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그룹이 법정관리 중인 해운업체 팬오션을 품에 안았다. 닭고기 전문업체 하림이 사료, 축산업에 이어 해운(유통)업까지 진출하며 업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림그룹은 팬오션 인수로 ‘카길’ 같은 곡물 유통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한다. 포춘코리아가 축산업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하림그룹의 도전과 야망을 심층 취재했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 한국판 카길을 만들겠다.” 지난 6월 12일 팬오션 인수를 확정 지은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말이다. 일반인들 머릿속에 ‘ 하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닭고기다. 기업 규모도 일반 중소기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하림의 자산 총액은 4조3,000억 원 규모다. 계열사는 닭 가공업체인 (주)하림과 사료전문업체 천하제일사료, 양돈 전문업체 팜스코, 홈쇼핑 업체 NS쇼핑(NS홈쇼핑)등 모두 31개사다. 팬오션 인수로 하림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대기업집단에 편입될 예정이다. 대기업집단이란 흔히 말하는 재벌이라 할 수 있다. 대기업집단의 요건은 자산총액 5조 원 이상. 팬오션 인수로 하림그룹의 자산은 9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30대 그룹 수준에 오르게 되는 셈이다.
하림그룹은 닭고기 가공사업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모기업인 (주)하림은 우리나라 육계업 시장 점유율 31.1%를 차지하는 업계 1위 회사다. 하림그룹은 1978년 김홍국 회장이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시작한 육계농장으로 출발했다. 김 회장은 1990년 축산가공업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육계전문업체 (주)하림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하림은 1995년 농축산물 업계 최초로 KS마크를 획득하고, 1997년 코스닥 시장에 주식도 상장했다.
팬오션을 '한국판 카길’로
하림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제일홀딩스와 사모펀드인 JKL 파트너스로 구성된 컨소시엄은 지난 6월 12일 팬오션을 인수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인수대금은 총 1조79억5,000만원으로, 이 가운데 제일홀딩스가 총 8,380억 원을 부담했다.
인수 추진 초기엔 관련도 없는 축산 업체가 해운사를 인수한다는 논란도 있었다. 그렇다면 하림그룹은 왜 팬오션을 인수했을까. 김홍국 회장은 인수 본게약 체결 후 “팬오션 인수는 하림그룹의 주요사업인 축산, 식품가공, 사료 등과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그 의미를 밝힌 바 있다.
하림그룹의 사업 영역은 크게 사료, 양계, 양돈, 유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축산 관련 전후방 사업을 통합한 하림그룹에선 사료 사업 부문의 덩치(그룹 매출의 35%)가 제일크다. 닭과 돼지가 먹는 사료는 곡물로 만든다. 하림그룹 관계자는 “그룹 전체 매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사업은 사료다.
그 다음으로 닭고기, 돼지고기 등이 있지만, 이들도 결국은 사료를 먹여 키워야 한다. 사료를 생산하려면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료 곡물 중 96% 이상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곡물 자급률이 23%라고 하지만 대부분 쌀이다. 때문에 그간 카길과 일본 유통사 측이 요구한 곡물 유통비용을 반드시 지불해야 했다. 배를 통해 국내로 운송하는 비용이 하림 원가의 20% 정도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하림그룹은 사업에 필요한 옥수수, 대두박(대두로부터 기름을 짠 후 생기는 산물로, 탈지대두라고도 부른다. 식물성사료의 왕으로 불릴 만큼 우수한 식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다) 등 사료 원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곡물을 실어 나르는 벌크선 인프라를 갖춘 팬오션을 인수하면, 운송 비용을 절감하고 유통망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이 팬오션을 ‘한국판 카길’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내놓은 데에는 이 같은 사업적 전략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하림그룹은 카길과 비슷한 면이 많다. 카길은 글로벌 곡물 시장의 40%를 점유하는 세계 최대 곡물회사다. 세계 각지에서 곡물을 생산하고 있다. 600여 척에 이르는 자체 보유 벌크선(곡물, 원자재 수송선)으로 유통 사업까지 수직계열화해 연 매출 140조 원대를 올리고 있다. 하림그룹도 팬오션을 인수해 곡물 해상 유통업까지 수직계열화하면, 규모는 작지만 카길과 흡사한 사업구조를 갖추게 된다.
