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달콤한 성공스토리

▶베트남 난민이었던 앤드루 리 가족이 ‘슈거 볼 베이커리’를 대형 디저트 업체로 성장시킨 비결을 알아보자. Interview by Dinah Eng◀

앤드루 리가 캘리포니아 헤이워드 Hayward에 있는 슈거 볼 베이커리 공장에서 시식을 하고 있다.<BR><BR><span><div style='text-align: center;max-width: 336px;margin: 0 auto;'><div id='div-gpt-ad-1707113286654-0'><script>googletag.cmd.push(function() { googletag.display('div-gpt-ad-1707113286654-0'); });</script></div></div></span><br>앤드루 리가 캘리포니아 헤이워드 Hayward에 있는 슈거 볼 베이커리 공장에서 시식을 하고 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슈거 볼 베이커리 Sugar Bowl Bakery의 브라우니 brownie, 마들렌 madeleine, 팔미예 palmier를 먹어봤을 것이다. 슈거 볼 베이커리의 빵은 코스트코 Costco, 크로거 Kroger, 월마트 Wal-Mart 같은 대형 마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올해 67세인 앤드루 리 And rewLy는 네명의 형제들과 함께 이 베이커리를 세웠다. 그가 기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앤드루는 가족들과 함께 폭이 불과 3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배를 타고 남중국해를 건너 베트남을 탈출했다. 그리고 해적에게 피습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미국 땅을 밟았다. 앤드루는 영어를 배웠고, 성공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불태웠다(그는 경쟁 베이커리의 크로아상 croissants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쓰레기통까지 뒤진 적이 있다). 그리고 앤드루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카페를 연 매출 1억 달러를 올리는 도매 유통업체로 성장시켰다. 그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자:

나의 부친은 1930년대 중국에서 베트남의 한 마을로 이주했다. 그는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했는데, 베트남 전쟁 때 병을 얻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그만 두고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내겐 여동생 한 명과 남자형제 네 명이 있었다. 당시 부친은 월남군이 아들들을 데려갈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당시 17세였던 큰 형은 사이공 Saigon에 있는 섬유공장으로, 둘째 형은 박리에우 Bac Lieu에 있는 베이커리로 보내졌다.

그렇게 뿔뿔이 떨어져 살던 우리 가족은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된 후 베트남을 탈출할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형제 중 두 명은 탈출에 성공했고 나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했다. 1978년 11월 베트남 정부는 우리 재산을 모두 넘기는 조건으로 베트남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우리 가족은 꼬박 6일이 걸려 말레이시아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아 옷가지 몇 점만 빼고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기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가족은 말레이시아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때 국제적십자사 (International Red Cross)가 최대 5만 3,000명까지 난민들이 거주했던 팔라우 Pulau 난민촌으로 우리를 보냈다. 그곳의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1979년 8월 부모님과 나는 미국 가톨릭연합 (U.S. Cathol ic Conference)의 도움을 받아 캘리포니아 페어필드 Fairf ield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8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다시 상봉했다. 가진 건 모두 잃었지만 축복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후 남동생들은 각각 레스토랑 직원과 신문배달원으로, 제수들은 재봉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나는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밤에는 신문 배달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일곱 식구가 텐더로인 Tenderloin에 있는 원룸에서 살았다. 우리는 여행도 안가고, 남들처럼 돈을 쓰지도 않았다. 최대한 절약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러던 중 1984년 한 친구가 매물로 나온 카페 정보를 주었다. 우리는 전 재산을 싹싹 긁어모아 4만 달러를 주고 그 카페를 매입했다. 카페 이름을 슈거 볼 베이커리로 지었고 지금도 그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매도자는 우리에게 도넛, 머핀, 그리고 크로아상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른 카페와 세븐 일레븐에 도넛을 팔기 시작했다. 매출이 빠르게 올라 우리는 곧 10만 달러를 저축할 수 있었다.

