다. 이민화 1·2대 회장, 조현정 6대 회장, 황철주 8·9대 회장, 남민우 10대 회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벤처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던 시절에 벤처기업을 창업했을 뿐 아니라 벤처기업협회 활동을 통해 한국 벤처산업 육성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4인의 선구자로부터 한국 벤처가 걸어온 길, 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사회(기자): 올해가 벤처기업협회 설립 20주년입니다. 이민화 회장님이 메디슨을 창업해 스타 벤처기업인으로 각광받을 때 스스로 기치를 들고 여러 동료 벤처기업인들이 뜻을 모아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했는데요. 지난 20년간 벤처기업협회가 우리나라 벤처산업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바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민화 회장: 제일 큰 것은 ‘한국적 벤처 생태계’를 만든 것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가 코스닥시장 설립이죠. 우리나라가 (중소·벤처기업을 위한 주식시장을) 일본이나 유럽보다 3년 일찍 설립했는데, 그걸 벤처기업협회가 주도했죠. 그리고 세계 최초로 ‘벤처기업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죠. 1996년, 1997년에 각각 만들어진 코스닥시장 · 벤처기업특별법 그 두 가지가 바탕이 돼 1997년 12월 들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죠. 말하자면 사전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겁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외환위기로 무너진 대기업의 인적자원을 흡수하면서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벤처가 대폭발하는 계기가 됐죠. 지금 벤처기업이 3만 개가 넘었고 벤처인증을 1회라도 받은 기업은 7만 5,000여개에 달합니다. 이들 기업의 매출액 합계가 350조 원이 넘어요. 삼성전자보다 많은 거죠. 조현정 회장이 주장해 만든 ‘천억벤처(연매출 1,000억 원 이상 벤처기업)’도 2013년 말 기준 450개가 넘었죠. 요약하자면 벤처기업협회가 한국의 새로운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결과를 만든 거죠. 벤처 육성 관련 제도와 함께 실질적인 국가 경제 성장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정 회장: 만약 우리가 1995년에 벤처기업협회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때 우리나라에 이민화 회장이 없었다면? 물론 세월이 지나면 누군가 하긴 했겠죠. 그런데 한 2년만 늦었더라도 1997년 IMF 위기 때 국난을 극복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1997년 말 우리나라가 구제금융을 받고 국가 전체가 우왕좌왕하면서, 당시 젊은이들에게 꿈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대기업이 무너지고 일자리도 없어지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벤처라는 용어 정의부터 시작해 코스닥설립, 벤처기업특별법 제정 등 벤처생태계가 조성되기 시작했죠. 그러자 벤처가 충분한 대안이 되겠다는 인식이 생겨났죠. 대기업을 그만둔 사람들이 벤처에 눈을 떴고, TV에서는 ‘벤처가 뭐야?’ 하는 광고도 나왔죠.
그때 벤처가 무너진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기 시작했고, 많은 성공신화도 만들어냈죠. 2000년 한때 코스닥 주가가 2,900을 넘은 적도 있어요. 물론 거품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꿈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멤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벤처기업협회를 만들었더라도 만약 2년만 늦게 출범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그 시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가 세계 13개국 정도 됐는데, 우리나라가 2년 만에 가장 일찍 졸업할 수 있었죠. 여기에 벤처가 대단히 큰 역할을 했죠. 그 시기에 앞장선 분이 (이민화 회장을 가리키며) 이 분이고, 저는 ‘똘마니’처럼 따라다녔죠(일동 파안대소).
사회: '2년만 늦었더라면' 하는 말씀이 크게 와 닿습니다. 1997년 11월 당시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발표하면서 전 국민이 요즘 말로 ‘멘붕’ 상태에 빠져들었죠. 한마디로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 시작된 거죠. 임진왜란 이전에 율곡 이이 선생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외침에 대비하자고 했는데, 결국은 국난을 피하지 못했죠.
이민화 회장: 그분은 주장을 한 거고, 우리는 만들었죠(웃음).
