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특강 자리에서였다. 강사가 갑자기 허리를 뒤로 휙젖히더니 엄지와 검지, 중지를 둥그렇게 움켜쥔 오른손 주먹을 청중 앞으로 불쑥 내미는 포즈를 취했다. 마치 중국 무술영화에 나오는 당랑권(사마귀의 사냥 동작을 본떠 만든 무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꽤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는 청중의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중은 파안대소했다. <장자(莊子)>의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사마귀 우화의 교훈을 온몸으로 들려주던 그 강사는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였다. 김 교수는 인문학 명강사로 이름이 나 있다. 특히 철학에서 길어 올린 지혜를 경영 현장의 리더들에게 전파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_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처음 기업체 강연을 나갔을 때였어요. ‘초월적 실체의 내재적 속성에 대한 변증법적 고찰……’이라고 말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는데, 청중의 동공이 확 풀리고 얼이 쏙 빠진 것 같더라고요( 웃음). 그 순간 바로 ‘ 아,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죠.”
세상만사가 그렇듯, 무언가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성공에는 연습과 훈련, 노력이라는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법이다. 김형철 교수가 명강사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도 남다른 노력 덕분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마귀 우화를 이야기할 때 쓰는 제스처도 집에서 거울을 보면서 엄청나게 연습한 겁니다. 그때는 아내로부터 ‘ 도대체 당신 뭐하는 거냐’는 면박도 많이 받았죠.”
세간에는 철학에 대한 뿌리 깊은 통념 한 가지가 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철학을 대학 전공으로 선택하려고 하면 “그러다 굶어 죽는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 한마디로 쓸모없다는 것이다. 이런 편견에 김형철 교수는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는 지난 4월 출간한 저서 <철학의 힘>의 서문 제목을 ‘쓸모없음의 쓸모’라고 달았다.
김 교수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중략) 철학을 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김형철 교수는 철학의 실용성을 ‘큰 실용(大用)’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철학이 비록 작은 것에는 쓸모가 없을지 모르지만 큰 쓰임새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일까.
그의 설명이다. “실용을 ‘큰 실용’과 ‘작은 실용’으로 나눈다면, 철학은 큰 실용에 관한 겁니다. 가령 ‘우리는 왜 사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고 칩시다. 대개는 ‘그게 뭐 실용적인 질문인가’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건 독일 철학자 니체가 한 말입니다.”
철학적 질문으로 '큰 실용'을 얻을 수 있어
김 교수는 철학적 질문과 비즈니스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 업( 業)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간혹 접하곤 한다. 하지만 그 질문을 실질적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업의 본질’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기업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 발명 이후 20세기 초에 항공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은 모두 벤처나 스타트업이었죠. 당시 운송업계에서 가장 강자는 철도회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철도회사 중에 항공사를 차리든가 인수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철도회사들이 자신의 업의 본질을 ‘기차로 운송하는 회사’로 규정했기 때문이죠. 만약 당시 철도회사가 스스로 ‘ 우리는 고객에게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회사’라고 인식했다면 항공운송 시대에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겠죠. 업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이런 질문은 ‘ 경영철학적’ 질문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큰 실용’을 낳는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김 교수는 미국의 젊은 천재 기업가 일론 머스크Elon Musk를 사례로 들었다. 일론 머스크는 창업 이후 온라인결제 서비스, 로켓 제조 및 우주여행, 전기자동차, 태양광발전 분야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고정관념의 벽을 깨뜨려온 것으로 유명한 기업가다.
“일론 머스크를 보세요. 그 사람은 자기 업의 본질을아는 겁니다. 그의 업은 ‘꿈’을 실현해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꿈을 향해 역동적으로 나아가잖아요.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너 자신에게 업의 본질을 물어보라’ 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기업 종사자들은 끊임없이 ‘우리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도 질문하고 동료들에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최고경영자( CEO), 임원 등 윗자리로 갈수록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해야 해요. 한시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철학적인 질문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우리 회사는 뭐하는 회사인가’, ‘나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사람만이 니치마켓(NicheMarket: 틈새시장)을 찾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는 것이 '현명한 일하기'
인간과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인간의 존재적 특성 중 하나가 ‘노동하는 인간’이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고, 문명 발달 이후에는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현대사회라고 다를 것이 없다. 일은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이라는 인간 존재의 두 가지 핵심적인 조건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하는 것이 올바르게 일하는 것인가. 많이 일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이 능사인가. 물론 그런 덕목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이란 현명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이 가속화하면서 이른바 ‘스마트워크(Smart Work)’가 화두로 떠오른 시대가 아닌가.
김형철 교수는 말한다. “현명하게 일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의 목적에 비춰 가장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하는것입니다.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을 가려 일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목적, 자신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의 목적을 잘 이해해야만 하겠죠. 이렇게 일하는 것이 ‘큰 현명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사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현명하게 일하는 겁니다. 다만 그것은 ‘작은 현명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터넷은 인류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세상의 거의 모든 정보와 사람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사이버공간에 연결됐다. 특히 모바일혁명 이후에는 하루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사람들은 늘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해 무언가를 검색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 검색’ 은 많아졌지만 ‘사색’은 줄어들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로운 인간, 생각하는 인간)’가 ‘호모 서치엔스(HomoSearchiens: 검색하는 인간)’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 생각’ 에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靈長)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일할 때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
김 교수는 말한다. “생각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업의 본질에 대한 사색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다만 일의 ‘수단’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 의사결정이 더뎌지고 추진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의 수단은 가급적이면 빨리 결정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일 년에 두 차례 회사 업무를 완전히 제쳐놓고 일주일간 사색을 하는 ‘싱크 위크(ThinkWeek: 생각 주간)’를 갖습니다. 저는 CEO들에게 매일 30분씩 ‘은퇴’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즉 생각하고 사색할 시간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 시간 동안 업의 본질을 물어봐야 합니다.”