해상운송업체 팬오션은 2007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곡물을 운송했던 기업이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현재 팬오션 조직을 유지하면서 새로 곡물사업부를 만들어 ‘ 한국판카길’로 성장시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팬오션의 해운 물류망을 통해 미국과 남미 등에서 곡물을 직접 수입해 동북아에 공급함으로써 하림을 세계 최대 곡물 회사 카길에 버금가는 글로벌 곡물 유통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우리나라는 곡물 자급률이 낮아 해외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이를 유통하는 메이저 기업은 없는 상황이다. 곡물 자급률이 우리와 비슷했던 일본의 경우 약 50년 전부터 세계 곡물 유통에 뛰어들어 수입량의 96%를 자국 곡물유통회사가 공급하고 있다.
하림그룹의 자신감
인수계약 체결 발표 이후 하림과 팬오션의 주가는 동반 상승했다. 반면 발표 다음날 NICE신용평가는 하림의 장기신용등급(A-)을 하향검토 등급감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하림의 팬오션 인수 효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인수를 통해 그룹 전반의 재무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하림그룹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한다. 우선 하림그룹은 법정관리 중인 팬오션의 경영을 하루빨리 정상화시켜 하림과 팬오션의 시너지 효과를 증명해야 한다. 팬오션은 하림그룹의 곡물 사업에서 나오는 물동량 30%를 제외한 나머지를 외부 영업으로 채워야한다. 하지만 현재 해운 업황은 사상 최악의 침체기다. 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원은 “하림이 수입하는 곡물이 연간 300만톤인데, 팬오션이 매년 수송할 수 있는 물량은 약 5,000톤이다”라면서 “나머지 기간 동안 하림은 배를 빌려주든지 다른 화물을 운송하면서 돈을 벌 궁리를 따로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림 측은 우선 시카고 상업거래소와 같은 공개시장에서 곡물 물량 매입을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팬오션을 통해 해외 농장과의 직접 거래를 늘려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각에선 하림그룹이 해운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팬오션 경영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림그룹은 “해운회사들이 어려운 건 호황기 때 비싼 가격에 배를 빌린 탓이다. 팬오션은 법정관리를 거치며 비싼 계약을 대부분 해약했다. 또 현재 해운 업황이 바닥이어서 더 좋아지긴 쉬워도 나빠지긴 어렵다는 점도 하림에겐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벌크선 위주의 팬오션 인수를 통해 곡물 가격에 포함된 운임료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고, 그들이 요구했던 비용도 컨트롤 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하림그룹은 현재 팬오션에 인수단을 보내 경영권 인수작업을 하고 있다. 모든 절차는 8월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팬오션을 인수했다고 하림그룹 사람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범양상선(팬오션의 전신) 때부터 근무해 온 팬오션 출신을 CEO로 뽑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림그룹의 팬오션 인수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 사업분야가 되는 해운업과 기존 사업 모델인 곡물업에서 모두 승자가 돼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패할 경우 하림이 떠안게 될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또 다른 성장 축 ‘종합식품 기업’
하림그룹은 계열사 NS쇼핑(NS홈쇼핑)을 주축으로 한 식품전문 유통 기업으로서의 비전과 목표도 공고히 하고 있다.
하림식품은 유상증자 자금 200억 원을 비롯해 총 1,100억원을 투자해 이르면 내년 2월까지 가정간편식을 비롯한 다양한 가공식품 생산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생산 제품은 NS쇼핑을 통해 판매될 예정이다. 이 자금은 전북 익산 4 산업 단지에 준비 중인 종합식품 가공공장 건립에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림식품은 하림그룹이 지난 2013년 말 설립한 회사로 하림그룹 계열사인 NS쇼핑이 100% 지분을 갖고 있다. 하림그룹 관계자는 “설립 예정인 익산 공장에서는 천연액상 조미료는 물론 냉장·냉동식품, 가정간편식, 레토르트식품 등 현대인의 식생활에 맞춘 다양한 편의식품을 제조할 계획”이라며 “하림이 종합식품서비스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림은 지난해부터 쌀가공 식품과 계란 유통 등 신사업에도 진출했다. 햄버거 등 밀가루 음식과 육류 소비가 늘면서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지만, 1인 가구 증가로 인해 햇반· 컵밥 등 쌀 가공 식품 소비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위해 익산공장에 쌀 가공 식품 생산 라인도 포함시켰다.