사회 : 어쨌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민화 회장: 운이 좋았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전준비를 한것과 비슷한 운이 아닌가 싶어요. 운은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하잖아요.
황철주 회장: 벤처기업협회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줬어요. 가장 중요한 게 저는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벤처를 통해 유일한 희망이 싹틀 수 있었죠. 그게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으로 작용했고, 지금의 정보기술(IT)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 역할을 했죠.
사회: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 비유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12척의 배가 우리나라 벤처 1·2세대 기업가들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닌 듯싶습니다. 대기업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뀔 수도 있겠지만요.
이민화 회장: 실제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를 따져보면, 절대 규모 측면에서는 대기업이 훨씬 큽니다. 하지만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를 볼 때는 벤처기업 역할이 큽니다. 벤처기업들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죠. 국내 전체 벤처기업의 매출액 350조 원에서 부가가치가 40% 정도 되는데, 그게 연간 15% 정도 성장하고 있어요. 경제성장 기여율이 1%를 넘습니다. 대기업 못지않은 기여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3%대 중반인데 그중 3분의 1가량을 벤처가 담당하는 거죠.
황철주 회장: 1%라는 숫자를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다른 관점에서 1%라는 숫자의 의미를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이든 99%의 결과는 1%의 씨앗에서 만들어지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대기업이 대부분의 (경제적)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걸 만들 수 있는 창조의 씨앗은 벤처에서 나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현재의 경쟁력을 갖추는 데 지혜를 제공해준 게 저는 벤처라고 봅니다.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그때의 벤처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때 1%의 씨앗이 벤처였다는 거죠. '정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거든요.
국내 대부분 재벌기업도 과거 6.25 전쟁 이후 창업에 나섰는데, 당시 그분들에게는 돈, 지식, 자원 등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기업을 창업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1980~90년대 들어) 그런 정신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기업가정신은 사라지고, 기득권만 살아 있는 상황이었죠. 바로 그때 벤처라는 새로운 정신을 만들어냈던 거죠. 그건 보이지 않는, 정말 위대한 가치창출이었다고 생각해요.
사회: 황 회장님의 말씀은 100이라는 결과물이 있다면, 그 99%는 나머지 1%에 의해 이뤄졌다는 뜻이죠. 그 1%가 벤처였다는 말씀이죠.
황철주 회장: 벤처의 정신이 있었고 벤처의 창조와 혁신이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도 큰 결과를 가져갈 수 있었고 진짜 세계시장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조와 혁신이 거의 없었어요. 추격만 있었죠. 그때 정말 그 벤처정신이 만들어졌다는 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황 회장이 발언을 이어가는 도중에 남민우 회장이 조금 늦게 좌담회장에 도착했다. 이날 좌담회의 드레스 코드는 정장이었다. 하지만 남회장은 캐주얼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민화 회장이 단체문자로 통보했지만, 남 회장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남민우 회장: 작년에 청년위원회 위원장도 그만두고(그는 2013년 6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제1기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얼마 전 벤처기업협회 회장직에서도 물러나니까 이제 자유인이 된 것 같습니다. 넥타이 매는 것을 몸이 거부하게 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거죠(웃음).
사회 : 남 회장님은 자유인이 되시고, 신임 정준 회장님은 속박의 굴레를 쓰시게 되는 겁니까(웃음).
조현정 회장: 그래서 우리는 신임 회장을 위로합니다. 축하한다는 말은 절대 안 해요(웃음).
이민화 회장: 정준 회장에겐 위로하고 남민우 회장에겐 축하하고 있죠(일동 웃음).
사회: 역대 벤처기업협회 신임 회장을 선출할 때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2010년 벤처기업협회장에 선임되시고 얼마 후 황 회장님을 뵈었었죠. 그때 회장님께서 “계속 도망 다녔는데 협회 임원들이 하도 쫓아다녀 얼떨결에 맡게 됐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납니다.
조현정 회장: 제가 오더를 받아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며 설득했죠(웃음).
