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S EXPERT] 송길영의 '세상 사는 이야기'
당신의 아이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할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조금 더 온전한 당신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저는 강연에서 제 딸과의 에피소드를 자주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저번 주말에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제 딸을 데리고 함께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중3이 된 딸이 기말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저 말고도 다른 훌륭한 분들의 강연이 잇달아 있었기에 딸의 투정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기말시험보단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갖추는 일이 딸의 인생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강연이 끝난 후 딸에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딸은 제 강연을 본소감에 이르자 의외의 대답을 내놓아 저를 당황케 했습니다. 집에서의 제 이미지와 오늘 강연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달랐다는 겁니다. 저는 딸을 통해 제3자의 입장에서 본 집에서의 제 적나라한 이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딸이 말한 집에서의 제 이미지는 ‘게으르다’ ‘착하다’ ‘잔다’ ‘TV를 많이 본다’ ‘맨날 누워 있다’ 등이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아빠는 집에서 말을 잘 하지 않는다”였습니다.
딸은 강연 무대 위 제 모습에 대해서도 말을 해주었습니다. 딸은 ‘ 웃기다’ ‘강해 보인다’ ‘사람들이 말을 잘 못 걸 것 같다’ ‘꽤 많은 것을 알고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생각보다 유명하다' 등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딸은 의외의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딸은 사적인 공간 내에 있는 부모로서의 제 모습과 공적인 공간 안에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제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다른 두 이미지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습니다. 후자의 이미지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여러분의 자녀는 공적인 자리에서의 여러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집과 생업의 장이 같았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두 공간이 분리되면서 우리 아이들은 생업에 종사 중인, 즉 공적인 자리에 있는 부모를 보는 일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아이들은 그중에서 극히 일부분만 보게 되는 것이죠. 직장 격무에 지친 데다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마저 부족해진 요즘 같은 상황에선 자녀에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마저도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이니까요.
문득 옛 어른들이 삼강오륜으로 귀하게 여겼던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부모와 자식은 반드시 친해야만 할까요? 같은 질문을 사춘기 딸에게 해봤습니다. 딸의 대답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꼭 그래야 해?” 그렇습니다. 제 딸이 반드시 저랑 친해야만 하는 건 아니죠.
아빠들이 ‘우리 이번 여름에 어디 가서 뭘 할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초등학생인 동생 정도라면 마냥 좋아할지 몰라도 머리가 커버린 사춘기 형·누나들은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을 겁니다. 반(半) 성인인 이들은 부모와 함께 어디에 가는 걸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부모와의 동행은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닌 셈입니다.
이런 까닭에 때때로 부모와 자녀 간에는 ‘ 선한 엇갈림’ 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선한 엇갈림’이란 상대를 너무 배려한 나머지 거절을 하지 못해 ‘서로 원치 않는’ 괴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춘기 딸과 교감하고 싶은 아빠가 어렵게 고가의 연주회 티켓을 구해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취향이 전혀 다른 딸은 그 연주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딸은 차마 보러 가기 싫다는 말을 못합니다. 아빠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빠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는 기특한 생각입니다.
이를 잘 모르는 둔감한 아빠는 이 착한 딸과 함께 연주회를 다녀온 후 함께한 시간이 너무 뿌듯해 주위에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딸과 함께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을 발견했다고 난리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종류의 연주회 티켓을 또 끊습니다. 몇 번의 연주회를 더 다녀온 딸이 너무 질린 나머지 본심을 고백합니다. 사실 그런 종류의 연주회를 보는 게 너무 괴롭다고요. 아빠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좌절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부모랑 별로 친하지 않아 가족과의 외출을 귀찮고 번거롭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그렇게 괴롭게 생각하진 않는답니다. 한마디로 부모만 걱정을 하는 셈이죠. 이게 바로 부모의 외사랑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서툽니다. 자신이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아이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사실 아이는 이런 상황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말이죠.
이를 알았으니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아이와 친해질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주면 됩니다.
자신의 귀에는 소음과 다를 바 없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돌의 음악을 토를 달지 않고 함께 들어주는 것, 너무 짧은 것 같은 치마지만 그래도 예쁘다고 해주는 것, 쌩얼이 더 예쁜 것 같지만 그래도 유행하는 화장품을 사주는 것, 몸에 해로울 것 같지만 그래도 같이 군것질을 해주는 것 등입니다. 천하에 쓸데없는 일같이 느껴지더라도 아이가 너무나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딸의 이야기에 생각이 깊어질 즈음, 딸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했습니다. “아빠랑 얘기하면 재밌을 것 같아. 붕 뜬 얘기가 아니라 전문적인 토론이 될 것 같거든. 아빠 친구가 되면 재밌을 것 같아.”
우리 아이들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아이에게도 보여주세요. 조금 생소한 모습에서 오히려 호기심이나 관심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당신을 보여주세요. 당신을 부모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서로가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당신 아이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송길영 부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캐는 Mind Miner이다. 소셜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얻은 다양한 이해를 여러 영역에 전달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활자를 끊임없이 읽는 잡식성 독자이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저서로 ‘상상하지 말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이 있다.