하림그룹은 기존 강자인 CJ제일제당, 동원F&B, 풀무원 등 식품 대기업들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특히 가정 간편식 시장은 최근 맞벌이 가정과 1인가구가 늘면서 2009년 7,100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1조7,000억 원으로 그 규모가 가파르게 성장했다. 올해에도 지난해보다 15~20% 정도 성장할 것으로 보여 식품회사들이 이 시장에 앞다퉈 진출하고있다.
하림은 지난해 7월부터 미국에 삼계탕도 수출하고 있다. 하림은 미국 유통업체 2곳과 손잡고 미국 전역 1,500개 마트에서 냉동 식품과 레토르트 2가지 타입의 삼계탕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초 하림 삼계탕 제품을 실은 컨테이너선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우리나라 축산물이 미국에 수출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난 2004년 4월 미국 수출길을 열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지 10년만에, 한·미 FTA가 비준된 지 5년 만에 쾌거를 올린 셈이다. 하림은 한인 교포나 동양계 미국인, 히스패닉 등이 주요 타깃층이 될 것으로 보고있다. 올해 목표 매출은 300만 달러, 5년 내 1억 달러다.
대기업 반열에 오른 하림그룹
하림그룹은 팬오션 인수로 내년부터 대기업이 된다. 하림그룹(자산 총액 4조8,000억 원)과 팬오션(4조4,000억 원)이 합쳐지면 자산 규모가 9조2,000억 원대로 올라 공정거래위원회가 정한 대기업집단 선정 요건( 자산 총액 5조원)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석유화학 등 중후 장대 산업이 주력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축산 전문 대기업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림그룹 입장에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집단이 되면 사업상 여러 규제에 부딪칠 수 있다. 이에 하림그룹은 2년의 유예기간 동안 대기업규제에 맞게 그룹의 체질을 바꿀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림그룹 관계자는 “현재도 지주회사법에 위배 되는 건 전혀 없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지주회사 체제로 가는 것을 목표로 통합 작업을 점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대기업이 되면 이런저런 규제가 더 많아진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팬오션과의 시너지를 포기할 순 없었다. 경기가 좋을 땐 곡물 가격의 절반이상이 운임으로 나갈 정도로 곡물 사업에서 차지하는 해운 비중은 컸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1%의 가능성만 보여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맨손으로 국내 축산업계 1위 업체를 일군 자수성가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외할머니가 사준 병아리 10마리를 정성껏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돈으로 닭을 사고, 또 그걸 팔아 돼지를 샀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18살에 씨닭(종계) 5,000마리, 돼지 700두를 기르는 농장주가 됐다. 1982년 돼지와 닭값이 폭락하면서 빚더미에 앉기도 했지만, 그는 거기에서 오히려 기회를 발견한다. 돼지 값이 폭락해도 소시지 같은 가공식품은 가격이 그대로라는 점을 간파하고 가공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때 마침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에 불어닥친 양념치킨 열풍으로 닭고기 수요가 폭발하면서, 하림은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하림그룹은 생산(농장)-가공(공장)-판매(시장)로 사업 수직계열화를 이룬 기업이다. 하림에선 이를 ‘삼장 통합경영’ 이라고 부른다. 삼장 통합경영은 1차 산업인 농업을 2, 3차 고부가치 농식품산업 모델로 격상시킨 것이다. 농업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사업모델로 볼 수 있다. 원재료의 생산부터 판매까지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하림은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이 통합경영을 성공시켰고, 완성도를 더욱 높여가고 있다. 국내에 9개 주력기업과 관련 자회사가 운영되고 있고, 중국, 필리핀, 베트남, 미국 등지에 10개 사업장도 진출해 있다. 김홍국 회장이 글로벌 곡물 유통사업과 종합식품 회사라는 양 날개를 달고 하림그룹의 성장을 어디까지 이끌어 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