사회: 비단 황 회장님뿐 아니라 남 회장님이 선임될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죠.
이민화 회장: 그렇습니다. 모두 소명의식으로 회장직을 맡은 거죠.
사회: 사실 벤처기업은 자본, 인력, 기술 등 모든 것이 완비돼 있지 않기 때문에 최고경영자가 항상 경영에 몰입해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벤처기업협회 회장이 되면 자기 회사 경영의 상당 부분을 제쳐놓고 우리나라 전체 벤처기업을 위해 뛰어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상당한 소명의식이 없다 면 벤처기업협회 회장을 맡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민화 회장: 다른 단체들은 서로 회장을 하겠다고 경쟁이 치열한데, 우리는 서로 안 하겠다고 도망을 다닙니다(웃음). 이런 단체는 아마도 벤처기업협회가 유일할 겁니다.
남민우 회장: 일종의 ‘숙제’를 하는 기분이죠. 그런데 숙제를 할 때 회사는 더 잘돼요. (대표가) 돌아가면 회사 직원들이 싫어해요. 하하. 농담입니다.
조현정 회장: 저는 회장을 관두니까 회사 주가가 오르더라고요. (웃음)
사회: 실제로 역대 회장님들께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까.
남민우 회장: 회장을 할 때는 회사가 잘나가다가, 그만두니까 어려워진 경우도 있어요(웃음).
사회: 벤처기업협회가 설립된 1995년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고도성장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였는데요. 그때는 전통산업, 굴뚝산업이 한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죠. 혹시 그 무렵 우리나라에 큰 경제위기가 올 거라고 예측한 분이 계신가요.
이민화 회장: 전혀 예측할 수 없었죠.
조현정 회장: 다만 이민화 회장님이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씀은 많이 하셨어요. 산업사회를 넘어 지식정보사회에 맞는 산업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했죠. 그래야 좋은 일자리도 많이 생긴다고 말이죠. 그런 뜻에 공감한 벤처인들이 협회 설립에 나서게 됐죠.
이민화 회장: 추격형 경제에서 혁신형 경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제가 했었죠.
사회: 2000년 전후 벤처 열풍이 절정을 달릴 때는 일반인은 물론 투자자, 기업인 모두가 마치 신세계가 열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얼마 뒤 벤처 거품 붕괴로 국내 벤처기업 전반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오랫동안 벤처산업이 냉각기에 접어들게 됐죠. 벤처기업협회가 ‘패자 부활제’ 같은 제도를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좀체 벤처 열기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남민우 회장: 한마디로 벤처 빙하기였죠.
이민화 회장: 우리는 ‘10년 빙하기’라고 부릅니다.
사회: 그런데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내면서 스마트폰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겨났고, 2009년 KT가 아이폰을 국내에 처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도 모바일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때부터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벤처 창업이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물론 모바일 분야에 심하게 편중됐다는 불안 요소는 있죠. 어쨌든 인터넷 혁명에 이은 모바일 혁명에 따라 핀테크,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신산업이 부상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 벤처기업들과 예비 벤처인들이 어떤 분야에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이민화 회장: 한국의 1차 벤처 붐은 유선 인터넷 혁명이고, 2차 벤처 붐은 모바일 혁명인데요. 아쉬운 점은 우리가 유선 인터넷 혁명은 미리 준비했지만, 모바일 혁명은 다른 나라보다 약 3년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 셈이죠. 게다가 1차 혁명 때는 준비된 제도가 있었는데, 2차 혁명 때는 준비가 안 돼 있었죠. 우리나라가 2000년 전후 세계 최고의 벤처 생태계를 갖고 있었는데, 정부의 벤처 관련 제도가 실패하면서 벤처 생태계가 황폐화한 상태였어요.
남민우 회장: 2003년 정부가 ‘벤처 건전화’라는 정책을 통해 ‘벤처 관치화’에 들어갔죠.