김형철 교수는 연세대 리더십센터 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철학과 교수가 리더십 교육을 맡은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리더십 분야는 대개 행정학이나 경영학 전문가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리더십 전문가가 된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그는 현대 영· 미 윤리학을 전공했다. 특히 그의 주된 전공은 ‘ 정의론’ 이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 분배 정의’ 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1996년 연세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기업윤리’ 과목을 개설했다. 이 과목의 산파 중 한 명이 바로김 교수다. 그는 당시 경영학과 교수들과 공동으로 기업윤리 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세대의 기업윤리 과목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기업들 사이에도 알려졌다. 김 교수를 찾는 기업도 늘어났다. 그는 신세계, 포스코, SK 등 주요 기업들로부터 잇달아 특강을 의뢰받으면서 ‘윤리경영’ 전문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 2007년부터는 한국능률협회가 기업 CEO들에게 인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개설한 ‘지혜의 향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인문학 리딩(Leading) 멘토’를 맡으면서 기업종사자들에게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철학과 경영을 접목한 지혜의 전도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는 연세대 리더십센터 소장 재직 당시 자주 질문을 받은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고 한다. ‘ 능력’ 과 ‘ 도덕성’ 중 어느 쪽이 더 리더에게 중요한 덕목인가 하는 게 골자였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리더십은 능력과 도덕성의 두 바퀴 수레
김 교수는 말한다. “리더십은 능력과 도덕성이라는 두 가지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와 같습니다. 그런데 무능하면서 깨끗한 사람이 나으냐, 아니면 유능하면서 다소 흠이 있는 사람이 나으냐는 질문이 자주 제기되죠. 저는 아무리 깨끗해도 무능한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무능한 사람을 리더로 앉혀 놓으면 수많은 사람이 고생합니다. 리더는 능력이 우선입니다. 능력이 리더십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다음에 ‘충분조건’으로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집단에서 리더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그때는 먼저 능력이 뛰어난 후보군을 5명 정도 가려냅니다. 그런 다음 그중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을 리더로 뽑으면 됩니다. 제 나름대로 만든 리더 선출 공식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사람들은 능력이 비슷합니다. 기업으로 치면 임원에 오른 사람은 능력이 검증된 거죠. CEO를 선임할 때는 임원 중에서 가장 사심 없이 회사를위해 일할 수 있는 깨끗한 사람을 뽑으면 됩니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는 할 일이 많다. 조직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늘 노심초사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 기업 조직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혁신이다. 그리고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리더십에서 나온다. 리더는 조직 혁신을 위해 어떤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
“상식에 의문부호를 달아야 혁신적인 생각이 나옵니다. 리더는 조직 구성원들의 불평이나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조직의 기조에 뭔가 문제가있다는 징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낯섦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그게 혁신의 길입니다. 또 조직 구성원들에게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너무 세게 물으면 안 됩니다. 그게 두려워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죠. 공무원 조직은 실패를 안 해야 사는 조직입니다. 그러다 보니관료주의가 싹트죠. 기업 역시 관료주의에 젖게 되면 결코혁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김형철 교수가 제안하는 몇 가지 팁
즐겁게 일하고 만족을 얻으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간단히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첫째, 그 일을 생각하면 잠을 설칠 정도인가? 둘째, 돈을 받지 않고도 기꺼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두 가지 테스트를 통과한 일을 하게 되면 누구나 즐겁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
직원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야 하나
동기부여는 크게 외적 동기부여와 내적 동기부여로 나눌 수 있다. 외적 동기부여는 금전적 보상, 내적 동기부여는 개인의 능력 인정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외적 동기부여는 중요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국내 굴지의 전자업체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월급을 받고 있지만, 허탈할 때가 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갈 것이라고 느낄 때다.” 이 임원의 경우는 조직 내에서 자존감을 느낄 수 없는 상태다. 따라서 물질적인 보상을 너무 앞세우는 외적 동기부여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인류 역사는 인정(認定) 투쟁의 역사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리더십
‘명령’하지 말고 ‘질문’하라. 문제의 본질을 깨우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또 규칙을 제정할 때는 규칙의 적용을 받는 대상에게 의견을 물어보라. 그런 다음에 만들어진 규칙은 대상자들이 자발적으로 지킨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부하가 스스로 말하도록 유도하라. 이런 리더가 평소에 소통을 잘하는 리더다. 부하들의 좋은 의견에는 설득될 줄 알아야 한다. 이 역시 소통의 리더십이다.
김형철 교수는 …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철학회 사무총장, 사회윤리학회 회장, 연세대 리더십센터 소장, 세계철학자대회 상임집행위원을 역임했다. 2006년 연세대 ‘베스트 티처(최우수 강의 교수)’로 선정됐으며, 2007년에는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최우수 인문학 강의 교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윤리경영, 리더십, 변화와 혁신, CEO의 경영철학 등을 주제로 활발한 강연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