1986년이 되자 우리 가족 사이에서 서로 다른의견이 제기되었다. ’회사를 계속 키우고 싶다‘는 의견과 ’ 부동산에 투자해서 저축을 늘리자‘ 는 의견이었다. 나는 사업 확장과 부동산 투자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매입할 건물을 찾아 나섰고, 델리시티 Daly City에서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어느 은행도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멕시코인 노부부였던 매도자에게 계약금으로 6만 달러를 우선 지불하고, 향후 10년 동안 매달 2,247달러씩 갚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들은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나와 직원 한 명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도넛을 배달했다. 나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와 주말마다 만났는데, 거래처를 돌며 수금할 때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데이트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나는 1989년 36만 달러를 주고 세 번째 건물을 매입했다. 이번에는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내 목표는 형제들이 매장을 하나씩 맡아 운영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다음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지 알아내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요리 이벤트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호텔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제과 부문을 아웃소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파크 피프티파이브 Parc 55 호텔에 도넛 1개당 22센트를 받고 납품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중소기업청(SBA)으로부터 5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 외식서비스 부서도 신설했다.

우리는 정규 제과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중국식 케이크를 한 셰프에게 가져가자, 그는 웃으며 “달콤한 프랑스식 빵에 익숙한 백인 고객들에게 중국식 케이크를 팔순 없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했다. 그래서 나는 조카를 나파밸리Napa Valley에 있는 미국요리전문학교(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로 진학시켜 페이스트리 셰프 정규 교육을 받게 했다. 그가 졸업하기 전에, 나는 우리의 크로아상 맛을 더 개선하기 위해 남동생 한 명과 함께 경쟁업체의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어떤 재료를 쓰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나중에 그 업체에서 일했던 제빵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리 브라더스 코퍼레이션 Ly Brothers Corp을 설립했고 내가 CEO를 맡았다. 내가 창의적이고, 가족 중 유일하게 영어를 잘했으며, 모두를 단합시키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역 내 호텔, 병원, 그리고 첨단 IT업체들에 우리 빵을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 다음 목표로 대형 유통업체들을 겨냥했다. 그러나 노력을 해도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2000년 브로커를 고용해 코스트코에 납품을 했다. 꾸준히 납품할 수 있는 품목을 찾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때 찾은 것이 팔미예이고, 오늘날까지도 잘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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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나는 세이프웨이 Safeway, 크로거, 월마트 같은 유통업체 대량 납품에 집중했다. 당시 우리는 서로 다른 7곳에서 가게를 운영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사업모델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소매와 외식 부문 사업을 매각했다. 750개의 생산라인과 4,000개의 재고보관단위(SKU)를 3개의 생산라인과 90개의 재고보관단위로 축소했다. 그 결과 비용이 크게 절감되면서 마진이 높아졌다.

우리 회사는 지금 전성기에 있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이민개혁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 가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팠지만, 그 자리에 참석해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영어도 몰랐고 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기 꺼려 했던 미국으로 가족들을 데려온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열심히 일하고, 긍정적인 마음과 단련된 자세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것들이 모여 지금 우리의 성공이 이뤄졌다.

나의 조언

앤드루 리, 슈거 볼 베이커리 창업자 겸 CEO

끈기 있는 자가 승리한다.

고객이 새 제품 구매를 꺼릴 경우, 나는 납품 때마다 시식해보라는 쪽지와 샘플을 남긴다. 한결 같은 끈기가 없다면 경쟁에서 밀리 수밖에 없다.

직원들에게 보상하라.

우리 회사는 유용한 제안을 한 직원에게 브라우니 포인트라는 점수를 준다. 포인트가 충분히 쌓이면 무료 점심에서 아이패드까지 다양한 상을 받을 수 있다.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라.

우리는 트랜스지방 무첨가 제품을 처음 출시한 여러 기업 가운데 한 곳이다. 우리는 글루텐과 유전자변형 원료(GMO)를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빵만 만들고 있다.

하제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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