이민화 회장: 벤처 건전화 정책으로 벤처 생태계가 황폐화하고, 정부 규제 때문에 모바일 도입도 3년 늦었죠. 그 차이 때문에 한국이 1차 혁명만큼 붐을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은 이미 세계적인 벤처 붐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획기적이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보다 우선 1차 붐 당시의 환경을 회복하는 게 필요하죠. 모자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보완하면 되죠. 대표적인 것이 창업자 연대보증 문제, 인수합병(M&A) 시장 문제 등이죠.
사회: 지난해 이 회장님을 뵈었을 때 “2000년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 말씀이죠.
이민화 회장: 그렇습니다.
사회: 벤처라고 하면 흔히 IT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IT 중에서도 한국은 소프트웨어 산업이 매우 취약한 상황입니다. 중국 등 신흥국 기업들의 추격 때문에, 한국이 하드웨어만으로는 IT 경쟁력 우위를 이어가기 어렵다는게 지배적인 전망입니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조현정 회장: 지금 세계 톱10 IT 기업 중에서 7개가 소프트웨어 기반회사입니다. 지금의 모바일 시대를 주도하는 기업 중 7개가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사실은 그만큼 소프트웨어에 많은 시장과 미래가 있다는 뜻이죠. 게다가 중국에서는 지금 연평균 350만 건의 창업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IT 분야라는 겁니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의 성공신화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고 있어요. 제가 중국에서 많은 창업이 일어나는 이유를 조사해봤어요. 누구나 꿈만 갖고 창업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기술이나 창업 생태계가 있어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국은 2006년부터 소프트웨어 인력이 연평균 약 50만~70만 명씩 늘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약 450만 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지금 1년에 고작 1만~1만 2,000명 정도 늘어나요. 지금까지 누적치도 약 18만 명에 불과합니다. 중국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450만 명 중에서 누군가는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상품을 만들 수 있어요.
우리는 소프트웨어 인력이 너무 없는 겁니다. 제가 ‘소프트웨어 인력 30만 양성’을 계속 주장해왔거든요. 그 30만 명은 5년치입니다. 5년 동안 30만 명을 길러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수요를 조사해보면 필요한 인력은 10만 명 이하로 나와요. 그건 당장 시급히 필요한 인력입니다. 유휴인력도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들이 창업도 하고, 창업을 해야 세상이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죠.
소프트웨어는 제조업, 서비스업 할 것 없이 모든 산업에 융합적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소프트웨어장이(소프트웨어 전문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장악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해왔던 이야기예요. 그게 아주 빠른 속도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소프트웨어 인력을 왕창 키워내야 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겁니다. 또한 여러 분야에서 ‘융합인력’으로 활약하거나 창업을 통해 글로벌 성공 아이템도 만들어낼 겁니다.
사회: 중국의 IT 인력 배출 및 IT 창업 규모가 엄청난데요. 한국과 중국의 IT 산업 경쟁력이 역전되는 날도 머지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민화 회장: 문제가 심각합니다.
조현정 회장: 중국 IT 산업의 도약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중국 정부가 2000년 무렵부터 중국 전역에 걸쳐 10개 대학교에 소프트웨어 대학을 만들어줬습니다. 그게 씨앗이 돼 인재들을 막 배출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들이 IT 분야 기업을 대거 창업하는 데 나선거죠.
