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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화성의 인류학자

절망을 극복한 7명의 이색적 이야기

화가 조너선 아이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완전한 색맹이 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뒤 그에 눈에 보이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식탁 위의 음식은 시멘트를 부어놓은 듯 온통 무채색이었다. 토마토 주스는 검게 보였고 마요네즈와 케첩, 잼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아내와 자신의 몸이 소름끼치는 회색으로 보이면서 정상적인 부부관계조차 불가능했다. 당시 조너선은 자신의 두 눈에 비친 세상을 ‘납으로 빚은 세상’이라 표현했다.




자연과 인간 의지의 충돌
‘신경정신학계의 칼 세이건’으로 불리는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저술한 ‘ 화성의 인류학자’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예고 없이 충돌한 7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통사고로 전색맹이 된 화가 조너선을 비롯해 기억과 자의식을 잃어버린 영원한 히피청년 그레그, 병원 복도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투렛 증후군 외과의사 베넷, 50년 만에 시력을 되찾은 버질, 과거 기억에 사로잡혀 사는 화가 프랑코,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는 자폐증 소년 스티븐, 자폐증 진단을 받은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이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 이들은 다양한 신경병의 습격을 받았다. 의학계의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임상 사례’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올리버 색스는 의사 가운을 벗고 병원 밖에서 무려 25년간 이들을 만나 실생활을 관찰했다. 한편으로는 희귀 생명체를 대하는 박물학자의 심정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선 인류학자의 심정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사의 입장에서 이곳저곳 왕진을 나섰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환자들이 어떤 난관에 부딪치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딛고 일어섰으며, 심지어 그 절망적 상황의 도움을 받으면서 삶의 끈 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 특유의 놀라운 복원력과 적응력으로 18 0도 달라진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해냈다. 결국 이 책은 신경병 때문에 변화한 인간의 기록물이자 존재방식과 새로운 생활모습,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장애로 촉발된 창의성
조너선은 화가로서 생명과도 같은 색채 감각을 모두 잃고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았다. 2년여가 지나 절망을 떨쳐내려 몸부림치던 그의 눈에 밤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부신 한낮보다 흐린 날이나 어스름 무렵 사물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의 말을 빌면 ‘흑백으로 설계된 듯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일출을 보며 불현듯 깨닫는다. 울긋불긋한 일출을 자신처럼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조너선은 채색을 포기하고 흑백의 그림에 도전장을 던졌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잃어버린 것, 즉 색깔에 대한 집착도 사 라져갔다. 올빼미족이 되어 밤에만 낯선 도시와 지방을 탐험했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거리를 배회하며 사물과 풍경을 관찰했다.

더 이상 색을 그리워하지 않게 된 그는 마침내 ‘색깔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색맹이라는 장애가 그에게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물한 것이다.



뇌손상 청소년기의 기억에 갇혀 있는 그레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사실’을 기억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60년대 노래는 완벽하게 외웠다. 새로운 노래도 쉽게 배웠다.


한번은 저자가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공연에 그레그를 데려간다. 그는 1960년대 노래가 나오자 열광했고, 공연이 끝난 뒤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레그는 자신이 공연에 갔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자에게, 아니 그레그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뇌는 여전히 ‘사실’에 반응하고 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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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진단을 받은 템플의 경우에도 사랑이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기관이 고장 나버렸지만 동물학 교수이자 저술가, 가축시설 디자이너로 성공적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놀랍게도 자폐증 환자가 된 이후 과학과 기술의 언어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얻었다. 가축시설을 설계할 때면 연필 한 번 들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디자인을 완성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동물들의 감정 파악에 특 출한 능력을 발휘했다.

“동물들과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지면서 평온함을 느낍니다. 소들이랑 있으면 인지 능력이 필요 없어요. 어떤 기분인지 그냥 느껴지거든요.”

동물의 기분과 몸짓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면서 인간의 관습과 신호, 행동방식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는 스스로를 ‘화성의 인류학자’가 된 듯하다고 표현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녀는 뇌신경이 일반인과 달라 사물을 느끼고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한다. 대신 놀라운 수준의 지적 능력과 도덕성을 가졌다. 자폐증을 어떻게든 밀어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특별한 재능의 가진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치료의 대상? 관계의 대상!
이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결함과 장애, 질병은 이따금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 보이지도 않았고,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 능력이나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런 역경을 계기로 발현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 또한 질병을 통해 찾아낸 창의력이라는 재능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발달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쓴다. 이로 인해 신경계가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움직이면서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루기도 한다.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이 같은 질병의 이면을 접했다.”

뇌신경 환자들은 일반인과 너무 다른 사고 방식과 지능, 정서를 지닌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결코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에게는 일반인이 갖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이 그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실제로 투렛 증후군에 시달리면서도 존경받는 외과의사로 활동 중인 베넷 박사는 유능한 파일럿이기도 하다. 한 동료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투렛증후군?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조종사예요.” 자폐아 스티븐 역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원근법 등 각종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심지어 단 한 번 봤던 복잡한 건축물과 자연 경관을 즉석에서 그려낸다. 안마사 버질의 경우 50년 만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환한 세상에서 내내 불행하다가 다시 실명을 하고서야 행복해졌다. 그에게는 밝은 세상이 고문이었고, 어둠이 축 복받은 세상이었던 셈이다.

과학과 의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뇌신경이라는 산의 정상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있다. 뇌손상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이 뇌신경 질환을 완벽히 정복할때까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 등장하는 7명은 이렇게 항변한다. 자신들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고민해 달라고.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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