사회: 지금이 모바일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곳은 오프라인 세상인데요. 젊은 벤처인들이 너무 모바일에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모바일을 비롯한 IT 분야 외에 전통산업, 굴뚝산업, 서비스산업 쪽에서도 벤처 창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민화 회장: 산업적인 얘긴데요.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2013년 ‘모바일 퍼스트(Mobile First)’를 얘기했다가 2014년에는 ‘모바일 온리(Mobile Only)’를 얘기했죠. 모든 산업에는 혁신이 일어나는데 혁신이 가장 가열차게 일어나는 분야가 ‘모바일 컨버전스(Mobile Convergence)’ 분야라는 것이죠. 우리는 모바일 혁명의 본질을 이해해야 해요. 그것이 ‘하이퍼 커넥티비티(Hyper-connectivity: 초연결)’를 만들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협력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거죠. 과거가 단독 창업의 시대라면, 이제는 협력 창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죠. 아울러 이를 뒷받침하는 플랫폼이 중요해집니다. 퀄키 Quirky, 테크숍 Tech Shop, 킥스타터 Kick Starter, 아마존 웹서비스(AWS) 같은 것들이 모두 창업자들이 쉽게 창업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거든요. 실리콘밸리 통계를 보면 지난 2000년에 평균 500만 달러가 창업자금으로 소요됐는데, 2011년에는 그게 5,000달러로 줄었어요. 1,000분의 1로 줄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협력 창업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죠. 그 매개체가 모바일 혁명이죠. 모바일 혁명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여기에 세상의 가치들이 연결돼 나가고 있으니까요.
사회: 5년 전에 황 회장님을 만났을 때 “우리나라는 스마트폰 혁명에서 뒤처졌으니 그걸 따라가기보다는 차라리 향후 대세가 될 전기자동차에 ‘올인’하는 게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만약 여기 계신 네 분이 힘을 합쳐 전기자동차 회사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남민우 회장: 망했죠. 5년 전에 전기차 회사 만들었으면 우리 모두 망했지. 이런 척박한 벤처 생태계에서 만들면 망하는 거죠.
사회: 아니, 그래도 네 분은 벤처업계에서 오랜 경험과 경륜을 쌓아왔고 혜안을 가진 고수들인데도요.
남민우 회장: 그래도 망했을 겁니다. CT&T 등 전기차 업체 몇 군데가 잠깐 주목받다가 망했잖아요. 한국은 벤처 생태계가 척박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하면 5년, 10년 적자가 나도 자본시장에서밀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니잖아요. 코스닥 시장에 가서도 이익을 못 내면 바로 퇴출 당하는 판국인데요. 벤처 생태계가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좋아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혁신은 실패합니다.
황철주 회장: 벤처가 성공하고, 창조경제가 만들어지고, 지속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시장’을 만들어줄 수 있는 문화예요.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에서는 창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시장을 봐야 합니다. 시장에서 새로운 창조가 나오는 거지, 기술에서는 모방이나 개선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새로운 시장을 하나 만들자는 화두를 던질 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생태계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장을 만들어줄 수 있는 '리더'가 건강한 벤처 생태계를 만들고, 창조경제를 만들고, 대한민국의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회: 그 리더는 기업가 중에서 나오는 건가요.
황철주 회장: 누구나 될 수 있죠. 정치인도 될 수 있고, 이민화 회장 같은 분이 될 수도 있죠. 무엇보다 ‘철학’이 있는 분이 할 수 있겠죠. 시장이 마련되면 많은 사람과 자금이 모이게 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벤처 생태계입니다. (이민화 회장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저는 개인적으로 이민화 회장이 연구는 그만하시고 시장을 만들어주는 리더가 돼주시면 좋겠어요.
사회: 지금 디지털병원 수출시장을 만들어가는 일을 하시잖아요.
조현정 회장: 그건 너무 작은 거야 (이민화 회장을 비롯해 일동 웃음).
이민화 회장은 정보기술과 의료시스템을 융합한 이른바 ‘디지털병원’을 우리나라의 차세대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난 2011년 의료기관과 의료기기업체 등의 사업추진 연합체인 ‘한국디지털병원수출사업협동조합(KOHEA)’을 설립했다. 아울러 KOHEA 이사장으로서 디지털병원 수출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황철주 회장: 물론 그것도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주는 일이죠. 그런 리더들이 대한민국에 필요한 겁니다. 그래야만 지속적인 벤처 생태계가 마련되고, 더 큰 벤처기업이 탄생하고, 창조경제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기술, 소프트웨어, 모바일 등등 이런 이야기만 해봤자 새로운 발전은 없습니다. 그냥 먹고 사는 정도밖에 안 돼요.
사회: 성공한 벤처기업인들이 후배 벤처기업인에게 투자하거나 멘토가 돼주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창업자가 성공한 다음에 투자자가 되고, 투자자가 새로운 창업자에게 멘토가 돼주는 흐름이 국내 벤처 생태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요. 이게 실리콘밸리형 선순환 구조이겠죠.
이민화 회장: 결국 자생적인 선순환 벤처 생태계 조성이 우리의 다음 숙제죠.
남민우 회장: 이미 조금씩 되고 있죠.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 장병규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 대표, 김범수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 이택경 매시업 엔젤스 대표 등이 후배 벤처기업인들의 투자자 겸 멘토 역할을 해나가고 있죠. 그런 선순환 구조가 더욱 확대되고 메인스트림이 돼야 하죠. 정부의 마중물 정책(지원 정책)보다 벤처 생태계 내부에서 자체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게 가장 바람직하죠.
사회: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 정책을 펴고 있는데요. 이게 일회성 정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창조경제로 전환하는 데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텐데요. 지난해부터 대기업과 연계한 전국 권역별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기업과 연계한 창조경제혁신센터 정책이 박근혜 정부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민화 회장: 잘 되게 해야죠. 어차피 시작한거니까요.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바둑에서 돌을 놓을 때처럼 일단 기준이 되는 착수(着手)를 좋은 착수로 만들어야 하니까 잘 되게 해야겠죠. 좀 무리가 있는 부분도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기업과 벤처의 선순환 구조가 필요한 건 맞습니다. 앞으로 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조현정 회장: 누군가 해야 할 것을 먼저 선도적인 모델로 보여준 것이죠. 대기업들이 처음에는 정부가 ‘옆구리 찔러서’ 하게 됐을 수도 있지만, 자기들도 필요할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낼 수 있거든요. 선배 벤처인들이 후배 벤처인들에게 멘토링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열 곳에 투자해 한두 곳만 성공해도 초기투자를 모두 회수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 더 열정적으로 후배들에게 멘토링하는 겁니다. 그냥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면 선배들도 발을 다 뺄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사회: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말씀이죠.
황철주 회장: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이 돼야죠. 반드시 돼야 합니다(이 대목에서 황 회장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말했다).
사회: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상생모델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요. 만약 황 회장님이 중소기업청장이 되셨으면 반드시 되도록 하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남민우 회장: 훨씬 잘 됐겠지요(웃음).
그 순간 좌담회에 참석한 4명의 역대 회장 외에도 남민우 회장 퇴임 축하 저녁 모임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4명의 참석자도 공감의 웃음을 터뜨렸다. 황철주 회장은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으로 내정됐다가 ‘공직자 주식 백지신탁’ 문제가 예기치 못한 변수로 등장하면서 정부의 제안을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일생을 바쳐 키워온 회사(주성엔지니어링)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대기업 순위를 보면 5~10년 사이에 일정한 물갈이가 일어나는데요. 요컨대 작은 기업이 큰 기업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있는 거죠. 반면 한국은 기업적인 측면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가 참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삼성, 현대차 등 일부 대기업에 편중된 경제구조가 오래 지속되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삼성이나 현대차가 무너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만한 규모의 새로운 기업이 등장할 수 있는 경제구조가 돼야 할 텐데요. 지금 우리나라 벤처기업 중에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만한 싹수가 보이는 기업이 있을까요.
이민화 회장: 국력이나 경제규모를 따지면 네이버와 구글이 비슷한 규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와 미국의 국력이 15배 정도 차이가 나니까요. 넥슨도 그렇게 볼 수 있겠죠.
사회: 네이버나 넥슨은 국내 벤처 생태계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하고 성장해 대기업이 됐죠.
이민화 회장: 글로벌 기업이죠. 네이버는 ‘라인’ 등 글로벌 비즈니스도 하고 있잖아요.
사회: 척박한 벤처 생태계에서도 네이버나 넥슨 같은 기업이 탄생했는데, 앞으로도 이런 기업들이 벤처 생태계에서 계속 탄생해 삼성이나 현대차가 흔들려도 한국 경제를 충분히 떠받칠 수 있는 미래의 기둥이 돼야 하겠죠.
이민화 회장: 그렇게 돼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에 해본 경험이 있어요.
남민우 회장: 큰 규모로 성장한 벤처기업들은 기존 대기업들이 선점하지 않은 분야에 도전했던 겁니다. 그걸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삼성이나 현대가 네이버나 넥슨 등이 하는 사업을 안 했잖아요.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네이버나 넥슨처럼 크게 성공한 벤처기업을 보면서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박수를 쳐주거나 환호하는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그런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척박한 환경에서 성공한 케이스에 대해서조차도 비판적이잖아요. 오히려 ‘잘한다’, ‘우리도 영웅이 있다’고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저는 이것부터가 모순이라고 봐요. 이게 고쳐져야 합니다.
황철주 회장: 지금까지의 성장전략과 앞으로의 성장전략은 다릅니다. 바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실시간으로 통계가 잡히고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입니다. 어느 개인, 어느 기업, 어느 국가든 거래에서 손해를 보려는 경우는 없잖아요. 현재는 정보가 없거나 부족했던 과거와는 환경이 전혀 달라요. 가령 100원을 주고 110원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100원을 주고 200~300원을 가져올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요.
글로벌 시장 전체가 실시간으로 통계와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어느 시장,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큰 나라에 가서 큰돈을 벌 수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대기업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가면 힘들어요. ‘잘 안 보이는 영역’에서 적게 주고 조금 더 크게 가져오는 전략을 써야 대한민국에 맞는 성장동력이 될 겁니다. 아직도 우리가 세계적인 대기업이 대한민국에서 나와야 한다고 맹신하다가는 ‘한방’에 무너집니다. 어느 나라, 어느 기업도 한국 기업이 많은 이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봐주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매출은 조금 올리지만 이익은 크게 내는 기업들이 많이 나와서 세계 모든 시장에 침투할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이 진짜 튼튼한 경제구조를 갖게 될 겁니다. 큰 규모의 기업을 육성하려고 하면,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하느라고 시간 낭비를 하는 결과가 될 거라고 봅니다.
사회: 황 회장님 말씀을 듣다 보니 중소기업, 중견기업이 강한 ‘히든 챔피언’의 나라 독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가 독일의 경제·산업구조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고 강한 기업들이 큰 경제적 성과를 만들 수 있겠죠. 주목받지 못하는 다수가 핵심적인 소수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른바 ‘롱테일(Long Tail) 법칙’도 결국 같은 맥락이겠죠.
황철주 회장: 앞으로 대기업 중심의 성장은 우리나라 경제구조에 안 맞습니다.
사회: 기업가정신에 관한 질문인데요. 황 회장님은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이신데, 지금 창업했거나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황철주 회장: 이제 ‘지식의 경쟁’ 시대는 지났습니다. 인터넷 혁명과 모바일 혁명으로 모든 사람이 지식을 공유하게 됐습니다. 지식의 변별력이 낮아졌고, 기술의 변별력도 굉장히 찰나적입니다. 앞으로의 경쟁은 ‘정신의 경쟁’입니다. 결국 올바른 정신,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기업만이 세계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력이 없어서’ ‘ 돈이 없어서’ ‘시장이 없어서’ 이런 식의 부정적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끔 하고, 이를 통해 돈을 벌고 가치를 창출해 함께 공유하는 게 바로 기업가정신입니다.
이날 좌담회 말미에 남민우 회장은 정준 신임 벤처기업협회 회장에게 직전 회장으로서 덕담을 남겼다. “정준 회장은 오랫동안 협회 활동을 하면서 잘해왔기 때문에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회장으로 선임됐어요. 분명히 잘해나갈 겁니다. 열심히 수고해달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조현정 회장도 한마디 덧붙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도와줄 것이라는 말을 보태고 싶습니다.” 한국 벤처를 일으키고 키워온 동지들의 깊은 신뢰와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